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게임의 법칙
2025-01-31
글 : 송경원

“간단하게 말할게.” “복잡하게 말해도 된다.” 영화 <친구>(2001)에서 동수(장동건)는 자신을 멈추려는 준석(유오성)의 제안을 아니꼽게 받아친다. 열등감과 미안함으로 배배 꼬인 동수의 도발은 호의로 마련한 대화의 장을 차단하는 최악의 대응이다. 맺고 끊는 게 분명한 준석은 동수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잔혹하게 잘라낸다. 모든 상황을 단순화시키려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요즘, 문득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대화를 단절한 건 동수일까 준석일까. 준석이 동수의 도발을 받아넘기고 수용하여, 복잡한 상황과 자신의 마음을 길고 자세히 설명해주었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는 친구를 제거해야 했던 동수의 고뇌를 꽤 멋들어지게 포장한다. 여기서 문득 드는 의심. 실은 복잡하게 말할 의지가 없는 동수는 처음부터 설득할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닐까. 뭘 그렇게까지 의미 부여를 하나 싶겠지만 현실에서도 동수처럼 상황을 둘로 갈라치는 이들을 의외로 자주 마주한다. 적과 아군. 좋거나 나쁘거나. 복잡하게 엉킨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낸 알렉산더 대왕의 칼질처럼 단순명쾌한 행동은 일견 시원시원하고 멋져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흑백이 아니다. 때론 지난하고 복잡해 보여도 에둘러 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긴 호흡으로 보면 복잡한 걸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게 결과적으론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1월 내내 2025년 새롭게 소개될 신작들을 살펴보고 정리하면서 새삼 복잡함의 미덕을 되새기는 중이다. 이번주는 배급사와 OTT 플랫폼 대표들에게 올해의 전망을 물었는데, 얼어붙은 극장가의 위기 한가운데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돌파구를 모색하는 이들의 고민 속에서 단단한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심사숙고한 답변 중에서도 유난히 마음에 남은 건 올해의 기대작에 대한 김유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콘텐트 본부장의 말이다. “사실 지금 시장에선 제작에 들어가기만 해도 축하와 박수를 보내야 하는 상황이어서 어느 것 하나 애정이 가지 않는 작품이 없다.” 모두를 향한 응원은 어느새 자신을 향한 다짐으로 돌아와, 승패가 분명한 제로섬게임의 판을 논제로섬게임으로 확장시킨다.

이번주 커버를 장식한 <오징어 게임> 시즌2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내가 살기 위해 상대방이 죽어야 하는, 타인의 죽음이 나의 이익이 되는 폐쇄된 게임 속에서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팀전인 5인6각 경기 중 현주(박성훈)가 제기차기를 할 때 사람들이 모두 함께 성공을 응원하는 것이다. 경쟁자가 많이 탈락해야 상금도 늘어나는데, 사람들은 왜 현주 팀을 응원하는 걸까. 누군가가 성공해야 뒷사람도 안심이 된다는 등의 몇 가지 합리적인 이유를 추론해볼 순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그저 경쟁을 잊고 하나 되어 응원하는, 그 순간의 순수한 에너지를 믿고 싶어졌다. 위기 앞엔 언제나 양 갈래 길이 있다.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각자도생의 길과 내가 잠시 손해볼지 몰라도 함께 가는 공존의 길. 멀리서 볼 땐, 여유가 있을 땐 답이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막상 당사자가 되면 죄수의 딜레마에 사로잡혀 불안해지리라는 것을.

아무쪼록 올해는 게임의 법칙에 휘둘리지 않을 한줌의 용기를 주소서.

단순명쾌한 해법 대신 기꺼이 복잡한 대화의 길을 걸을 인내의 마음도 함께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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