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공습에 런던 주택가가 화마에 휩싸인다. 괴수 같은 불길에 비하면 소방대원들의 안간힘은 처절하지만 미약하다. 한 소방관이 소방 호스 분사구를 붙든 채 물이 나오길 기다린다. 호스가 연결되자 갑자기 솟구치는 물줄기. 불을 잡기 위한 강력한 물이 그만 소방관의 얼굴을 때린다. 소방관은 의식을 잃고, 허공에서 요동치는 호스는 또 다른 괴수가 된다. 통제 불능의 호스는 불확실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하나의 캐릭터처럼 보이도록 연출됐다. 대원들은 호스를 붙잡으려 갈팡질팡하는 한편 기절한 동료를 후송해야 한다. 1940년 독일 공군의 영국 대공습을 다룬 <런던 공습>의 프롤로그다. 그러니까 스티브 매퀸의 이번 신작은, 재난의 실체라기보다 재난에 대처하는 몸부림의 실체를 이야기하려는 영화다. 영미권의 흔한 2차 세계대전 소재작과의 확연한 차이 또한 여기에 있다. 국가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독일 군인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으며, 극 중 영국인들을 사랑하고 혐오하고 위로하고 이용하며 끝내 회복하게 해주는 이들은 다름 아닌 공동체 내부의 시민들이다.
1940년과 2024년
스티브 매퀸 감독은 현지 언론과의 여러 인터뷰에서 줄곧 “적과의 싸움이 아닌 우리 자신과의 싸움을 보여주려 했다”면서 “이것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 말했다. “1940년에 대한 영화일 뿐 아니라 2024년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우리가 그로부터 어디까지 왔으며 또 어디까지 가야 할지를 비추고자 했다”는 게 연출의 변이다(영국 영화제작사 ‘픽처하우스’ 유튜브 채널 10월30일자 인터뷰 참조). 명백히 그의 2023년 다큐멘터리 <점령 도시>(Occupied City)와 연속선상에 있다는 얘기다. 다큐는 나치에 점령당한 암스테르담의 1940년대에서부터 감염병과 극단주의 세력이 출몰하는 2020년대까지,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시간을 넘나든다. 시대가 충돌하고, 역사는 되풀이되는 듯 보인다. 재난은 어떻게 사람들을 변화시키는가. 우리는 지금 어떤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나. 당신은 지금 무엇과 싸우고 있나.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알고 있기는 한가. 그리고, 이 재난 속에서 회복력이란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 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이쯤 되면 질문이 이어진다. 유튜브에 물어보자. ‘키이우 아파트 공습 화재’, ‘베이루트 공습 이후’, ‘우크라이나 지하철 대피소’ 등의 검색어를 영어로 넣어보면 <런던 공습>의 주요 배경 이미지들과 겹치는 외신 영상이 줄줄이 이어진다. 80여년 전 배경의 전쟁영화와 2024년 뉴스 화면이 당혹스럽게 유사하다. 이런 와중에,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8월 영국에선 어린이 댄스교실 흉기 난동의 범인이 무슬림이었다는 가짜 뉴스가 퍼지면서 극우세력의 방화 등 반이민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11월 초 암스테르담에선 네덜란드와 이스라엘팀의 축구 경기 후 “유대인 사냥 가자”는 메시지를 퍼뜨린 극우세력이 상대 응원단을 집단 구타하고 폭죽 테러를 가했다. <런던 공습>에서 인도계 시민을 대피소에서 분리시키려는 백인에게 “이게 바로 나치가 하는 짓”이라 말하는 직설적 대사는, 지금 이 순간 세계 곳곳에서 가열 중인 이슈를 직선으로 가리킨다. 최근 미국, 독일 등지에선 아예 나치를 부활시키겠다는 조직원들이 대놓고 거리 시위를 벌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2024년 백주 대로에서 나치 깃발을 펄럭이며 유색인종 혐오 발언을 내뱉는 무리를 목도(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한 뒤 이 영화를 보면, 우려를 넘어 공포가 찾아온다.
실화의 한복판에서
표면적으로 <런던 공습>은 사건과 공간 배경을 다큐멘터리처럼 재현하고 있다. 영국 언론 보도를 종합해보면, 1940년부터 이듬해까지 독일은 영국 본토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다. 시민들은 방공호가 필요했지만 애초 영국 정부는 군수물자 이동 필요성 등을 이유로 지하철역을 대피소로 활용하지 않다가 뒤늦게 개방했다. 이재민들은 플랫폼뿐 아니라 선로 사이에 담요를 깐 채 밤을 보내야 하는 날이 많았다. 공습이 이어지자 당국은 여성과 아동을 중심으로 런던에서만 120만~140만명에 달하는 주민 소개령 계획을 시행했는데, 이중 절반 가까운 수가 어린이였다. 이들은 공습이 끝날 때까지 부모와 헤어져 교외에서 생활해야 했고 일부는 캐나다 등 해외로 보내졌다. 전시였던 만큼 군수공장에 일자리가 많아 도시 여성 노동자들의 상당수도 무기 제조 라인에서 닦고 조이고 기름을 쳤다. 공습에 대비한 계획적인 정전 탓에 일몰 후 거리는 암흑 천지였고 이 때문에 절도가 만연했으며, 폭격 당한 상점은 절도범들의 주요 목표였다.
