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화제 시상식에서 유명 남자배우가 자신의 아이를 책임지겠다는 당연한 말을 하고 박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그 당연한 말을 토크쇼나 유튜브 채널이 아닌 영화인들의 축제 자리에서 비장하게 내뱉기까지 자신의 아이임에도 책임지지 않았던 무대 뒤 수많은 남성들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어차피 결혼으로 묶인 남녀 중 자녀양육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방해가 되는 쪽이 남편이라면 남편이 아니면서 자녀에게 책임을 지는 아버지가 차라리 낫다는 논리도 같은 현실을 전제로 한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는 걸까. 직접 출산과 양육을 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에 대해 이미 책임을 지고 있는 여성들보다 책임을 지겠다는 선언만 했을 뿐인 남성이 ‘비혼출산’의 선구자가 되고 있는 현실에 나는 오늘도 어리둥절하다.
이 어리둥절함이 낯설지 않아 기억을 더듬다가 <그 남자에겐 1,000명의 자식이 있다>는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고 말았다. 다큐멘터리에는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어 하는 많은 여성 동성 커플이 등장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남편도, 아버지도 아닌, 정자! 그러나 그들은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골라 병원에서 시험관시술을 받는 대신 기증자 남성에게 채취한 정자를 직접 받아서 스스로 인공수정을 시도하는 방법을 택한다. 자녀의 유전자 지분 절반을 갖는 남성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결정하고 싶다는 그들의 말도 설득력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험관시술에 필수적인 난자 채취가 여성의 몸에 주는 부담과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가 되는 선택이었다. 잠시나마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잊고 비혼출산하는 여성들이 많아진다면 남성에게는 정자 기증자의 역할만 허락되는 것일까 상상하기도 했다.
조너선 제이콥 마이어. 그는 자신의 정자를 수없이 많은 여성에게 기증함으로써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천명의 자식이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네덜란드 남성이다. 인당 정자 기증 한도 권고가 있으나 국가를 옮겨 다니며 혹은 사적으로 정자를 필요로 하는 여성들을 만남으로써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에게 정자를 기증받은 여성들은 이 사실을 나중에야 발견하고 그에게 항의하지만 그는 정자 기증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법정에 선 그는 놀라울 정도로 당당했다. 자신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가족을 탄생시켰으며 아이들의 생일파티나 졸업식에 참석하는 등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겠다나. 다행히 판사는 아버지가 동일한 아이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 근친상간의 우려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여 그의 정자 기증을 중단시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위험이 없다면 무엇을 근거로 무분별한 정자 기증을 막을 수 있었을까? 내가 유독 한 성별의 생식세포 활용에 민감한 이유는 다분히 생물학적이다. 1천명의 자식을 둔 남성은 이미 실존하지만 1천명의 자식을 둔 여성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정자와 난자에 대한 상식적인 수준의 생물학만 알아도 답이 나온다. 어떤 새로운 가족을 상상하든, 아이에 대한 어떤 책임을 논하든 생물학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마침 반가운 제목의 책이 보여 주문했다. <책임감 있게 사정하라>, 이 어리둥절한 시국에 많은 분들과 함께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