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민주주의 수호 에디션 드디어 구했다! 민첩한 하루 되세요~.”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에 불참한 105명의 국민의힘 의원들을 1면에 박제해버린 <한겨레>가 일종의 굿즈가 되어버린 2024년의 시위 풍경. 누군가는 이를 두고 “집회 특전(팬덤 사은품) 받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 과거 시위를 이끌어온 OB세대를 ‘경력직’이라 일컬으며 존중하거나 핫팩·초콜릿 등을 ‘무나’(무료나눔)하는 풍경은 팬덤 행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사례를 통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2017년 9월, KBS가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현직 연출자 대부분이 공석에 이르자 부장급 연출자들이 실무를 도맡아야만 했다. 이때 <뮤직뱅크>는 의도치 않게 고연차 ‘짬바’가 드러나는 완벽한 카메라앵글을 구현했고 아이돌 팬덤은 이를 ‘부장뱅크’라 부르며 역사처럼 회고한다. 경력과 연륜이 묻어나는 결과물을 팬들이 기꺼이 반기고 존중하는 것이다. 또 아이돌 콘서트, 음악방송 방청, 팬미팅, 애니메이션 박람회 등을 가면 팬들은 엽서, 포토카드, 스티커, 명함 등을 자비로 제작해 같은 팬들에게 열심히 무나한다. 수가 워낙 많아 무나존(zone)이 따로 마련될 정도다. 목적은 오직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다. 올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촉구 시위의 풍경은 팬덤 문화와 닮아 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에스파의 <위플래시>가 합창되는 이곳은, 결연하고 무거웠던 지금까지의 시위 분위기와 완전히 다르다. 이번 시위를 경험한 5060세대의 말마따나 시위의 주체가 교체되고 있다.
여성 팬덤의 집회 장악력은 어디서 출발했을까
광란의 K팝 파티, 재치 넘치는 깃발들. 탄핵소추안 가결 시위에 팬덤 문화를 불어넣은 주체자 2030세대 여성들도 변화를 인정한다. 한창 X(옛 트위터)에서는 이러한 문장이 대대적인 공감을 받았다. “오타쿠와 아이돌 팬이 가장 잘하는 게 뭔 줄 알아? 밤새 줄 서기. 기다리기. 외치기.” 다소 생경한 풍경을 두고 여러 분석이 나왔다. 누군가는 K팝으로 시위 이미지가 밝아져서 참여율이 높아졌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광장이 일종의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고 말한다. 또 일면에는 아이돌 문화에 익숙한 여성들이 정치를 아이돌 팬덤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온전히 광장 분위기가 경쾌해져서, 혹은 지지하는 정치인을 따르기 위해서 2030여성들이 촛불 대신 응원 봉을 들고 집회를 찾은 걸까.
이들에게 익숙하게 나타나는 응원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30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거쳐온 큼직한 문화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먼저 이 세대는 시위와 무척 친숙하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 집회, 2018년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2019년 버닝썬 규탄 시위, 2020년 N번방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 규탄시위 등 2030세대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사회 차별과 제도적 문제에 저항해왔다. 계층 상관 없이 범국민적인 시위가 이어진 2016년 박근혜 정부 퇴진 운동 이후에도 이들은 시위 공백 없이 계속해 사회참여적 태도를 보여줬다. 그렇게 10여년이 흘렀다. 이 시기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목격해온 1020세대는 시간이 흘러 오늘의 2030세대로 성장했다. 그러니 이들을 광장으로 이끌어낸 건 아이돌 콘서트장을 연상시키는 신나는 시위 분위기 때문도 아니고, “동세대 남녀 사이의 문화 커뮤니티의 양적 차이”(
그렇다면 이들이 정치사에 불굴하는 태도는 왜 하필 팬덤 형태로 드러나는 걸까. 2019년 모두를 충격에 빠트린 버닝썬 게이트는 특히 팬덤을 혼란케 했다. 최애 혹은 최애에 가까운 지인이 사회면에 오르는 경험은 이들에게 새로운 가치관과 판단 기준을 만들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빠순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무작정 지지하고 환호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만 그 진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들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옳고 그름에 기민하고, 그렇기에 아무리 최애라도 차별적 발언을 일삼으면 그들에게도 대항한다. 무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금쪽 같은 최애도 차별과 불합리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여가부 폐지’ 다섯 글자로 기울어진 표심을 공략한, 여성 유권자를 대놓고 외면한 정권을 여성들이 호의적으로 생각할 리 만무하다. 애초 팬덤 문화 자체가 저항의식과 밀접하게 결부돼 있기 때문에 이들이 자신의 무기로 응원 봉을 꺼내든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 회로였다. 12월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이 들리자마자 국회의사당 앞에 울려 퍼진 <다시 만난 세계>가 새로운 민중가요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정유라의 입학 비리 및 특혜 논란을 고발한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이 노래를 시위곡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갑작스러운 변화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K팝을 잘 모르는 시니어 세대를 융화시키지 못한다’, ‘진중한 정치 문제가 희석될 우려가 있다’ 등등 다양한 의견이 온라인 곳곳에서 퍼져나왔다. 하지만 온라인 여론 문제 또한 익숙하다는 듯 이들은 팬덤 경험을 토대로 해결책을 빠르게 찾아나갔다. 바로 민중가요 셋리(세트리스트. 콘서트 곡목을 모은 리스트를 의미한다.-편집자)를 만들어 곳곳에 공유하고 미리 연습해온 것이다. 이 또한 팬들에게 익숙한 공연 문화다. 2030여성들의 적극적인 시위 참여, 발 빠른 문제 인식 및 해결 등을 긍정적으로 본 것일까. 기존 집회를 이끌어온 기성세대는 올해 시위의 주역이 더 오래, 자주 올 수 있도록 이들의 가치관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신나는 노래는 뭐든지 좋아할 거라는 뭉툭한 생각에서 벗어나 버닝썬 게이트와 관련된 가수들의 노래는 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적극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끝나는 그 순간까지
광장 내의 변화는 단연 K팝 팬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자기만의 취향을 가진 모든 이들의 이야기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에(야구선수 요기 베라), “포기를 모르는” 채(<슬램덩크>), “나 혼자서라면 결코 볼 수 없는 경치”를 만들어내는(<하이큐!!>) 이들은 “지나가는 대로 길”이 된다(아이브 ). 좋아하는 것으로 싸워나가는 것. 좋아하는 일상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집회 현장에 새겨진 여성들의 새로운 시대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