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오디세이]
[박홍열의 촬영 미학: 물질로 영화 읽기] 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 <벌집의 정령>과 <클로즈 유어 아이즈>, 31년 사이의 비전
2024-12-04
글 : 박홍열 (촬영감독)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를 촬영할 때 난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나의 시력은 2.0이었는데도 세상 모든 것들이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게 보였다. 세상이 뭉개져 보인 상태로 촬영했던 영화가 <우리 선희>였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이선균 배우 추모전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기 전까지 난 이 영화의 이미지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내 기억 속의 <우리 선희>는 흐릿한 영화였다. 11년 만에 본 영화, 내가 직접 촬영했음에도 영화의 빛은 모두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배우들의 어깨 위에 빛이 있었고 반복되는 같은 장면에서는 사라졌다. 다시 반복되는 장면에서는 빛이 배경 위에 있었다.

<벌집의 정령> 속 아나의 언니 이사벨의 말처럼 정령은 우리 주변에 있다. 빛도 우리 주변에 있다. 이제는 시력이 돌아와 세상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런데 선명하게 보일수록 오히려 보이지 않는, 아니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시력은 돌아왔으나 촬영을 할수록, 영화를 알수록 더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본질적인 의문.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감독이 있다. <벌집의 정령>에선 색으로, <남쪽>에선 시점으로, <햇빛 속의 모과나무>에선 운동의 포착으로,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선 사람의 감은 눈으로. 빅토르 에리세 감독은 이 고민을 놓지 않고 색과 어둠을 통한 자신만의 이미지를 작품마다 드러냈다. <벌집의 정령>과 <클로즈 유어 아이즈>, 두 영화를 통해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보려 한다.

31년 전의 비전

벌집의 정령
벌집의 정령

1973년 스페인, 한 촬영감독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 영화를 촬영한다. <벌집의 정령>의 촬영감독 루이스 쿠아드라도다. 그는 이 영화 촬영 당시 뇌종양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촬영을 했다. 시력을 잃어가는 사람이 빛을 사용할 때 그 빛과 색은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될까? 자연광을 잘 사용하던 루이스 쿠아드라도는 이 영화에서는 자연광을 대신해 인공의 빛을 영화 안으로 가져온다. 벌집 문양 창을 통해 들어오는 인상적인 옐로 빛으로 주인공 아나의 집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강한 밝은 옐로는 창밖 세상의 빛인 아주 낮은 저채도의 블루를 가리는 동시에 보색인 블루 빛을 더 드러나게 하기도 한다. 엘로의 고정된 의미 위에 블루의 고정된 의미가 함께 놓이기도 하고, 옐로의 의미가 있던 자리에 블루의 의미가 대신 자리를 잡기도 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따뜻한 옐로와 차갑다고 생각하는 블루, 이 색들의 의미를 <벌집의 정령>에서 서로 바꾸어놓는다.

옐로 빛이 가득한 영화 속 주요 공간인 아나의 집 창문은 벌집 모양이다. 그래서 아나의 집 안을 벌집으로 유추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는 아나의 집 안이 아닌 창밖 세상이 벌집이다. 아버지는 집 안의 유리 양봉 상자 안을 바라보듯 세상을 벌집으로 바라본다. 이 집 안의 어른들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프랑코 정권하에서 옐로 빛에 둘러싸여 현실을 외면한 채 무기력하게 유리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아나 아버지의 일기 내용처럼 창밖을 주시하다 공포가 엄습하면 눈을 돌린다. 영화 속 어른들은 대부분 말이 없다. 집 안엔 안전한 색 옐로가 가득하지만 그 옐로의 안전함은 무기력하다. 세상을 외면하고 집 안과 세상을 분리하는 격리의 색으로 작용한다. 옐로 빛은 어른들의 입을 막으며 공간을 압박하고 위축시킨다.

반면 창밖 세상은 무채색에 가까운 저채도 블루 톤이다. 벌집인 창밖 세상은 아버지의 일기 중 다른 내용처럼 가차 없는 세상이고, 잠도 안 자고 쉴 틈도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벌들, 프랑코 정권하에서의 인민들이 사는 공간이다. 병들거나 죽은 시체조차 관대히 허용치 않는 차갑고 건조한, 생명이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참혹한 세상에 저항하다가 프랑켄슈타인이 된 스페인의 많은 사람들이 정령이 되어 곳곳에 깃들어 있다. 아나는 무채색에 가까운 블루 안에 숨어 있는 그 정령들을 찾아다닌다. 이 영화에서 블루는 기억해야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품고 있는 색이다. 옐로가 외면한 세상을 품고 있는, 세상으로 열려 있는 색이 블루다.

