영화계에서 전통적인 성수기로 꼽혀왔던 여름 시장이 마무리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성수기와 비성수기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있다지만 각사가 미는 ‘텐트폴’ 영화들이 출사표를 던지지 않고 지나간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대신 상반기에는 <파묘>와 <범죄도시4> 두편의 천만 영화가 나왔고 이는 한국영화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24년의 3분의 2가 지나가는 시점, 올해 영화계를 바라보는 업계 관계자들의 총평을 들었다.
영화시장은 정말 망했을까?
“혼자 망해가는 것 같아 더 심각한 영화시장.”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온 어느 네티즌의 글은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배구, 프로농구, 미술 및 공연계의 호황과 비교했을 때 유독 영화시장의 위기가 두드러진다고 지적했다. 이에 티켓값 상승으로 극장산업 매출은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상당 부분 회복했다거나 OTT 플랫폼에 고가로 부가 판권을 넘길 경우 제작비를 보전할 수 있다는 반박이 제기되기도 했다. 상반된 두 주장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울까? 2024년 상반기 한국영화 매출액은 2017~19년 같은 기간 평균의 91.2% 수준, 관객수는 78.0% 수준이다. 한국영화 관객수 점유율은 59.3%로 전년 동기 대비 23.2% 증가했다. <파묘> <범죄도시4> 등 상반기에만 한국영화 두편이 천만 관객을 동원했고 이는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천만 영화를 만든 제작자 A는 “숫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체감하는 현장 상황은 전혀 다르다. 감독, PD, 배우 모두가 입을 모아 ‘요즘 일이 없다’고 한다”며 실제 어려움을 전했다. 또 다른 천만 영화를 제작한 영화·드라마 제작자 B씨 역시 “<서울의 봄>부터 이어진 천만 영화들이 가져온 착시효과”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파묘>와 <범죄도시4> 두편을 제외하면 상반기 한국영화 개봉작 중 관객수 200만명을 넘긴 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 극소수의 영화를 제외하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는 흥행 양극화가 두드러지는 것이다. 또한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OTT 플랫폼에서 제작비 상당 부분을 보전해줄 수 있다는 믿음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OTT 론칭 초기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기 위해 무리한 비용을 들여 영화를 사들인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극장에서의 실패를 만회할 만큼 높은 가격을 부르는 곳이 없다. 다 같이 어려운 시기에 시장의 물을 흐린다는 비판을 감수하고 손해를 줄이기 위해 홀드백 기간을 단축하는 데도 이른바 ‘가격 후려치기’를 당할 때도 있다.” (영화·드라마 제작자 C)
내년부터는 극장에 개봉할 영화가 없다?
극장영화 제작 편수의 급감은 예정된 위기다. 영화 제작자 A씨는 “내년까지는 창고에 쌓아둔 영화들로 매출을 채울 수 있겠지만 그 뒤는 보장하지 못한다”고 걱정했다. “올해 극장 매출이 코로나19 이전 대비 나쁘지 않았다면 지난해와 지지난해에 찍어놨던 영화들이 개봉했기 때문이다. 이 재고를 다 털어내고 나면 극장에서 개봉할 영화가 없다.” 실제로 CJ ENM은 올해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를 제외하고 아직 투자를 확정한 신작이 없다. 영화 제작자 B씨 역시 “해마다 8편 이상 투자하던 CJ ENM이 올해 투자 확정된 작품이 박찬욱 감독의 신작밖에 없다는 것이 상징적이다. 진짜 위기는 내년 여름 이후에 올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대형 투자배급사에서 촬영을 완료했거나 촬영 예정, 투자 검토 중인 작품들이 있고 이들은 극장가 불황으로 각사가 새로운 전략을 고민한 시기에 기획된 작품들이다. 이들의 성과에 따라 영화산업의 진정한 리오프닝이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CJ ENM은 현빈 주연의 <하얼빈>과 이상근 감독의 차기작 <악마가 이사왔다>가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준비 중이다. NEW는 송혜교 주연의 <검은 수녀들> 촬영을 마치고 웹툰 원작의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과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를 준비 중이며, 롯데엔터테인먼트는 동명의 웹소설을 영화화한 <전지적 독자 시점>과 <경주기행>의 촬영을 마치고 향후 투자 검토 중인 작품들이 있다. 쇼박스는 <먼 훗날 우리> <폭설> <모럴해저드>의 촬영을 마쳤고 몇편의 작품을 고려하고 있다. <서울의 봄>과 <범죄도시> 시리즈를 성공시킨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는 하반기 <대도시의 사랑법> <청설> <보고타> 개봉을 준비 중이며 <파반느> <야당> <열대야> 및 나홍진 감독의 <호프>가 촬영을 마쳤다. 현재 중저예산부터 텐트폴까지 폭넓게 라인업 세팅을 위한 검토 작업을 진행 중이다.
