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7~8월마다 여름 극장가를 노리는 3, 4편의 대작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특집을 꾸려온 <씨네21>이 2024년에는 그런 기사를 낼 수 없었다. 올여름 극장가에는 이른바 빅3, 빅4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자리를 채우는 건 신예 김한결 감독이 연출하고 조정석이 주연을 맡은 중급 코미디영화 <파일럿>과 어느새 80만명을 돌파한 애니메이션 <사랑의 하츄핑>이다. 상반기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신기하고 복잡한 현상은 더 많다. 성수기와 비성수기의 개념이 사라졌고, 거의 매주 다른 공연 실황 영화와 재개봉 영화가 극장에 걸리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관객 20만명을 기록하는 등 아트하우스 영화의 약진이 이어지고 있다. 팬데믹 이전이라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어떤 법칙이나 대응책도 보이지 않는 미래 사이에 한국영화는 어떻게 방향을 정해야 할까. 우선 여름 시장을 중심으로 2024년 상반기 극장가를 정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고자 <씨네21>은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김철홍, 유선아, 이보라 세 젊은 영화평론가와의 자리를 마련했다. 3시간 가까이 이어진 이야기 속에 명쾌한 해답은 없었지만 적어도 희망의 실마리는 있었다.
유선아 규모 있는 영화가 앞으로 매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상반기였다. 특징적으로는 애니메이션, 공연 실황 영화 등 팬덤을 노리는 전략적인 영화를 극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고, 꼭 누군가의 팬이 아니더라도 유튜브나 OTT 환경이 충족해줄 수 없는 극대화된 시청각적 경험을 원하는 층이 극장을 많이 찾은 것 같다.
이보라 K팝, 트로트, 클래식 등 장르를 막론하고 공연영화들이 쏟아지는 걸 보면서 관객 사이에서 안전함이라는 감각이 커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새로움과 충격보다는 이미 내가 좋아하고 잘 알고 있어 즐거움이 보장되는 영화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변화에 맞춰 극장도 기념사진을 찍고 추억을 향유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듯하다.
김철홍 성수기, 비성수기에 따라 영화가 잘되거나 못되지 않고 올해 여름 시장에 빅4가 없는 걸 보면서 영화 자체로 승부를 보는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작품성이 아쉬운 영화가 7~8월 대목에 속했다는 이유로 천만 영화가 되는 경우와 그동안 통하던 전통적이고 올드한 배급 공식이 팬데믹 이후로 다 초기화돼버렸다. 불황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지금이 건강해지기 위한 과도기인지도 모른다.
- 8월27일 현재 올해 상반기 흥행 톱10 작품은 <파묘> <범죄도시4> <인사이드 아웃2> <파일럿> <웡카> <탈주> <듄: 파트2> <데드풀과 울버린> <핸섬가이즈> <하이재킹>이다. 리스트를 고려했을 때 올해의 흥행 법칙이 무엇이라고 보나.
김철홍 예전이라면 올해 결과를 의외라고 받아들였을 테지만 지금은 꽤 이해가 간다. 시기적인 도움 없이도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는 점에 서 열편 모두 나름대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포인트를 갖춘 영화라고 본다.
이보라 리스트가 앞서 말한 안전함에서 기인한 결과라고 볼 수 없어 당황스럽다. 개별 영화만 보면 각 매력을 찾을 수 있겠는데 리스트를 한데로 묶는 공통 지점은 없는 듯 보인다.
유선아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도, 이렇다 할 흥행 법칙도 찾기 어렵다. 흥행은 누구도 담보할 수 없다는 흔한 답변만 떠오른다.
- 이중 1191만명을 동원해 상반기 흥행 1위를 한 오컬트영화 <파묘>와 장재현 감독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있나.
이보라 솔직히 나는 <파묘>는 별로였다. 전개에 허점이 많고 즐거운 면모가 하나도 없는 영화였다. 그래서 천만 흥행을 이룬 게 여전히 내게 의아하게 남아 있다. 젊은 관객이 이 영화에 왜 매력을 느낀 건지 궁금해서 많이 찾아보기도 했다. MZ 무당으로 분한 김고은, 이도현 배우 때문일까. 아니면 토속적이고 익숙한 걸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멋지고 낯선 걸 발견한 때문일까. 이처럼 나름의 답도 내려보았지만 잘 모르겠다.