척추 결함 탓에 키가 약 137cm에 불과했던 실존 인물 미키 데이비스는 지하 공동체를 조직하고 식량 및 의료 서비스 체계를 구축하며 ‘거인의 마음을 지닌 작은 남자’로 불렸다. 1940년 10월에는 런던 발햄역 위에 떨어진 포탄을 맞은 버스가 상수도관을 들이받으면서 물난리가 발생했고 지하 플랫폼에 대피 중이던 시민 71명이 익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1941년 3월 런던 웨스트엔드의 호화 댄스클럽 ‘카페 드 파리’에서는 영국 흑인음악의 전설 켄 존슨의 스윙밴드 공연 중 폭격이 가해져 최소 34명이 숨졌다. 희생자 중에는 존슨도 포함됐다. 9개월간의 대공습으로 인한 영국인 사망자는 4만3천여명에 이른다. <런던 공습>은 이같은 실화를 고스란히 영화에 가져옴으로써 관객을 역사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다. 프로덕션디자인은 당시 영상과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철저하게 고증됐으며 관객도 어렵지 않게 이들 자료를 구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발언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이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사운드
9살 아들 조지(엘리엇 헤퍼넌)를 기차에 태워 시골로 떠나보내는 싱글맘 리타(시얼샤 로넌)의 픽션 <런던 공습>이 실화와 실존 인물들 사이에서 확보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과감한 점프에도 훼손되지 않는 설득력이다. 주저 없는 플래시백은 <노예 12년>(2014)에서도 과시한 스티브 매퀸의 오랜 장기지만, 실화가 보장하는 개연성만큼이나 이번 작품에서 힘을 발하는 것은 사운드를 활용한 과거-현재 매치컷이다. 예를 들자면 조지가 회상하는 할아버지의 온화한 피아노 타건 소리에, 현재 몸을 싣고 있는 날카로운 열차 브레이크 소리의 음 높이를 맞춰 붙이면서 과거와 현재의 화면이 교접한다. 이것이 골목길 또래로부터 혐오 발언을 들은 기억 위에 현재의 열차에서 당한 인종차별이 얹히는 상황 속에 연출된 것이어서, 엄마와 분리된 어린 소년의 불안이 세상의 외풍과 함께 트라우마로 쌓이는 모양으로 제시돼, 주인공이 곧 결행할 열차 탈출의 이유를 설득하는 것이다. 영화가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솜씨 좋게 오가는 모양을 보고 있자면 앞서 감독이 언급한 연출의 변이 자연스레 수긍된다.
귀가 쫑긋해지는 편집은 사운드를 잇는 테크닉뿐 아니라 단절시키는 방식에서 한결 두드러진다. 리타가 [BBC]라디오 전파를 타는 무대에 올라 노래를 시작하는데 갑자기 툭, 소리가 끊긴다. 뒤따르는 장면에서 집에 있는 할아버지가 라디오를 켜면 그제야 노래가 이어진다. 사운드를 끊지 않고 현장 음색에서 라디오 음색으로 교체하는 일반적인 장면 전환 방식을 택하지 않은 뜻은, 재난에 처한 인물들은 언제든 관계가 단절되거나 느닷없이 사건의 분절을 겪는다는 이 영화의 발언과 맥을 같이한다. 열차에서 조지를 도와준 여자아이와의 우정, 친구가 될 것 같았던 3형제와의 동료애, 참된 어른을 만나 느낀 존경과 연대감 같은 것들은 숙성될 틈을 갖지 못한 채 끊기고 만다. 영화의 현장음은 종종 당황스러울 만큼 갑자기 중단되면서 재난을 맞은 인물에게 엄습하는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와 마주하면서 제멋대로 요동치는 소방 호스 노즐을 쫓는 소방관처럼 시시각각 갈등하며 때로 결단을 내려보지만, 예측 불가의 재난 상황은 인물의 현명함이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삶의 연속성을 부러뜨리곤 하는 것이다.
고차 재난 방정식
리타가 아들을 찾아 헤매고 조지가 엄마를 찾아 고초를 겪는 병렬 구성은, 조지가 토미 3형제와 충격적인 이별을 맞이할 때 엇갈리는 철로를 내려다보는 명장면이 예고하는 것처럼 여러 평행선들의 충돌과 병합을 보여주며 간단치 않은 재난 방정식을 시각화한다.
댄스클럽 ‘카페 드 파리’ 시퀀스는 유려한 공간 이동과 사운드 중첩을 통해 서로 다른 세계가 예기치 않게 부딪히는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이런 일이 우리 삶에도 적잖이 일어나고 있음을 설득해낸다. 최근 몇해 사이 재난 상황을 상수로 둔 탁월한 작품들이 잇따르는 가운데, <런던 공습>은 명료하게 침투 지점을 공략하는 듯 보인다. 리타와 조지가 이별하는 기차역 장면에선 멜로드라마의 장르 컨벤션이, 조지가 범죄 집단에 의해 못된 일에 가담하는 대목에선 전형적인 서스펜스 공식이 쓰이는 등 의아할 정도로 낯익은 방식이 곳곳에 채택된다. <런던 공습>의 장르적 장치들은, 영화가 재현하는 당시 상황이 특수하다기보다 전형적이라는 얘기를 하기 위한 듯 보인다. 전쟁이라는 재난은 이 영화에서 시민들이 살아가는 환경이자 기본값이며, 인물들이 이에 대응하는 대입값을 넣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 이 영화의 요체다. “살아남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노예 12년> 중)는 대사처럼, 인간으로서의 삶보다 생존 자체가 관건이 된 이 세계의 현황은 아프리카계 영국인 감독에게 Apple TV+ 가입자에게만 공개되기엔 아까운 작품 한편을 만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