‘여름영화’ 없는 여름 시장
올해 여름 시장 최고 흥행작은 관객수 443만명(8월28일 기준)을 동원한 <파일럿>이다. 개봉 9일째에 손익분기점 220만명을 돌파했다. 신생 제작사 쇼트케이크(공동 제작 무비락)에서 두 번째 장편영화를 만든 김한결 감독이 연출한 중급 영화 <파일럿>이 흥행에 성공한 것은 고무적이다. <파일럿>의 원작을 발견한 한준희 쇼트케이크 대표(감독)에 따르면 <파일럿>은 제작 당시 여름 개봉을 당연시했던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코미디영화가 극장 개봉의 형태로 시장에서 소구할 수 있는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조정석의 코미디를 비롯해 극장을 찾는 분들이 기대하는 바를 채워주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었다.” 6월26일 개봉하며 여름영화 중 가장 먼저 베일을 벗은 <핸섬가이즈>는 손익분기점이 110만명 선으로 제작비가 상대적으로 낮은 코미디영화지만 긍정적인 입소문을 타고 관객수 177만명이라는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 이종필 감독의 <탈주> 역시 관객 225만명을 극장에 불러 모으며 충무로 세대교체의 기대주로 이제훈, 구교환을 호명하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코로나19 이전에 여름 극장가 전쟁을 상징했던 ‘빅3’나 ‘빅4’의 부재를 지적한다. 주요 투자배급사들이 1년 중 가장 많은 관객수를 기대하는 대작을 여름 시장에 내놓고 그중 한두편은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안타깝게 흥행에 실패한 작품을 제외하면 500만~600만 관객을 기대한다는 법칙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 시장에서 과거 여름 텐트폴 영화에 가까운 작품은 CJ ENM의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한편뿐이다. 200억원대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한 손익분기점이 400만명대로 추정되지만 관객수 68만명에 그쳤다. 블록버스터영화가 시장을 선도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는 영화 제작자 A씨는 ‘여름영화’의 부재가 곧 한국영화의 자신감 상실을 보여주고, 향후 주요 투자배급사들의 대형 프로젝트가 가시화되지 않은 점과도 연결된다고 지적한다. “시장에 기대치가 없으면 투자가 위축된다. 제작비 200억~300억원의 영화들이 원가를 회수하고 이익을 내서 꾸준히 제작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투자자들에게 주는 사인이 있다. 지금 영화산업이 섹시하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번 여름 시장에는 이같은 역할을 할 텐트폴 영화들이 부재했다.”
<사랑의 하츄핑>이 <리볼버> <빅토리> <행복의 나라>를 이겼다
<사랑의 하츄핑>이 관객수 80만명을 돌파했다. 이번 여름 전도연 주연의 <리볼버>(24만명), 이혜리 주연의 <빅토리>(32만명), 조정석·이선균 주연의 <행복의 나라>(65만명)보다 국산 애니메이션영화가 더 잘된 것이다. <사랑의 하츄핑>을 배급한 쇼박스의 조수빈 홍보팀장은 “자녀가 있는 지인에게 홍보를 할 필요가 없는 영화, 아이들이 굿즈를 사달라고 조르기 때문에 제발 홍보를 멈춰달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워낙 인기 있는 IP라서 처음부터 자신 있게 시작했다. 아이들은 방학, 부모들은 휴가 시즌인 8월이 베스트라고 생각했다”며 여름 개봉의 배경을 설명했다. “일반적인 한국 상업영화를 보는 관객층 이외에 비어 있고 숨어 있는 관객층이 있다. 그들을 겨냥한 전략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 성인 타깃까지 고려한 서사와 스펙터클 요소가 기대 이상의 만족을 준다고 초반에 긍정적인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개봉 때마다 50만명 이상의 흥행을 올리는 시리즈,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은 73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시리즈의 열기를 이어갔다. 영화를 홍보한 이은하 모비 대표는 “애니메이션영화는 팬덤을 공략하는 굿즈가 중요한데 이번에는 좀더 ‘덕후’의 마음을 알아주는 섬세한 마케팅을 했다”며 ‘좁고 구체적인’ 전략을 지향하는 최근의 홍보 트렌드를 짚었다. 이를 지난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의 연장선상에서 애니메이션영화의 유행으로 읽을 수 있을까. 최근 흥행한 애니메이션영화를 홍보한 홍보사 대표 D씨는 “지금 시기를 <슬램덩크>의 버블이 낀 것으로 보고 있다. 애니메이션 편수는 확실히 많아졌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보고 있다고 하긴 어렵다”고 진단했다. 다만 “다양성을 확보했고 소소하게 팬덤을 공략하는 애니메이션이 늘어났다는 것은 성장세로 볼 수도 있겠다”는 의견이다.