유선아 나는 좋게 본 편이다. 나중에 한번 더 봤을 때는 갑작스러운 잔혹함, 중반 이후 톤이 달라지는 지점의 어색함이 걸리긴 했지만 다수가 지적하는 후반부도 감독이 제 고집대로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봤고 여전히 재미있었다. 잘 모르지만 한국 토속신앙의 디테일을 구현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별개로 영화 초반에 ‘나는 누구다’라는 식으로 주인공들을 소개하는 방식이 웹툰의 화법이라 장재현 감독이 웹툰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김철홍 나로서는 <파묘>의 흥행은 완전히 예측 가능한 결과였다. 분야를 막론하고 프랜차이즈의 안정성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성향과 연관지었을 때 즐길 만한 오컬트물을 계속 만들어내는 장재현 감독에 대한 기대심리가 꾸준했고, 그게 <파묘>에 이르러 터졌다고 본다. 유선아 평론가가 언급하신 웹툰스러움이 또 다른 흥행 요인이지 싶다. 장재현 감독이 웹툰을 많이 보면서 성장했다면 웹툰적 감각이 영화에 분명 담겼을 거고 그게 요즘 극장 주소비층의 젊은 감각과 맞아떨어졌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파묘> <파일럿> <탈주>가 <외계+인> 1·2부 <원더랜드> <비상선언>보다 잘된 이유 중 하나로 젊은 연출자의 작품이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이보라 외연에서는 젊은 세대의 표현 방식이 강하게 드러나지만 사실 <파묘>의 핵은 그 안에 선명하게 각인된 반일 혹은 항일 이데올로기이지 않을까. 한국인 전 세대가 당연하게 감각하는 민족주의적인 무언가가 강력한 소구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파일럿>의 전략에 대하여
- 올여름 영화 중 가장 잘된 작품은 <파일럿>이다. 블록버스터급이 아닌 영화가 관객 430만명을 기록하며 시장 1위에 오르는 현상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나.
유선아 여름 시장에서 <파일럿>이 주목받은 건 나쁘지 않은 현상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여름 시즌에 조정석 배우의 주연작 두편이 나란히 개봉했는데 관객의 선택을 받은 작품은 <행복의 나라>가 아닌 <파일럿>이다. 능청스러운 코미디 연기뿐 아니라 춤과 노래까지 잘 소화한다고 알려진 배우에게 기대하는 재미가 분명히 있었을 테고 휴가 기간에는 편안하고 복잡하지 않은 영화를 보고 싶다는 관객의 심리가 작용한 결과라고 본다. 영화 내적으로는 직장, 가족, 연애 등 다양한 관계망을 자잘하게 엮은 점이 드라마 몇 편을 영화 한 편으로 압축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튜브 영상, SNS 이미지를 무분별하게 반영하지 않고 서사적으로 자연스럽게 녹여내 어떤 유의미함을 획득한 점은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었다. 연관해서 올해 6월 개봉한 <드라이브>는 고화질의 화면을 보러 간 극장에서 실시간 채팅이라는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저화질로 만든 화면을 관람하는 감각, 영상통화하는 스마트폰 세로 화면을 대형 스크린의 풀사이즈로 봐야만 하는 이유 등 생각할 거리를 내게 안겨주었다.
김철홍 <파일럿>은 꽤 괜찮은 영리한 영화다. 앞서 <시민 덕희> <핸섬 가이즈>가 100만명대 관객을 불러모으면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둔 걸 보고 코미디에 대한 수요가 분명히 존재한다고도 생각했다.
이보라 <파일럿>이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간 점이 흥행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영화는 비상 착륙 장면을 한국판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 되고 싶다는 야심 없이 담백하게 끝낸다. 아마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나갔다면 무거운 현실이 틈입하면서 관객이 느끼는 이 영화의 인상도 달라졌을 거다.
- 김용화 감독의 <더 문>,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1·2부,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까지 한국의 스타 중견감독들의 SF영화 도전이 연이어 실패한 이유를 어떻게 보나.
