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 <씨네21>은 국내 언론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레드씨국제영화제를 방문했다. 이제 막 꿈틀거리기 시작한 시장의 태동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상업적인 영화 상영을 금지한 35년의 세월을 지나 2018년에야 비로소 극장 문을 다시 열었다. 엔터테인먼트 개발로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겠다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비전 2030’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영화산업”이라는, 한국에선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문구를 현실화하는 중이다. 그 역동의 한가운데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 문화부 장관이 설립한 비영리단체 레드씨영화재단이 있다. 재단은 자국 영화 제작·배급·교육에 앞장설 뿐 아니라 제다에서 중동 지역 최대 규모로 영화제를 주최해 세계 영화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씨네21>도 2년 연속 제다를 찾았다. 한국의 부산에 비견되는 이 도시는 12월이라는 날짜가 무색하도록 햇볕이 강하다가도 저녁마다 해안가의 순풍을 선사한다. 제4회 레드씨국제영화제도 모르는 새 찾아든 바람처럼 갖은 변화와 함께 돌아왔다. 그 풍경을 여기에 스케치한다. 낯선 만큼 신선한 영화의 바다로 당신을 초대한다.
머리 위마다 몸집 큰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내게 제3회 레드씨국제영화제(이하 레드씨영화제)는 당장이라도 <오페라의 유령>처럼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만 같은 거대 조명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아랍어로 마켓을 뜻하는 ‘수크’(souk)를 비롯해 영화제 주요 행사와 프리미어가 전부 초호화 호텔인 리츠칼튼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게스트들도 그 주변의 고급 숙박시설로 숙소를 배정받아 홍해 전망을 만끽했다. 그 일대에서 일반 상영이 진행된 레드씨 몰의 VOX시네마까지는 차로 20분이 걸려 번거로운 면도 있었지만, 리츠칼튼에서 몰까지 셔틀 서비스가 제공돼 불편을 덜었다. 덕분에 외신기자들 사이에서는 ‘이 신생 영화제가 열흘을 위해 얼마를 썼을까’를 점쳐보는 한담이 잦았다. 지출 규모는 누구도 정확히 추산할 수 없었겠지만 다들 레드씨영화제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짧은 영화사를 상쇄하는 스케일을 확보해 단 시간에 세계 영화인의 시선을 사로잡고 싶어 한다는 점은 확언할 수 있었다.
2024년의 레드씨영화제는 그 의지를 또 다른 방식으로 드러냈다. 이번에는 올려다본 자리마다 라와신(rawashin)이었다. 라와신은 목각 패널을 덧대 만든 돌출형 발코니로, 쨍한 햇살 아래 자연 냉방을 꾀한 사우디아라비아의 고대 건축양식이다. 영화제가 제다의 화려한 휴양지를 떠나 구도심 알 발라드(Al Balad)로 터전을 옮기면서, 규칙적인 듯 변칙마저도 허용하는 옛 디자인이 눈에 익은 셈이다. 영화제의 모든 스크리닝이 펼쳐진 신축 영화관 ‘컬처 스퀘어’ 또한 알 발라드 스타일의 공간으로 꾸려졌다.
문화유산에 둘러싸인 영화제
여기엔 장소를 이전하며 생긴 이동상의 이점 이상의 효과가 있다. 알 발라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적지다. 7세기 무렵부터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 마을은 미로 같은 골목과 정교히 깎인 산호석 벽간을 자랑한다. 사우디 정부는 못해도 150년에서 400년이 넘은 건물들의 보존과 증축을 시도하며 이곳을 간판 관광지로 키우려고 한다. 레드씨영화제가 탐낸 것이 바로 그 상징성 아닐까. 개막식의 메인 스크린은 알 발라드의 담벼락을 구현했고, 개회사를 위해 무대에 오른 레드씨영화재단 회장 주마나 알 라셰드는 “올해 슬로건인 ‘영화의 새로운 집’(The New Home of Film)이 곧 알 발라드”라고 설명했다.
주마나 알 라셰드 회장은 사우디의 헤리티지를 계승한 새 거점을 소개한 데 이어 사우디영화의 경사를 공표했다. 사우디영화 최초로 칸의 부름을 받은 <노라> 이야기였다. 지난해 레드씨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이자 사우디영화 부문 관객상 수상작이었던 <노라>는 2023년 레드씨영화제에서 최초 공개 후 2024년 제7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상영작에 이름을 올렸다. 시상식에서 ‘특별 언급’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예술 활동이 금기였던 90년대 사우디를 배경 삼은 이 작품은 미술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된 두 여성의 교감을 그려냈다. 사우디 아트하우스의 존재는 물론 사우디만의 여성 서사를 부각한 타우픽 알자이디 감독은 사우디의 첫 번째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알룰라에서 두 번째 장편을 찍을 계획이라고 한다.