개봉 1년 된 영화를 재개봉하는 이유
2024년 상반기 독립·예술영화 흥행 1위는 <남은 인생 10년>이다. 지난해 5월24일 CGV에서 단독 개봉했던 영화다. 올해 4월3일 재개봉해서 개봉 당시보다 3배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남은 인생 10년>의 재개봉을 추진하고 배급한 바이포엠스튜디오는 원래 마케팅 회사에서 출발한 곳이다. 바이포엠스튜디오의 한상일 영화·드라마 사업 부문 이사는 “온라인상 바이럴마케팅을 위해 수시로 요즘 트렌드를 체크하며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본 결과 <남은 인생 10년>은 좀더 가능성 있는 작품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기준은 “단순히 영화가 좋다는 것뿐만 아니라 SNS에서 콘텐츠가 회자되는 빈도수, 배우들에 대한 호감도” 등에 있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의 원작 소설 출판 마케팅을 개봉 1년 전부터 시작한 후 역으로 영화를 수입해 성공시켰던 경험을 이어나갔다. <남은 인생 10년>은 동명의 원작 소설은 물론 휘인, 폴킴, DK(디셈버), 김필, 십센치, 헤이즈 등과 컬래버레이션 O.S.T를 발매해 함께 홍보했는데 (실제 영화에 나오지는 않는다) 이중 십센치의 <티라미수 케익>은 틱톡 챌린지의 폭발적인 인기와 더불어 시너지효과를 냈다. 출판 및 음악 마케팅을 병행해 영화까지 띄운다는 전략은 지난해 재개봉한 <여름날 우리> (2021년 메가박스 단독으로 최초 개봉) 당시에도 활용된 바 있다. 이같은 재개봉 영화의 흥행은 특히 1020세대의 영화 선택을 결정하는 다양한 기준과 마케팅 전략의 변모를 보여준다.
독립·예술영화는 제2의 부흥기를 맞이했는가?
29년 전,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희생>이 서울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한 ‘사건’이 있었다. 올해 극장가에도 90년대 예술영화 열풍이 재림한 것처럼 보이는 몇번의 순간들이 있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만명, <퍼펙트 데이즈> 12만명, <추락의 해부> 10만명, <악마와의 토크쇼> 10만명은 분명 팬데믹 이후 관객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지표다. 이들의 공통점은 칸영화제 수상이나 평론가들의 호평으로 작품성이 검증됐다는 데 있다. 이에 새로운 관객층도 유입됐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악마와의 토크쇼>를 수입한 이지혜 찬란 대표는 “두 영화는 30대 관객의 비율이 높았다. 올해는 중장년층 관객까지 극장에 들어온 해”라고 진단했다. 특히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영화의 사운드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극장 관람이 필수라고 여겨진 점”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퍼펙트 데이즈>는 7월 초 개봉했다. 영화를 수입한 박지예 티캐스트 씨네큐브팀장은 “평소 극장을 자주 찾지 못하는 층도 관심을 가질 만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휴가 등 시간적 여유가 많을 때 개봉했다. 한국 상업영화와 애니메이션 외의 좋은 영화를 찾아서 보는 관객이 볼만한 영화가 적은 시기이기도 하다”며 틈새시장을 노린 전략을 설명했다.
다만 관객이 잘 드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의 격차는 최근 예술영화들의 흥행이 시장을 근본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표를 붙게 한다. “극장 매출 이외 2차 시장 매출이 큰 편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무너진 상태”(이지혜)이기에 극장에서 흥행하지 못한 영화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추락의 해부>를 수입한 유현택 그린나래미디어 대표는 “팬데믹 때에 비하면 지금은 예술영화 시장이 호전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만큼 외면받는 영화가 많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객 사이에서 화제가 된 소수의 몇편 외에는 여전히 안정적인 스코어가 보장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한편 한국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관계자 모두가 실감하고 있었다. 1년에 2~3편씩 한국 독립영화를 배급하는 이지혜 대표는 “지난해부터 신호가 보였고 올해는 더욱 심화됐다”며 우려를 표했다. “한국 독립영화를 즐기는 관객층은 해외 예술영화의 그것과 다소 다른데 그들이 이탈한 것 같다. OTT 등 다른 선택지가 많은 상황에서 제작 환경도 어려워지다 보니 작품 자체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해외 예술영화들이 연달아 좋은 반응을 얻은 것처럼 임팩트 있는 작품이 나온다면 한국 독립영화도 다시 주목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