김철홍 한국 관객이 SF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SF영화가 잘 안된다는 얘기가 있는데 더는 유효하지 않은 해석이다. 딱 잘라 말해서 세 중견 연출자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관객에게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거다. SF의 세계는 현실보다 훨씬 이질적인 만큼 설득력이 중요한데 ‘낯섦’이라는 매혹만을 원한 감독들이 이 점을 지나치게 간과했다.
유선아 김철홍 평론가와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은 SF의 불모지’라는 말은 이제 무의미한 것 같다. SF 소설과 연극이 자리잡은 지 이미 몇 년 됐다. 한국 SF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장르를 시각적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으로만 소비한다는 점이다. SF는 무대를 우주나 미래로, 주인공을 로봇으로 바꾸어 인간에 대해 철학적인 고민을 하는 장르다. 그만큼 더 깊은 고민과 접근이 필요한데 한국 SF영화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분에 소홀하다.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원더랜드>는 김태용 감독의 영화 세계가 <가족의 탄생> 이후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 영화다. 배우를 활용하는 방식도 무척 아쉽다. 정유미, 최우식 등 그 많은 좋은 배우들에게 과연 그 역할이 최적이었을까. 탕웨이의 쓰임은 <헤어질 결심>과 놓고 보면 더욱 아쉽다. <더 문>은 보면서 설경구라는 배우가 연상케 하는 시대 감각이 SF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보라 SF영화인데 SF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장르에 관한 진지한 탐구를 위해 SF를 한다기보다는 현실의 우리 얘기를 하는 게 골치 아프니까 도피 차원에서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인상을 안긴다. 그러다 보니 한국 SF영화는 세계관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기술력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다. <원더랜드>는 보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비평적으로 성공한 <가족의 탄생>을 염두에 두고 기획한 영화였을까, <가족의 탄생>을 좋아하기 때문에 <원더랜드>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 접점 없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다는 설정만 놓고 보면 두 영화는 비슷하다. 그러나 불균질한 것들을 개성적으로 엮어내는 감독의 강점이 <원더랜드>에 와서는 몰개성으로 수렴돼버리고 말았다. <가족의 탄생>에서 선경(공효진)이 하늘로 승천하는 장면 같은 김태용만의 판타지, 약간 모자라지만 즐거운 감각들도 매끈한 이번 결과물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유선아 <외계+인> 시리즈는 <맨 인 블랙>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 20세기의 <에이리언> 시리즈의 크리처를 연상시키는 외계인의 외양, 80~90년대의 중국이나 홍콩을 떠올리게 하는 의상이 향수를 자극해 부분적으로 재밌게 봤다. 그러나 중구난방의 소재를 중구난방으로 다뤄 전체적인 서사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만약 <외계+인>을 어느 젊은 감독이 만들었다면 주목할 만한 신예의 등장이라고 환영했을 거다. 그러나 이 영화는 최동훈이 연출했고 그가 거대 자본과 화려한 배우진으로 완성한 작품이기에 박한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고 본다.
- 김태용, 최동훈 등의 실패를 두고 ‘올드보이의 몰락’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쓰는 이들도 있는 가운데 김성수 감독은 <서울의 봄>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오승욱 감독은 현재 한국 상업영화 시스템에서 고집하기 어려웠을 형태의 작품 <리볼버>를 만들었다. 최근 중견감독들의 성공과 실패, 혹은 유의미한 성과를 어떻게 진단하나.
유선아 <서울의 봄>은 1970~80년대를 경험한 중장년 세대의 극장으로의 움직임, 정우성과 황정민 등 화려한 배우진, 심박수 챌린지 같은 SNS 이벤트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중 심박수 챌린지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압도적인 체험’이 극장을 찾는 주요 기준 중 하나가 됐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했다.
김철홍 시리즈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서울의 봄>의 흥행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명량>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신뢰할 수 있는 리더에 대한 갈증이 큰 시기에 그 갈증을 충족하는 영화가 등장하면 영화 안팎으로 에너지가 크게 폭발하는데 이같은 맥락에서 성공 요인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보라 <리볼버> 얘기를 하고 싶은데 못 봤다. 대담을 앞두고 보려 하니 관이 없었다. 8월7일에 개봉했는데 이렇게까지 상영관이 줄 수 있나 싶고 다소 충격받았다.