이는 사우디를 기반으로 하는 감독이 내릴 수 있는 마땅하고도 충실한 결정으로 비친다. 알룰라를 로케이션으로 택하면 무시 못할 혜택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사우디 왕립위원회 산하 에이전시인 ‘필름 알룰라’는 알룰라에서의 영화 및 방송 촬영을 장려·지원하는데, 사우디 영화위원회에서 실시하는 40% 현금 리베이트 프로그램인 ‘필름 사우디’ 정책을 수행하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필름 알룰라는 수크 한편에 넓은 부스를 마련해 방문객들이 VR로 알룰라를 체험할 수 있게 홍보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수크는 74개 참가사가 설치한 부스들로 북적였다. 방문객들은 전통 복장을 한 남성들이 수크 초입에서 나눠준 대추야자를 든 채 회랑을 활보했다. 이 또한 레드씨영화제 마켓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MENA 영화의 다양성을 찬미하며
제4회 레드씨영화제는 제2의 <노라>를 꿈꾸는 여섯편의 사우디영화를 포함해 85개국 122편의 영화를 선보였다. 영화제 기간 내내 레드씨영화제가 “한국의 부산국제영화제를 뛰어넘는 아시아 최대 영화제를 목표로 한다”라거나 “이미 중동·북아프리카(MENA) 지역 최대 영화제가 됐다고 볼 수 있다”라는 진단들이 들려왔는데, 프로그래머들은 우선 “올해의 키포인트는 아프리카영화”라고 입을 모았다. 프랑스 등 유럽 프로덕션과의 협업이 활발한 튀니지, ‘아랍의 할리우드’로 통해온 이집트가 그 중심에 있다. 경쟁부문 초청작 <레드 패스> <아이샤>(튀니지), <시킹 헤븐 포 미스터 람보> <스노우 화이트>(이집트) 등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들을 아우르는 키워드는 역시나 ‘다양성’이다. 특히 레드씨영화제가 경쟁부문에 불러들인 영화는 여성, 장애인 주인공들을 전면에 드러낸 것은 물론 지역사회의 문제적 이슈들까지 끌어안았다. IS 테러 여파(<레드 패스>), 팔레스타인 난민의 향방(<투 어 랜드 언노운>), 방글라데시 반정부 시위(<사바의 좁은 세상>), 이란의 도덕 경찰(<6AM>), 아프가니스탄 정세(<시마스 송>)와 같은 테마들이 선보여졌다.
<스노우 화이트>의 타그리드 아부엘하산 감독, <시마스 송>의 로야 사다트 감독처럼 경쟁작 16편 중 7편이 여성감독의 작품이라는 점도 상기할 만하다. 사우디가 이슬람 색채가 강한 국가인 만큼 여성 인권이 열악하다는 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듯, 레드씨영화제는 매해 축제 초반 ‘우먼 인 시네마’(Women In Cinema) 네트워킹 파티를 주최해왔다. 2024년에도 영화제에 초청받은 여성 감독, 제작자, 배우들은 물론 글로벌한 활동 반경을 보유한 배우 양자경, 신시아 이리보, 에바 롱고리아, 정호연 등이 얼굴을 비쳤다. 헤리티지를 이식하는 동시에 다양성을 찬미하며 세를 불리고 있는 레드씨영화제의 면면은 다음 장에서 마저 확인하길 바란다.
칸의 남자, 레드씨영화제에 조언하다
수크 포럼 중 가장 많은 청중이 들른 프로그램은 단연 티에리 프리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시네필로마니아’ 행사였다. 그는 자신이 영화에 반한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취향의 발자취를 돌이킨 데 이어 신생 영화제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발터 베냐민을 인용하며 “영화 자체가 아닌 영화를 상영하고 보러가는 행위가 특별한 것”이라 강조한 그는 사우디의 새 영화 문화를 응원했고, 자신만의 프로그래밍 비결도 전했다. “나만의 즉각적인 인상에 집중하되 거기에 함몰되지 않으려 한다. 프로그램팀 직원들끼리도 의견을 공유하다보면 자기만의 의견이 흐트러질 수 있으니 개인적인 감상을 잘 간직하라고 당부한다. 나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전화를 걸어 각자의 생각을 묻는 식으로 어떤 영화를 선택할지 조율한다.”
KAFA in 사우디아라비아
영화진흥위원회 산하 한국영화아카데미(이하 KAFA)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신진 창작자들을 만났다. 11월 한달간 ‘2024 KAFA 부트캠프 인 사우디아라비아’가 펼쳐진 데 이어 12월7일에는 제다에서 엄태화 감독의 마스터클래스가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사우디의 영화학교 학생 또는 예비 영화인으로, 워크숍을 통해 6편의 단편영화를 완성했다.
조근식 KAFA 원장은 “부트캠프가 참가자들에게 단순히 영화제작 기술을 배우는 것을 넘어, 영화라는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앞으로도 KAFA는 글로벌 영화교육의 교류를 확대하며, 영화라는 공통의 언어로 함께 성장해나가겠다”고 공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