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자신의 최고 영화를 건 위험한 검투, <글래디에이터 Ⅱ>
2024-12-04
글 : 김철홍 (평론가)

막시무스(러셀 크로)가 목숨을 바쳐 폭군 콤모두스의 시대를 종식시켰음에도 폭력이 또다시 로마를 지배한다. 24년 만에 돌아온 <글래디에이터Ⅱ>는 이 비정한 소식을 알리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로마인들은 막시무스의 희생으로 모두 감화된 게 아니었던가. 모든 게 리셋됐다면 <글래디에이터>는 무엇을 위한 설화인 걸까. 전작의 감동을 단박에 무너뜨리는 고대 로마로부터의 단신(短信). 믿을 수도 인정할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일들은 현실에서도 일어난다. 과거가 <글래디에이터>의 엔딩처럼 찬란했어도 그렇다. 지구 도처에서 밀려드는, 그 인과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뉴스를 우리는 영화의 자막처럼 속수무책으로 접한다. 이때 가장 비극은 사람들이 현실을 향한 관심을 포기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광스러운 그 순간 자체가 무가치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의 씨앗이 자라나는 거다. 과격한 차별/혐오 발언을 일삼는 후보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뒤, 희망을 갖게 한 몇 소식들을 의미 없다 여기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글래디에이터Ⅱ>는 시작 자체가 엄청난 리스크인 작품이다. ‘글래디에이터’ 브랜드의 최대 매력이자 존재 이유이기도 한 검투를 다시 이어가려면 영웅 막시무스의 업적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폭군이 재발했으니 막시무스가 한 일이 의미가 없었던 것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리들리 스콧이 글래디에이터를 다시 스크린에 소환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검투가 만들어낼 스펙터클을 재차 구현하기 위함일까. 그는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될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의 영화를 걸고 위험한 검투를 시작한다.

<글래디에이터Ⅱ>는 구조적으로 1편과 거의 동일한 틀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사실상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바꾼 걸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이 영화가 그저 전작의 유명세만 가져와 같은 것을 한번 더 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너무도 안이한 변주 때문에 타당하게 들린다. 그럼에도 반박은 가능하다. <글래디에이터>의 서사구조가 영웅 서사의 정석이라고 주장하는 거다. 특히 뛰어난 전사가 노예 신분이 되어 콜로세움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주기 위해선, <글래디에이터>가 보여준 기승전결을 따르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말하며 말이다. 그래서인지 루시우스(폴 메스칼)는 막시무스의 행적을 그대로 따른다. 군인이었다 노예가 되어 콜로세움에 입성하고, 가족을 잃은 분노를 갑옷처럼 두른 채 경기장 안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의 숙적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를 만나 복수의 칼을 휘두른다. 물론 <글래디에이터Ⅱ>는 결정적인 순간에 루시우스에게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들긴 한다. 그러나 종국엔 루시우스의 칼끝이 로마의 권력자들을 향하게 된다는 점에서 영화는 전편과 같은 결의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과연 <글래디에이터Ⅱ>는 전편을 답습하기만 한 속편일까. 이 영화에 대한 또 다른 주요한 비판은 주인공에 비해 검투사 프로모터인 마크리누스(덴절 워싱턴)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덴절 워싱턴이 압도적인 탓도 있을 거고, 또 러셀 크로의 아우라가 강렬해 폴 메스칼과 페드로 파스칼이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웠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마크리누스를 돋보이게 한 것이 <글래디에이터Ⅱ>의 주요한 의도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1편과는 너무도 다른 이 핵심적인 차이에 주목할 때, 리스크를 지닌 이 영화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비슷한 구조를 가진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 마크리누스라는 캐릭터의 동선에 있다. 1편에서 올리버 리드가 연기한 프로모터 프록시모와 마크리누스는 모두 조연의 위치로 극에 등장한다. 그들의 역할은 단순하다. 처음엔 노예들을 자신의 재산을 불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악덕 고용주로 활약한다. 그러다 그중 눈에 띄는 막시무스/루시우스를 발견하여 기회를 주다가 점점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선의를 드러낸다. 특히 프록시모는 막시무스를 돕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기까지 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과오를 면죄받는다. 폭력이 엔터테인먼트화된 시스템에 열광하는 시민들을 양성한 것에 일조한, 다시 말해 폭군 정권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악인으로 분류되는 것에 마땅한 인물이었으나, 마지막에 영웅을 도왔기 때문에 의인으로 남게 된다.

리들리 스콧은 이 부분을 수정한다. 이 위치에 있는 자가 선인으로 기억된 자신이 만든 기념비적 영화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천명하듯, 같은 자리에 있는 인물을 전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한다. 그리고 그가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을 영화의 최고 클라이맥스에 배치한다. 그때 이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카시우스의 죽음 이후 마크리누스가 갇혀 있는 루시우스를 찾아오자, 루시우스는 마크리누스에게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냐 묻는다. 그러자 마크리누스는 자신이 ‘신이 선택한 존재’라고 답한다. 이 대사를 그저 심각한 망상에 빠진 사람의 헛소리로 넘길 수도 있겠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것이다. 지극히 이성적으로 보였던 인물이 이상행동을 보이는 순간, 가상의 로마라는 팩션을 창조한 영화 밖 감독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느껴지게 된다.

그렇게 <글래디에이터Ⅱ>는 이 폭력의 순환이 오직 리더만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명확히 한다. 폭군 한명이 죽은 것으로 세상이 바뀔 거라고 말했던 과거를 수정하기 위해, 전편의 구조를 그대로 반복하되 폭력에 부역했던 한 인물의 결말에 차이를 둔다. 왜 하필 프로모터를 수정하였는가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개인적으론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현대판 검투’ UFC와 WWE의 수장(이었던) 데이나 화이트와 빈스 맥마흔이 떠오르기도 한다. 둘 다 얼마 전 재선된 도널드 트럼프와 오래전부터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리들리 스콧이 그들을 콕 집어서 지목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자꾸 겹쳐 보일 뿐이다. 엔딩인 줄 알았는데 다시 폭력이 시작되는 믿기 어려운 현실과 영화 속 콜로세움이. 그리고 그 콜로세움(들) 주변에서 사람들의 분노로 돈을 버는 사람들의 얼굴과 마크리누스가.

그런 관점에서 감독이 마크리누스에게 특별한 전사를 마련해주지 않은 것 또한 절묘하게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마크리누스의 과거를 궁금해하는 장면을 여러 번 보여주지만, 앞서 언급한 장면에서 밝혀지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계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로마의 황제에게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출생의 비밀이 있는 자도 아니다. 마크리누스는 아무도 아닌 자이며 동시에 누구나 될 수 있는 자로 남는다. 그래서 검투는 영원히 반복될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폭력이 언제 마크리누스의 얼굴을 하고 드러날지 알 수 없다.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싸워 봤자 다시 또 반복될 테니 포기할 것인가. 각자의 무기를 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루시우스(리들리 스콧)가 영웅과 악인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무기를 어떻게 휘두를지는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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