김철홍 나는 보고 왔는데 완성도가 크게 아쉬운 영화다. 전체적으로 급하게 만든 느낌이고 특히 편집이 허술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단점에 대한 내적인 정리가 어느 정도 돼야 장점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선아 할 말이 많은 영화다. (웃음) 내겐 호도 아쉬움도 큰 영화다. 우선 이번 <리볼버>에서도 <무뢰한>의 김혜경(전도연) 같은 술집 여성이 등장한다. 임지연 배우가 맡은 정윤선이 그 역할인데 정윤선은 김혜경과 달리 직업여성의 면모가 전혀 드러나진 않지만 작중 호칭은 김혜경과 마찬가지로 마담이다. 나는 이러한 연장이 불필요한 답습처럼 여겨진다. 한국 누아르의 여주인공이 화류계 여성이었다가 주변 인물로 밀려난 점은 반길 부분이지만 오승욱 감독이라면 한국형 누아르의 불필요한 답습을 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리볼버>의 전체를 지배하는 우아함이 좋은 동시에 그 무드를 마디마디 끊어내는 지나치게 상스러운 대사가 아쉬웠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양쪽 무드를 동일한 무게감으로 가져간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오승욱 감독이라면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아한 한국형 누아르가 그 때문에 멀어져 더 안타까웠다. 전도연이라는 톱스타의 얼굴에 의존하는 영화라는 부정적인 평가와는 의견이 다르다. <리볼버>가 정말 그런 영화였다면 특별 출연한 이정재 배우를 지금처럼 쓰지 않았을 거다. 그가 뒤돌아볼 듯 말 듯하면서 오묘하고 이상한 기류가 분출하는 장면이 내게는 <리볼버>의 베스트 신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에 전도연의 얼굴에서 끌어낸 허무의 정서도 인상적이었다.
김철홍 최근에 황정민 배우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의 출연작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과거 한국영화에는 직업여성이 정말 많이 등장하고 거기서 상황을 전개하는 경우가 허다하더라. 지금 보니 너무 올드하다 싶었다. 이런 맥락에서 <리볼버>가 지금 관객에게 불호로 다가왔다면 아마도 대놓고 신나게 즐길 수 없는 이야기와 장소, 인물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전도연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영화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트하우스 영화들의 약진과 한국 독립영화의 침체
- 한편 예술영화 시장에서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추락의 해부> <퍼펙트 데이즈> 등의 스코어가 좋다. 일부 아트하우스 영화와 재개봉 영화가 약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이보라 모두 칸영화제 주요 수상작이라는 뚜렷한 마케팅 포인트가 있다는 게 주요한 흥행 요인일 거다. 작품별로 보자면 <추락의 해부>는 잔드라 휠러라는 배우가 주는 힘이 특히 컸던 것 같고 아카데미 특수도 있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사운드의 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엔딩 크레딧의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화제가 되는 걸 보면서 음향적인 면에서 영화가 홍보되고 관객이 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한 작품이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내가 이걸 봤다’ 하고 SNS에 증명하기 좋은 수단이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유선아 의지를 가지고 아트버스터를 소비하는 관객층은 그동안에도 분명히 있었다. 다만 티켓값이 오르면서 해외 영화제 수상작처럼 안정성이 확실히 담보된 영화를 찾는 관객이 늘어난 듯하다. 흥행한 아트버스터가 모두 높은 별점을 받은 영화라는 점에서도 안정성이 영화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재개봉 영화가 약진한 요인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재개봉 영화가 많이 보인다는 건 그만큼 당장 극장에 걸 최신 영화의 수가 부족하다는 방증으로 읽긴 했다.
- 반대로 한국 독립영화는 여전히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철홍 해외 아트하우스 영화의 흥행과 국내 독립영화의 부진은 연결된 문제다. 이슈에 민감하고 인증숏 같은 부가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아트하우스 영화 소비층에게 칸영화제, 아카데미 수상작은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로 분류된다. 반면 유명 영화제의 마크가 붙은 영화의 편수가 갈수록 주는 독립영화 시장은 그만큼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해외 영화제 초청이 작품성을 보장한다거나 영화의 지상 최대 목표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의 상황을 냉정히 돌아보고 한국 독립영화의 질적인 면에 대한 확실한 쓴소리가 필요한 시기라고 본다. 극장 산업 논리나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 축소 문제에서 독립영화가 어려운 이유를 찾는 건 쉬운 접근이다.
