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68혁명과 프랑스, 독일의 영화들 -<만사형통>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등
2024-12-26
글 : 정재현
<만사형통>

1960년대 우상향하던 유럽의 경제성장은 산업 주류를 이루던 제조업이 쇠퇴하며 침체를 겪는다. 정부는 날로 극심해지는 지역간 불균형과 청년실업 문제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유럽의 청춘들은 염세주의와 모순이 팽배한 전후 국가에서 새로운 것을 열렬히 희망했다. 무엇보다 유럽 대륙 밖에선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알제리나 쿠바의 내전 소식이 연일 매스컴을 통해 보도됐다. 그리고 미국은 베트남전을 벌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태어난 전후세대는 기성세대가 자신들이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과거의 역사를 없던 일로 치부하며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한 채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1968년의 봄

1967년 파리 낭테르대학교의 학생들은 권위주의에 매몰돼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학교에 분노하며 등교를 거부했다. 이 움직임은 프랑스전국학생연합의 수업 거부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파리, 베를린, 로마에서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반전시위가 연이어 일어났고 1968년 3월, 낭테르대학교의 학생인 자비에 랑글라드가 경찰에 체포됐다. 정부는 군사경찰을 내세워 학생들을 진압했다. 급기야 운동본부인 낭테르대학교가 폐쇄되자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의 무차별적 진압에 맞서며 정부에 항거했다. 이때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던 파리 노동자들이 학생들과의 연대를 결정했다. 1968년 5월 파리의 학생운동은 노동운동으로 확산됐다. 5월 말 프랑스 정부와 노조는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뛰어든 운동 조직은 끝내 정부에 의해 강제해산됐다.

독일에선 1966년부터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에 의한 반전시위가 꾸준히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베를린대학교의 베노 오네조르크가 경찰이 한 발포에 사망했다. 심지어 정부가 법 제정을 위해 우익 야당을 끌어들이자 대학생과 지식층은 분노하며 1968년 국제베트남회의에 참여하거나 프랑크푸르트대학교를 점거하는 등 시위를 이어갔다. 한데 이들의 항거는 파리와 달리 노동자들의 지지를 이끌지 못했다. 게다가 독일 정부가 긴급조치법을 발효하며 시위는 종말을 맞이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기에 일어난 68혁명은 끝내 정권 정복에는 실패했다는 점에서 변혁의 동의어인 혁명 대신 운동이라 불린다. 하지만 구체제에 응전한 이들의 외침은 끝내 진보정당의 수립, 나치 역사의 청산, 교육법 전면 개정 그리고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혁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68혁명은 프랑스와 독일 영화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68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인 1968년 2월. 프랑스 문화부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관장인 앙리 랑글루아를 해임했다. 장뤼크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로베르 브레송 등 프랑스 영화인은 정부의 결정에 반발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4월 중순 랑글루아는 복직됐다. 이 사건은 영화인들과 학생들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운동을 통해 목표를 명확히 이뤄낸 영화인의 물결을 본 학생들은 그해 5월 정부의 문화정책 개정에 목소리를 높였다. 영화인들은 시대의 흐름과 사상을 같이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68혁명 도중 열린 칸영화제의 중단을 요구했다. 이들은 개막작 상영장 커튼에 몸을 매달아 상영을 저지했고 결국 1968년 칸영화제는 취소됐다. 사건 일주일 후 1천여명의 프랑스 영화인들은 프랑스영화삼부회(Etats Généraux du Cinéma Français, 이하 EGC)를 조직했다. EGC는 영화예술을 억압해온 제도의 혁파에 주력했고 매일 벌어지는 68혁명의 여러 단면을 촬영해 각지의 학생들에게 운동 상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혁명 의식을 고취했다. EGC는 일정 회차의 상영이 보장되는 공공 배급 제도의 확립, 아동보호를 제외한 모든 검열의 폐지 등을 주장했다. 이들의 메시지는 1974년 정치 검열의 완전 폐지를 통해 비로소 실현됐다. 1981년, 좌익정당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68혁명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자크 랑이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랑은 68혁명 당시 학생들이 부르짖던 문화의 민중화를 그대로 실현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영화고등연구소를 복원했고 대중에게 개방되는 영화 축제를 확립했다.