영화의 마지막, 늦은 밤까지 정령을 찾아 헤매던 아나는 숲속에서 독버섯을 먹고 프랑켄슈타인을 만난다. 다음날 밤새 아나를 찾아다닌 어른들에 의해 아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벌집 문양 창문 앞 밝은 옐로 빛을 받으며 아나의 어머니와 의사가 대화를 나눈다. 어머니는 아나가 밝은 빛(옐로 빛)을 싫어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우리를 못 알아보는 듯 쳐다본다고 말한다. 밝은 빛 옐로가 사라진 밤, 아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벌집 문양 창으로 향한다. 벌집 문양 창으로 저채도의 밝은 블루 빛이 가득 들어온다. 이 영화에서 가장 밝은 블루 빛이 아나의 방 안으로 처음으로 들어오는 대목이다. 아나는 닫혀 있던 벌집 문양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빛을 향해 쳐다본다. 정령과 친구가 되기 위해 언니가 알려준 방법으로 블루 빛을 향해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나는 아나야.” 블루 빛이 아나의 얼굴 가득 묻는다.

벌집의 정령
벌집의 정령

영화 안에 등장하는 프랑켄슈타인은 정령이다. 그 당시 프랑코 정권이 프랑켄슈타인으로 만들어 죽인 사람들은 괴물도 유령도 아닌 정령이라는 것을 빅토르 에리세는 어린 이사벨의 입을 통해 말한다. 그리고 세상과 유리된 채 살아가는 아나의 부모처럼 무기력한 사람들에게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행동하기를, 그들과 친구가 되어보기를, 아나의 행동을 통해 보여준다.

촬영감독 루이스 쿠아드라도는 잃어가는 시력을 대신해 감각 찾기에 나선다. 색의 고정된 의미들을 활용하지 않고 색의 감각들로 이 영화의 비전을 만든다. 황혼처럼 집 안을 채우며 안락함으로 연결되는 옐로 빛과 스산하고 황량한 분위기로 메마른 벌판을 비추는 블루 빛들을 흩어버리고, 뒤섞고, 비틀어놓는다. 밝음과 어둠도 색으로 표현하며 순간의 지각들을 구성하는, 오로지 색 그 자체만을 통해 영화에서 이야기의 서술로 설명되지 않는 비전을 보여준다. 아나와 함께 정령을 찾고 보이지 않는 색의 정령을 드러낸다.

정령은 우리 주변의 공간과 사물에 머물러 있지만 보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영화 역시 보이지 않는 존재를 찾아 드러내고 기억하는 작업이다. 영화가 할 일은 그들을 찾아 호명하는 것이다. 루이스 쿠아드라도는 실제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정령을 스크린 위에 드러낸다. 그리고 빅토르 에리세는 루이스 쿠아드라도의 보이지 않는 눈을 빌려 영화 자체가 정령임을, 정령 찾기가 영화의 미래의 비전임을 소녀 아나를 통해 보여준다.

31년 후의 색과 어둠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배경은 2012년이다. 2012년 1월19일 코닥이 파산했다. 124년 만에 파산한 코닥은 물리적 필름의 죽음을 선언한 것과 같았다. 필름의 종말이 선언되고 10년 후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극장과 영화의 소멸이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필름의 종말이 선언된 그해, 20년 전 영화를 찍다가 사라진 배우이자 친구 훌리오를 찾는 미겔의 이야기다. 동시에 어떠한 색과 어둠 속으로 영화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벌집의 정령>에서 아나의 집 밖에만 머물던 블루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는 집 안으로 들어온다. 이 영화에서 실내든 실외든 미겔이 있는 공간에 어둠을 밝히는 주요 광원은 형광등의 블루 빛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완의 영화 <작별의 눈빛>의 흔적이 있는 공간들은 블루가 자리 잡고 있다. 막스의 필름 보관소도 형광등의 블루 빛이 필름을 비추고 창고의 바닥 색도 블루다. 소품 창고도 형광등의 블루 빛이 공간을 비춘다. 소품 창고의 외관 벽과 문, 간판의 글자 색도 블루다. 미겔이 자신의 집 안에서 20년 전 훌리오와 함께한 대사 연습 녹음테이프를 듣는 장면도, 양로원 숙소에서 막스에게 <작별의 눈빛> 프린트를 가져와달라고 전화하는 장면도 창밖에서 블루 빛이 들어와 미겔을 감싼다. 이 영화 내내 미겔이 입은 의상들도 블루 톤이다. 반면 기억을 잃은 훌리오가 머무는 현재 공간은 옐로 톤이다. 훌리오가 사는 양로원은 옐로 톤 햇빛이 공간 전체를 비춘다. 훌리오가 머무는 공간 창으로도 옐로 빛이 들어오고, 양로원 안의 미겔이 머무는 숙소 창으로도 옐로 빛이 들어온다. 훌리오는 기억을 잃었지만 <작별의 눈빛>의 배우로서 그가 출연한 영화의 흔적은 훌리오의 공간에 파편적으로 남아 있다. 낡은 문과 창 덮개, 집 밖 벤치의 블루 색으로 남아 옐로와 함께 훌리오를 감싸며 공존하고 있다.

