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부터 1980년대 후반 민주화가 꽃피기까지 한국은 길고 긴 독재와 검열의 시대를 지났다. 이 어둠의 시간은 한국의 영화사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영화가 국가의 주도하에 여기저기 잘려나갔고, 수많은 영화인이 억압당했다. 그럼에도 한국영화는 그 명맥을 이어 현재에 당도했다. 작금 한국영화가 있기까지의 그 어려움을 되살피는 일은 지금의 우리가 마주한 위기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영화예술의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긍정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민의 힘으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타도한 1960년 4·19 혁명은 민주주의의 승리와 함께 한국영화의 풍요를 불렀다. 혁명 이후 5월부터 정부는 국가기관 주도의 영화 검열을 철폐·완화했고 6월엔 헌법 개정을 통해 언론, 출판을 비롯한 영화에 대한 검열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8월부터 민간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출범해 영화 심의를 시작했고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완전한 자율성을 보장받기 위해 노력했다. 잠깐의 자유 속에서 한국영화사의 걸작들이 동시에 쏟아져나왔다. 올해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표한 한국영화 100선에서 1위, 4위를 차지한 <하녀>(감독 김기영, 1960), <오발탄>(유현목, 1961)을 비롯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마부>(강대진,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등이 만들어졌다. <마부>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받으며 국제사회에 한국영화를 알렸고 김기영, 김수용, 유현목, 이만희, 신상옥 등 한국영화사를 이끌어갈 거장들이 창작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5·16 군사정변과 유신정권의 칼날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군부 정권이 대한민국을 점령하면서 혹독한 검열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자유부인>(한형모, 1956) 등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던 1950년대의 한국 영화산업은 스튜디오 시스템을 유지하며 60년대에도 융성한 듯 보였지만, 그 내부엔 검열의 칼날이 움트고 있었다. 핵심적인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가 1961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검열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오발탄>이 1961년에 개봉했다가 중앙정보부의 개입으로 상영을 금지당했고, 중앙정보부는 영화와 영화 시나리오를 전반적으로 검열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영화인이 실제로 처벌받는 일도 빈번해졌다.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1965)를 통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유현목 감독은 <춘몽>(1965)으로 음화제조반포죄 유죄판결을 받았다.
검열은 1972년 유신체제 전후로 더욱더 공고해졌다. 1968년 말부터 중앙정보부는 모든 개봉작의 검열 주체로 참여하면서 더욱 엄격한 검열을 자행했다. 1973년 2월엔 유신정권이 영화법을 개정하며 영화예술을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낮춰버렸다. 영화 제작사를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전환하고 외화 수입 쿼터제를 시행하며 한국영화의 구조적인 저질화를 이끌었다. 영화 제작자들은 높은 수익을 취할 수 있는 외화 판권을 따내기 위해 정부 입맛에 맞춘 반공영화, 저예산 액션영화 등을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 영화산업이 침체되면서 1971년 전후로 연간 200편을 웃돌던 제작 편수가 1975년에는 94편을 기록하기도 했다. 1975년 5월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 발령으로 영화 검열이 강화되자 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영화 시나리오 사전심의 수정·반려 비율이 1974년 41%에서 1975년 80%까지 높아졌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도 1970년대 중반 한국영화엔 가능성이 피어났다.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이 46만 관객을 모으며 극장가의 부흥을 이끌었고,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이 당대 청년문화를 스크린에 투영하며 활기를 내뿜었다.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로 인해 대본에 있던 대학생들의 시위 장면을 삭제하고 운동 경기 장면 등으로 대체하는 등 많은 제약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작품에 드러난 당시의 냉혹한 현실과 청년들의 비극은 암울한 시대상을 스크린에 반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민주화 전후, 여전한 검열?
1979년 10월26일 전두환 정권의 쿠데타로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신군부가 들어섰다. 4·19 혁명과 5·16쿠데타를 틈타 많은 걸작이 나타났듯이 한국의 근대사를 직접적으로 건드린 임권택 감독의 <짝코>(1980),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과 국가 주도 산업 개발을 비꼰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등이 이때 반짝이며 등장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기존 유신체제의 검열 기조를 계승하는 데 더해 반공안보영화의 제작을 추진하는 등 영화산업을 주물렀고 민주화 이전까지 검열의 시대는 이어졌다. 1979년 4월부터 영화 검열권을 이관받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체제가 80년대에도 유지됐다. 공연윤리위원회의 영화 사전심의 제도는 1996년 10월4일에서야 위헌 판결을 받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80년대 신군부의 영화 검열 체제에 가장 혁신적인 반기를 든 영화는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1984)이었다. <바보선언>은 원래 <어둠의 자식들>의 속편으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정부로부터 ‘전면 개작’ 판결을 받았다. 외화 수입 쿼터 때문에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이장호 감독은 제대로 된 각본도 없는 상태에서 6개월 만에 <바보선언>을 완성했다. 결과적으로 <바보선언>은 이미지와 사운드 측면에서 파격적인 실험영화 형태를 띠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이끌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대한민국이 민주화의 급물살을 타면서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1988),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1991) 등이 코리안 뉴웨이브를 주도했고 장산곶매의 <파업전야>(1990)가 독립영화의 지평을 열며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2014년 9월 박근혜 정부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다이빙벨> 상영 중단을 종용하며 영화제의 자율성을 앗으려 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수많은 영화인을 억압했다. 그리고 2024년 12월3일 윤석열 정부는 비상계엄선포 포고령 1호에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명시했다. 이는 명확하게 유신, 신군부 정권이 자행했던 검열의 역사를 반복하겠단 의미였다. 70년대에 등장한 <바보들의 행진>, 80년대에 태어난 <바보선언>에 이어 다시금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자 했던 잘못된 권력욕의 발로였다. 검열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면 오산이다. 언제나 눈을 똑바로 뜨고 영화를,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추천작 <바보사냥>(1984)
감독 김기영 /플랫폼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한국고전영화>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바보선언>(이장호, 1984)과 함께 근현대 ‘한국영화의 바보 3부작’이라 불러도 흥미로울 작품이다. 영화의 골자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강식(배규빈)과 홍익(김병학)의 로드무비다. 겉보기에 다소 온전치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이 서울과 전국 각지를 떠돌며 당대의 여러 사회상을 거쳐간다.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천연의 무인도를 찾아 떠나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마주한 당시의 대한민국은 물욕, 부조리, 난개발, 사기, 비인간적 사고로 가득하다. 이상한 이들보다 훨씬 이상한 사회가 선한 사람들마저 황폐화하기 마련이라는 시대의 비극이 영화 속에 깃들어 있다. 서두의 두 작품과 <바보사냥>을 나란히 감상하면 검열, 독재 시대의 한국과 한국영화가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만큼 탄압받았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검열의 시대]영화사 100년 중 단 한번의 경험’(조준형, 2024.9.10.)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검열의 시대]중앙정보부가 영화 검열을 했다고?’(조준형, 2024.5.10.)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과거와 결별한 새로운 한국영화의 출현’(정종화, 2018.8.14.)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한국영화사100년]암흑에서 피어난 한국의 ‘뉴 시네마’(정종화, 2018.4.30.)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100선]선정 작품을 통해 본 한국영화의 흐름’(조준형, 2014.3.27.)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사전검열이 만들어낸 명작 <바보선언>’(김동원, 200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