1968년 장뤼크 고다르는 지가 베르토프 집단을 결성해 부르주아 영화의 혁파를 주장했다. 이들은 할리우드영화의 내러티브는 미국 제국주의의 반영이라 비판하며 정치영화만이 추구할 수 있는 미학을 실현하는 데 집중했다. 고다르와 장 피에르 고랭이 공동 연출한 <만사형통>은 미국 기자(제인 폰다)와 프랑스의 광고감독(이브 몽탕)이 노동자 파업으로 인한 감금을 계기로 서로의 의식이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만사형통>은 내러티브와 무관하게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시위가 콜라주하는 등 지가 베르토프 집단이 추구한 ‘만인을 위한 유물론적 픽션 영화’의 실현이라 평가받았다. 마르셀 오퓔스는 사회에서 터부시되던 프랑스의 나치 협력 문제를 다큐멘터리 <슬픔과 연민>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며 프랑스영화계에 역사 되돌아보기 사조를 확립했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그리스의 정치현실을 고발하는 <Z>를 통해 칸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2관왕을 수상했고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생사의 고백>, 브라질 독재정권과 이에 부역한 미국 정부를 고발하는 <계엄령>을 연이어 제작해 정치영화의 확산을 이어갔다.

한편 독일의 영화인들은 68혁명 시기의 충격을 자신들의 영화에 반영하는 데 열을 올렸다. 1969년부터 1976년, 독일 정부의 문화적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뉴 저먼 시네마가 태동했다. 정부는 본격적으로 영화에 지원금을 투자했고 감독들은 서로를 지원하는 공동제작, 자주 배급의 방식을 선택하며 작가영화사를 공동 출자하는 데 이르렀다. 이 기수의 대표 주자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카젤마허>의 오프닝에 68혁명의 메시지를 삽입하며 자신의 작품이 68혁명의 영향 아래 있음을 공표했고 <사계절의 상인>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 등 연극적 양식화와 리얼리즘을 결합한 독자적 영화미학을 추구했다. 한편 68혁명을 통해 독일의 페미니즘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에 힘입어 수많은 여성들이 영화계에 진출했고 1978년엔 베를린국제영화제 출품작의 3분의 1이 모두 여성감독의 연출작인, 지금 봐도 놀라운 수치가 탄생했다. 1세대 페미니스트 감독인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는 68혁명 이후 대두된 테러리즘 문제를 <크리스타 클라게스의 두 번째 각성> <답답한 시대> 등의 작품을 통해 직접적으로 다루었고, 해나 아렌트,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현대 지성사의 중요한 여성들을 영화 안으로 적극적으로 편입했다. 헬케 잔더 감독은 1974년 최초의 여성 영화전문지인 <여성과 영화>를 발행했고, <모든 면에서 축소된 인격ꠓ리듀퍼스> 등의 작품을 통해 비평적인 주목을 받았다.

추천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감독 · 각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OTT 플랫폼 콜렉티오

청소부로 일하는 장년 여성 에미(브리지트 미라)는 한 펍에서 외국인 노동자 알리(엘 헤디 벤 살렘)과 함께 춤을 춘다. 대화를 이어가던 두 고독한 영혼은 서로에게 공명하고 하룻밤을 같이 보낸 후 연인이 된다. 하지만 독일엔 게르만족이 아닌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여전히 만연하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대표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사회가 금지한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영화다. 1968년은 독일에 브레히트의 비평선이 출간된 해이기도 하다. 당연히 브레히트의 이론은 뉴 저먼 시네마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브레히트식 소격효과가 에미와 알리의 주변인의 시선으로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를 주시하면서 감상해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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