벌집의 정령
클로즈 유어 아이즈

<벌집의 정령>과 <클로즈 유어 아이즈> 모두 어둠을 적극 사용한다. <벌집의 정령>에서 아나의 아버지는 서재에 켜진 작은 램프의 빛이 닿는 범위 안에서만 움직인다. 어둠에 들어가지도 램프 주변 빛에 머물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서성인다. 아나의 어머니는 램프의 작은 불빛마저 꺼버리고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다. 낮에는 밝은 옐로 빛으로 세상과 단절했던 아나의 집 안, 빛이 없는 밤이 되자 어른들은 어둠 앞에서 행동하지 못하거나 눈을 감아버린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미겔은 밝은 등을 뒤로하고 어둠 속에 앉아 있지만 어둠 안에 가만히 숨어 있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행동한다. 어둠 속에서 20년 전 사라진 배우이자 친구를 찾는다. 어둠 속에서 영화를 찾는다. 미완의 영화를 찾아 어두운 필름 보관소로, 영화 소품 창고로 들어간다.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천장의 형광등 빛은 그 공간을 다 밝히지 못한다. 미겔은 빛의 밝기에 상관없이 어둠 안에서 단절된 시간의 단서를 찾는다. 소품 창고에 다시 왔을 때 그 공간을 작게 비추던 형광등마저 켜지지 않지만 어둠 앞에서 찾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31년 전 한밤중에 블루 빛을 받고 서서 정령을 찾던 소녀 아나가 31년 뒤에 미겔이 되어 블루 빛을 받으며 어둠 속에서 영화의 정령을 찾는 것이다.

31년 후의 비전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표면적으로 사라진 배우이자 친구를 찾고 있지만 영화가 사라지고 있다는 시대에 평생 영화인이었던 감독이 잊었던 영화를 되찾는 여정이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영화이다. 또한 영화의 근원, 영화가 무엇인지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기도 하다. 질 들뢰즈는 “예술 작품은 하나의 감각 존재이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스스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창조의 유일한 법칙은 작품이 혼자 스스로 버텨내야 하는 것이고, 홀로 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감각들의 덩어리인 영화를 본다는 일은 내 안의 지각과 감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감각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영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감각 덩어리로서 홀로 서 있는 존재다. 인간은 영화를 지각하고 감각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자체가 지각들의 덩어리고 감각들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찾아 만나는 순간, 내 안의 잠재된 지각과 감각이 깨어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잃어버린 시간이나 기억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또한 사라진 친구와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찾아가는 행위에 집중하는, 현재이자 미래에 관한 영화다. 찾는다는 것은 비전이다. 지금은 보이지 않기에 볼 수 있는 것을 만나러 가는 일이다. 영화감독 미겔은 <벌집의 정령>의 아나처럼 영화의 정령을 찾아 떠난다. 20년 전 촬영하다 중단된 미완의 작품을 갖고 사라진 배우를 찾아 떠난 미겔은 사라진 배우도, 잃어버린 친구도 아닌 영화의 정령을 만난다. 미겔은 자신이 쓰는 소설에서 “삶으로 예술을 완성할 줄 몰랐다”라는 문장을 쓴다. 사라진 친구와 영화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감독 자신이 잃어버린 ‘삶’을 되짚고, ‘삶’으로 미완의 영화를 완성한다. 삶 안에 깃든 정령을 만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중요한 상실을 찾는 행위를, 찾는 감각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닐까.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는 일은 어둠 속에서 감각을 찾는 행위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엔딩에서 폐관된 극장 객석에 앉아 있는 훌리오를 위해 미완의 <작별의 눈빛>이 상영된다. 스크린 안 영화 속 20년 전 훌리오와 기억을 잃어버린 채 극장에 관객으로 앉아 있는 현재의 훌리오의 얼굴이 번갈아 보인다. 영화 마지막 컷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훌리오의 클로즈업이 보이고 훌리오는 눈을 감는다. 스크린 가득 블랙 화면이 채워지고 필름 릴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때 보이는 검은 무지 화면은 영화의 끝을 알리는 이미지일 수도 있고, 훌리오가 떠올린 기억일 수도 있고, 훌리오가 눈을 감은 채 재생되는 영화일 수도 있다. 미겔의 여정을 따라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만나는 자신의 비전, 스크린과 객석 사이에서 찾은 자신의 영화이기도 하다. 찾는다는 것은 현재이면서 미래다. 찾는다는 것이 비전이라면, 본다는 것은 눈을 감았을 때 만나는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을수록 찾아가 눈을 감고 만나는 것이 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그것을 아는 듯 우리에게 말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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