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의 사상가 루이스 멈퍼드는 현대의 권력 체제를 ‘기계’라고 했다.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피라미드를 세운 고대 이집트와 대규모 인신 희생을 행했던 은나라 같은 고대 제국들은 사람들을 마치 시계의 부품처럼 지배자의 뜻대로 줄 세우고 일거수일투족을 명령하는 기계였다고 한다. 그리고 과거에 사라졌던 이 ‘거대 기계’가 현대에 와서 근대국가의 형태로 되살아났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민주주의가 이 기계에 맞서려면 선거와 투표만으론 부족하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기계 부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법률과 규범을 깊이 숙지하고 자신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말은 쉽지만, 이는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서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다. 기계의 부활을 꿈꾸는 독재자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비웃는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열흘 남짓한 동안 우리를 기계 부품으로 여기려 했던 오만한 전제군주를 탄핵하는 데 성공했다.
첫째, 부당하고 불법적인 명령에 소극적으로 저항했던 군인들에게 감사한다. 군대야말로 기계이다. 군인들은 그 부품으로서 움직여야 하며, 이를 거부한 이들에게는 항명죄라는 무서운 형벌이 씌워진다. 하지만 많은 군인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하다 폭행을 당하기도 했고, 명령을 무시하고 편의점 라면이나 먹으면서 또는 그저 시늉만 하면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항명죄와는 반대 방향에서 탈을 뒤집어쓸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라고 해도 괜찮다. 그런 계산을 할 줄 안다는 것 자체가 분명히 기계 부품은 아니었다는 증거이다.
둘째, 이른바 당론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탄핵에 가담한 여당의 열몇명 국회의원들에게 감사한다. 한번 잡은 권력을 죽어도 못 놓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여당 집단이야말로 기계였다. 첫 번째 탄핵 시도 당시 우르르 퇴장하던 꼴을 생각해보라. 탄핵이 이루어진 뒤에 이탈표를 색출하겠다고 으르렁거렸던 모습을 생각해보라. 그 당론을 무시하고 탄핵에 가담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심을 거슬렀다가 다음 선거에서 당선을 보장할 수 없다는 계산 속에서 그런 것이라고 해도 괜찮다. 그런 계산을 할 줄 안다는 것도 분명히 “민의를 대변해야 할” 국회의원의 본분을 어떤 형태로든 자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셋째, 여의도에 모여들었던 무수한 우리에게 감사한다. 특히 윤석열의 칼춤이 벌어지던 춥고 공포스러웠던 밤에 국회의사당을 지켜주었던 분들에게 감사한다. 어느 외국 친구가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우리 같았으면 가만히 숨죽이고 엎드려서 기껏 SNS에 불평이나 늘어놓았을 시간에 한국인들은 신속하게 행동하여 초거대 시위를 자발적으로 조직하였다”고. 칼바람을 맞으며 한강 다리를 건넌 수십만, 수백만명의 시민들은 질서 있고 흥겨운 잔치를 열었고, 그 자리에 오지 못한 수많은 이들은 ‘주먹밥’을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우리가 버티고 있기에 군인들도 국회의원들도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우리가 기계를 이겼다. 민주주의가 기계를 이겼다. 험난한 고비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따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면 모두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계를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