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를 진단할 때 지난 20여년 동안 빼먹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다. ‘포스트 봉준호, 박찬욱은 어딨는가?’ 혹은 ‘한국영화 세대교체는 이루어지는가?’이다. 지난해 <씨네21> 역시 여름, 추석 극장가를 결산하며 ‘새바람은 부는가, 여름, 추석 극장가 포스트 르네상스 세대의 약진’(<씨네21> 1428호)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엄태화, 유재선 감독 등 신진 세대에 속할 만한 감독들의 활약을 조명했다.
올해 여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 여름 시장에서 김한결 감독의 <파일럿>이 가장 성공했고 앞서서는 이종필 감독의 <탈주>가 선전했다. 특히 3월경엔 <파묘>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극장 안팎의 광풍을 이끌면서 영화감독들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반대로는 충무로 베테랑인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시리즈나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 등 대작 SF가 흥행에서 주춤한 것을 두고 중견감독들의 부진을 강조하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당연한 의문이 뒤따른다. 지금 정말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대체 세대교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몇개의 사례로 산업의 흐름을 따지기는 어렵다
위에서 언급한 몇몇 영화의 개별적인 성적을 통해 한국영화 세대교체를 말하는 것은 “너무 섣부르고 산업의 단면만 보는 일” (제작자 A씨)에 가깝다. “그렇게 따지면 90년대에 입봉한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 몇개의 사례로 산업의 흐름을 따지기는 어렵다”(제작자 A씨)라는 뜻이다. <탈주>의 이종필 감독도 “젊은 감독 누구 누구를 특정하기보다는 가장 활발하게 활동해야 할 때인 30~40대 감독들의 흥행작이 나오는 건 어느 시장에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영화계 관계자 B씨도 “<파일럿> <탈주> 등은 지금의 산업 분위기에 맞춰 전업 감독의 역할을 충실하게 잘해낸 경우”일 뿐 “세대교체의 신호탄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확언했다. 기존의 기획·투자·제작·배급 관행에서 벗어나지 않은 산업 논리가 큰 변화 없이 연장되는 게 지금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2000년 무렵 한국영화 르네상스 당시 CJ 등 대기업 자본이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고 90년대 시네필 출신 감독들의 등장으로 시장의 판도가 바뀌었던 때라거나, 1970년대 미국처럼 대형 스튜디오 시스템이 끝나고 중소 규모의 뉴아메리칸 시네마가 봉기했던 때처럼 명확한 ‘세대교체’의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업계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말한 ‘아웃라이어’는 장재현 감독뿐이다. 오컬트 장인이라는 자기만의 브랜드 가치를 구축했고, <검은 사제들> <사바하>를 거친 이후 <파묘>에 이르러선 자체 제작사를 설립하면서 감독 고유의 제작 모델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제작자 C씨는 “장재현 감독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콘텐츠 시장의 소비 패턴을 제대로 적중시킨 사례”라고 평했다. “최근의 콘텐츠 소비자들은 영화든 양자역학이든 세계사든 오컬트든 인터넷으로 특정한 분야를 파고들며 디깅하는 패턴을 선호”하기에 “기존 한국영화의 감정적 보편성이 아니라 굉장히 전문화된 브랜드에 끌리는 경향”을 보여주므로 장재현 감독의 위치가 확고해졌다고 주장했다. 다수의 천만 영화에 참여한 제작자 D씨의 의견도 비슷했다. “이제는 기존의 미국식 영화 구조가 아니라 장재현 감독처럼 본인의 아이덴티티가 확고한 인물들이 더 필요한 때”라며 “만약 세대교체라는 말을 써야 한다면 그런 감독들, 대개 독립영화에서 뚜렷한 개성을 드러냈던 창작자들이 산업으로 터져 나와야 하는 게 맞다”는 주장이다.