유선아 최근 한국 독립영화를 돌아보면 2000년대 초반 한국 독립영화 신을 지배하던 만성우울증 같은 정서는 어느 정도 빠진 것 같다. 똑같이 어려운 현실을 배경으로 다룬다고 하더라도 예전처럼 엄중하게만 접근하지 않고 귀엽고 엉뚱하게 다가가려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다시 말해 <무산일기> <똥파리>가 주를 이루던 시기에서 <지옥만세> 같은 작품도 나올 수 있는 시기로 옮겨간 것 같다. ‘언제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거지' 하며 기다려온 관객으로선 반가운 변화다. 영화제는 늘 붐비는데 한국 독립영화는 침체인 이유를 고민해보면 독립영화의 카메라와 문법으로만 다룰 수 있는 세상과 인물이 더는 매력 요소로 작용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독립영화에서 주로 다루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문제에 대한 관심이 사회 전반적으로 식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보라 한국 독립영화와 재개봉 영화를 묶어서 말하자면 우선 독립영화의 침체는 확언할 수 없지만 편 수가 준 것. 그것 자체가 큰 위기라고 본다. 재개봉 영화는 초입에 말했듯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안전한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환영받는 것 같다. OTT가 완전히 자리잡으면서 영화를 개봉 시기에 맞춰 보러 가고 이야기를 나누고 리뷰를 쓰는, 영화와 관객이 함께 피고 지는 리듬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상황이고, 이러한 변화의 타격을 환경적으로 연약한 독립영화가 가장 크게 받고 있다.
- 올해 개봉작 중 과소평가됐다고 생각되는 작품이나 이 자리에서 언급하고 싶은 작품들을 꼽는다면.
유선아 김태곤 감독의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연출, 각본, 촬영, 연기, 편집 등 전체적으로 고르다는 인상을 준 영화였다. 물론 안정감과 균형감이 영화를 특색 없어 보이게끔 할 수 있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했고 개를 주인공으로 한 괴수물이 신선하게 느껴져 좋은 평을 주고 싶다. <댓글부대>도 수작에 준하는 작품인데 스코어가 너무 안 나왔다. 메타 서사를 기반으로 한 복잡한 이야기들을 상업영화 안에서 잘 풀어냈다. 하나 더 꼽자면 <빅토리>. 레트로 붐의 끝물에 도착한 감이 없지 않지만 신선한 얼굴이 정말 많이 나와서 좋았고 청춘 소녀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조선소 노조 파업이나 부녀 관계를 진지하게 다룬 점에서 호감을 느꼈다.
이보라 상반기에 가장 좋았던 유형준 감독의 <우리와 상관없이>를 꼽고 싶다. 하고 싶은 자신의 이야기가 있고 보여주고 싶은 자기 세계가 분명한, 뚝심 있는 영화였다. 이야기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형식적 측면을 강화하는 시도가 강렬했고 무엇보다 ‘재능의 영화’라고 부를 만한 놀라운 작품이었다. <댓글부대>는 안국진 감독이 독립영화에서 보여준 개성을 상업영화에 잘 안착시킨 결과라고 생각한다. 중심인물이 내레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확 끌어가고 깔끔한 교차 전개 방식,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재기발랄한 면모까지 다 살아 있어 재밌었다.
김철홍 올해 2월28일에 개봉한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뒤 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할 만큼 재밌게 봤다. 영화를 보면서 김다민 감독은 본인의 개성을 간직하며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창작자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시리즈 <살인자ㅇ난감>의 각본도 쓰셨더라. 다음이 기대될 수밖에 없는 분이다. 두 번째로 이상학 감독의 <엄마의 왕국>.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경쟁작이었는데 바로 몇달 뒤 7월24일에 개봉한 특이한 경우이고 그만큼 상징성이 있는 작품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초반 스릴러 작품이 느껴지는 컷과 편집을 잘 살리면서도 한국 고유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