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상이 멈췄다. 태어나서 처음 이 상황을 맞닥뜨린 이들부터 한국사의 계엄령을 모두 경험했다는 어르신까지, 45년 만의 계엄령 선포는 국민 모두에게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단 6시간 동안의 악몽으로 마무리됐지만 중요한 건 시간의 양이 아니다. 아니,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더이상 2024년 12월4일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정의나 민주주의 같은 거창한 담론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게 변하는 중이다. 크고 작은 행사를 비롯하여 당장 12월에 예정된 많은 일정들이 변경됐다. 사소하게는 지금 여기 쓰는 편집장의 말조차 원래는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준비 중이었지만 국가수반이 국회와 국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민낯이 드러난 마당에 다른 이야기를 할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2024년 겨울, 한국 사회는 여유와 신뢰를 강탈당했다. 거창한 담론, 시끄러운 정치, 남의 이야기로 치부했던 것들이 계엄과 탄핵 국면을 맞아 모두 공론의 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의도에 살건 부산에 살건, 그날 밤에 잠을 잤건 뉴스를 보며 밤을 새웠건, 사건으로부터의 거리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당사자다. 내가 서 있는 이곳, 이 순간이 역사의 일부라는 진실을 새삼 실감 중이다. 문득 유년기 기억을 빌려 역사를 조망했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가 떠오른다. 오늘의 우리를 만든 건 어떤 아픔들인가.
1972년과 79년을 기억하는 이에게 계엄령이란 공권력에 의해 초법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공포였다. 유시민 작가는 “갑자기 누가 집에 와서 자신을 잡아가고요, 한강다리가 막혀 거기 검문소가 설치되고요, 광화문 앞에 탱크가 와서 주둔하고 있는 거예요. 신문, 방송은 다 검열이 되고요, 전화도 다 도청되고, 몇 사람 이상이 모여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다 금지되고요”라고 회고한다. 2024년 12월로 처음 계엄을 겪은 이들에게 계엄은 뜬금없고 어설프고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다는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액면 그대로 믿어준다고 하더라고 그걸 실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최소한 무능이 증명됐다. 덕분에 계엄이 실패한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존재가 여전히 많은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을 두려워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해할 수 없는 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해프닝>에선 갑자기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왜 그런 현상이 생겼고, 왜 갑자기 해결됐는지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현상만 있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할 때 때로 사람들은 그걸 ‘해프닝’으로 치부한다. 어떤 이들은 12월3일의 국가 내란 상황을 '해프닝'으로 축소하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결국엔 지나갈 상황이란 가벼운 뉘앙스 이면에는 예측 불가능한 혼돈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다.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압력이나 물리적인 폭력과는 또 다른 공포, 미지에 대한 불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2월4일의 계엄을 굳이 해프닝이라고 지칭하고 싶다면 이건 다시 없을 무시무시한 해프닝이었다. 이 해프닝의 본질은 한 마디로 '그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는 데 있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순 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힘과 권력, 칼이 쥐어졌을 땐 이야기가 다르다. 국가 최고 권력자가 맥락도 의도도 효과도 짐작할 수 없는 뜬금없는 일을 (그야말로 즉흥적이고 어설프게) 벌였다가 실패했고, 계엄이 국민을 향한 호소였다는 변명과 함께 여전히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 황망하고 짧았던 밤은 끝났지만 이제 길고 지난한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뎌야 한다. 해프닝이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게, 바야흐로 어둠을 살라 먹을 불씨를 퍼트릴 바람이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