일각에선 최근 몇몇 독립영화 출신 감독들의 상업영화 진출 성적이 좋지 않았던 사례를 지적하기도 했지만, 기성 제작자들 대개는 신진감독들에 대한 비판보다는 제작 업계의 자기반성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천만 영화 제작자 E씨는 “자기만의 세계관이 강한 독립영화 출신 창작자들이 대중적으로 사고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진 않다”면서도 “기획 영화에 적절한 감독을 픽업하지 못하고 결과물에 대해 감독을 비난하는 일은 제작자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이라는 말을 남겼다. 제작자 A씨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지만 일부 독립영화 출신 감독은 영화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너무 충만하거나, 투자자들과의 소통에서 자기만의 가이드가 확고한 경우”가 있다면서도 “그럼에도 새로운 창작자를 계속 발굴해 업계의 혈을 뚫는 게 제작자들의 일”이라고 밝혔다.
천만 영화 제작자 F씨도 최근 흥행에서 부진한 영화들의 근본적인 이유는 감독들의 경력이나 나이를 떠나서 “제작사의 안일하고 헐거운 기획”이라고 꼬집었다. “예전 같으면 관객들이 극장에서 봐줄 만한 기획이었어도 요즘엔 수많은 양질의 드라마와 공연, 관광, 레저가 대체재가 된 만큼 더욱더 완성도 높은 기획으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작자 D씨도 “나를 포함해서 기성감독, 제작자들은 원래의 내 것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고 다시 점검해야 할 때”라고 자평했다.결국 한국영화의 세대교체에는 최근 콘텐츠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제작 업계의 전반적 변화와 쇄신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나이가 어린 감독 몇명이 흥행작을 만들었다고 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고 보긴 어렵다. “지금 한국영화에 필요한 것은 예전 오기민, 차승재 제작자처럼 지금도 매년 쏟아져 나오는 뛰어난 감독들에게서 상업영화적 감각을 발견해줄 제작자”(B씨)란 의미다. 감독, 제작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C씨는 안국진 감독의 <댓글부대>를 언급하면서 “소수의 젊은 스태프가 영화에 나오는 커뮤니티의 ‘짤’이나 말투 같은 것을 젊은 감각으로 재현”했던 사례를 강조했다. 영화 업계 전반의 인력풀에 분명히 새 물결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바늘구멍을 뚫으려는 시도들
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결국 업계의 불황이다. 개성을 지닌 신진감독이나 현장 인력이 업계에 새로 진입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치명적이다. 이종필 감독은 “<전국노래자랑> 때도 제작에 들어가기 어렵긴 했으나 그때의 어려움이 그래도 돌아가고 있는 영화판에서 기획에 대한 여러 구체적인 점검, 이를테면 빌런이 약하다든지 사건이 별로라든지 하는 평가”였다면 “지금은 아예 메이드(투자 및 제작 결정 과정)까지 가는 경로가 희박해진 느낌”이라고 밝혔다. 제작사 C씨는 “매년 50여편의 상업영화가 개봉하던 시대와 지금 10편 남짓 투자되는 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며 “핑계일 수도 있지만 신인감독의 기용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의 모수가 지나치게 적기 때문”이라고 소회했다.
그럼에도 80년대생을 주축으로 형성 중인 신진 제작자와 창작자들의 협업은 계속하여 성과와 기대를 부르고 있다. 전술한 <파일럿>은 김한결 감독의 2번째 장편영화이면서 <D.P.> 시리즈 등을 연출한 한준희 감독이 제작한 작품이기도 하다. 변승민 클라이맥스스튜디오 대표는 <벌새> 김보라 감독과 차기작 <스펙트럼>을, 애니메이터 한지원 감독과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을 준비 중이다. 구교환 주연의 SF 대작 <왕을 찾아서> 개봉을 앞둔 이성진 위드에이스튜디오 대표는 독립영화 <세기말의 사랑>을 함께했던 임선애 감독과 차기작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시 조찬모임>의 크랭크인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이성진 대표는 “<왕의 남자>부터 <오징어 게임>까지 오랜 시간 콘티 작가로 활약한 임선애 감독이 지닌 앵글 감각과 영상화 역량, 고유의 정서를 보고 나니 동명 원작의 영화화를 함께 잘해낼 수 있겠다고 느꼈다”라는 비화를 전했다. 영화 한편 만들기가, 신인감독 한명이 메가폰을 잡기가 바늘구멍 뚫듯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산업의 혈류를 뚫어 진정한 의미의 세대교체를 도모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