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obituary] 시나리오의 대가가 된 반골 소년, 송길한 작가(1940~2024)
2024-12-27
글 :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사진 : 박종덕 (객원기자)

지난 12월22일 작가 송길한이 영면에 들었다. 청년기의 긴 방황을 딛고 30대에 들어서야 시나리오작가의 길에 들어선 그는 작가의식과 현실 영화계 사이에서 고심하며 1970년대를 버틴 후, <짝코>(1980)를 시작으로 임권택 감독과 협업하며 1980년대 한국영화가 품위를 유지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그가 각본을 쓴 <길소뜸> <씨받이>를 위시하여 80년대 중반의 한국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적 원경험

일제 말기인 1940년에 태어난 송길한은 대학에 진학해 서울에 갈 때까지 전주에서 자라고 학교를 다녔다. 학창 시절 그는 미래의 직업이 될 영화와 조우하는 몇번의 기회가 있었다. 해방 이후 일본인이 버리고 간 소형 영사기에 사무라이영화 필름을 돌려보다 동네 아이들에게 빵이나 만두를 상영료 대신 받고 흥행했다는 일화가 그중 하나다. 포스터까지 만들어 붙인 그는 그때 겨우 초등학생이었다. 한국전쟁 휴전 후 이강천 감독을 중심으로 전주에서 <아리랑>(1954)과 <피아골>(1955)이 제작되던 당시, 송길한은 허장강, 김진규 같은 배우들이 모인 다방을 드나들며 인사를 건네는 조숙한 중학생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각색된 <아리랑>의 군중 신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 전주에는 군산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필름을 상영하는 양철 지붕을 얹은 간이 극장이 있었다. 그가 “제대로 된 영화”에 처음 빠져들게 된 것이 바로 ‘깡통극장’에서였다. 한편 전후 전주에서 평생의 정신적 상처로 남은 사건을 겪기도 했다. 사랑을 고백했던 친구의 누나가 미군 위안부로 일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딸이 희생해야 했던 불우한 시절, 한국전쟁이 그에게 준 가장 큰 고통이었다.

방황 끝에 찾은 작가의 길

고등학생 때 그는, 서정주와 신석정 같은 시인들이 교편을 잡고 있었던 덕분에 국어 교과서가 제시하는 세계를 넘어 역사와 사회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살아 있는 공부”를 하는 행운을 누렸다. 송길한이 사회적 각성과 이념에 눈뜬 것도 이때다. 그의 20대는 대학 진학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며 시작됐다. 하지만 “말 못할 복잡한 일”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연좌제와 가족사가 주는 극심한 피로가 청년기의 초입부터 짓누른 것이다. 그는 동가식서가숙하며 방황하다 군 기피자가 되었고 어느 날 검문에 걸려 강원도 전방 부대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는 대북방송 스크립트를 쓰며 청춘이 생매장당하는 시기를 겪는다. 전역한 그는 유학, 아니 어떤 기회라도 만들어 한국을 떠나고 싶었지만 집안의 장남으로서 여의치 않았고, 결국 은신처를 찾은 것이 도계 탄광이었다. 광업소의 사무직으로 알고 입사했지만 첫날부터 입갱하는 고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의 20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가 인생의 변곡점을 만난 것은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다. 어린 시절의 영화적 경험 덕분이었을까, 송길한은 무의식적으로 끌렸던 시나리오 부문을 목표로 정한 뒤 독학으로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그의 영화학교는 조선일보사가 운영한 아카데미극장 바로 옆의 재개봉관 ‘시네마코리아’였다. 운 좋게도 극작가 오영진과 연극연출가 김정옥이 심사한 첫 번째 도전에서 당선됐다. 남해의 외딴섬으로 도피한 젊은 커플이 20년 전에 온 부부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바다 밑으로 흐르는 검은 물결, 즉 인간의 내면을 표상하는 <흑조>에 대해 김정옥은 “마치 한편의 부조리 연극을 본 듯하다”라고 심사평을 냈다. 하지만 그의 첫 작품 <흑조>(감독 이상언, 1973)는 제작자의 취향을 타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그 역시 본격적인 활동을 주저하게 된다. 상업영화계지만 자신만의 색깔을 추구했던 송길한은, <영자의 전성시대>(1975)가 흥행 기록을 세우자 천승세의 단편 <황구의 비명>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용주골의 양공주 이야기가 검열을 거치며 <과거는 왜 물어>(감독 조관수, 1976)라는 제목으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영화진흥공사 공모에서 최우수 시나리오로 선정된 <둘도 없는 너>(감독 설태호, 1977)를 계기로, 그는 1970년대 후반 다작 작가로 거듭났다. 그의 70년대 작업의 한축이 멜로드라마였다면 또 다른 한축은 반공영화였다. <둘도 없는 너>로 인연이 된 설태호 감독의 <누가 이 아픔을>(1979)처럼 당국이 반공영화로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도 곧잘 써냈다. 영화에 반공이나 새마을운동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1970년대, 그는 “마음으로는 늘 보따리를 아침에 쌌다가 저녁에 또다시 풀고”를 반복하며 생계형 작가로 버틴다.

임권택과 만난 80년대

1970년대 말 삼영필름 기획실에서 근무하며 멜로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쓰고 홍콩과의 위장 합작영화에도 이름을 올렸던 그는, 탱크부대의 순국 실화를 영화화하는 프로젝트에서 임권택과 처음 작업하게 된다. ‘반공영화의 명수’인 둘을 모은 것이었다. 물론 송길한은 <잡초>(1973), <깃발없는 기수>(1979) 같은 임권택의 연출작을 눈여겨봤고, 빨치산을 다룬 김원일의 소설 <노을>을 그에게 건네 “아이, 충무로에서 이런 걸 영화로 하자는 사람도 다 있네?”라고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각자 습작 혹은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이 이념적 공감을 나눈 계기였다. 아무리 반공영화라도 공간과 사람을 성실하게 취재한 후 쓰겠다는 송길한의 원칙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둘은 김중희의 단편 <짝코>를 영화화하기로 의기투합한다. 송길한은 종군기자 출신의 원작자를 방패 삼아, 빨치산 토벌 작전 이후 30년간의 이야기에 도전했다. 그는 한치도 생략할 수 없었던 민중사를 펼치기 위해 플래시백 기법을 택했고, 둘의 첫 협업작인 <짝코>는 후배 영화인들에게 플래시백의 교과서가 되었다.

이후 송길한은 임권택과의 작업에 매진했다. <만다라>(1981)의 시나리오를 쓰며 기획 일을 그만둔 그는 <우상의 눈물>(1981), <안개마을>(1982), <나비 품에서 울었다>(1983), <불의 딸>(1983), <길소뜸>(1985), <티켓>(1986), <씨받이>(1986)를 연이어 썼다. 둘의 협업은 촬영기사 구중모와 정일성이 합류하며 더욱 빛났다. <길소뜸>과 <씨받이>가 각각 베를린국제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한국영화가 주요 국제영화제와 접속하기 시작했던 데에는 그의 공이 적지 않다.

영화산업의 체질이 바뀐 1990년대, ‘레거시 충무로’를 상징하는 배우 김지미가 혼신의 힘을 쏟은 <명자 아끼꼬 쏘냐>(감독 이장호, 1992)의 각본을 마지막으로 그는 한국의 영화문화를 두텁게 하는 일에 나선다.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시작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과 서강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전주국제영화제 출범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19년 한국영상자료원이 4회에 걸쳐 그의 생애를 구술로 기록했을 때(채록연구 이정아)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아, 이게 내 길이었구나!” 한국영화를 일군 영화인 송길한의 영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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