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건축은 인간이 위대하다는 가장 위대한 증거다.” 구겐하임미술관 등을 건축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남긴 말이다. <브루탈리스트> 속 건축가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헝가리에서 위대한 건축을 남겼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그는 아내 에르제벳(펄리시티 존스)과 조카 조피아(래피 캐시디)와 미국에서의 새 삶을 꿈꾸며 그들보다 먼저 미국으로 향한다. 라즐로는 도시 재건을 위한 공공건축의 잡역부로 일하지만 사촌이 운영하는 가구점의 쪽방과 노숙인 보호시설을 전전하며 곤궁을 면치 못한다. 그런 라즐로 앞에 몇년 전 그를 매몰차게 내쫓은 부호 해리슨 밴 뷰런(가이 피어스)이 나타난다. 해리슨은 라즐로를 자신의 저택에서 먹이고 재우며 그에게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딴 지역 문화센터의 건축을 의뢰한다. 라즐로는 타향살이 중에 입지전적으로 살아남아 미국에서도 위대한 건축을 남긴다. 하지만 라즐로는 라이트의 격언과 달리, 위대한 인간은 되지 못한다. 그의 삶은 연일 잔혹해 존엄 따위를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이민자의 수난으로 세운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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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소설, 영화가 지금까지도 재현하듯 미국은 이민자가 세우고 빚은 나라다. <브루탈리스트> 역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간 이민자가 자신의 바람이 어떤 허상에 불과했는지 통감하는 이야기다. 여느 이민자 영화처럼 증기선을 타고 엘리스섬에 도착한 라즐로가 처음 마주한 미국의 단상은 뉴욕의 랜드마크인 자유의 여신상이다. 대개 자유의 여신상은 영화 속에서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자 인물 앞에 놓인 거대한 운명의 메타포다. 따라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배 아래 이민자를 노려보는 듯한 숏으로 찍힌다. 반면 <브루탈리스트>는 영화의 포스터에도 드러나는 것처럼 카메라를 라즐로 아래에 두고 자유의 여신상을 뒤집어 찍었다. 라즐로 눈에 비친 미국의 이상은 두 다리 대신 위태롭게 머리로 지탱해 서 있고, 정의의 횃불은 허드슨강 하구에 처박혀 있다. 이는 라즐로가 꾸는 꿈이 얼마나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지 드러내는 일종의 선포다.
최근 <페어웰> <미나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등 A24가 제작, 배급한 현대 미국 배경의 이민자 영화는(<브루탈리스트>도 A24의 배급작이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디아스포라 정체성 탐구가 내러티브의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 <브루탈리스트>는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삶을 통해 고국에서도 미국에서도 핍박받는 이민자의 삶을 다루지만 그렇다 하여 유대인의 정체성 확립을 화두로 삼진 않는다. 오히려 <브루탈리스트>엔 고전적 흥취가 가득하다. 영화는 공개 당시 아메리칸드림을 품은 이민자가 엄혹한 1950년대의 미국에서 살아남는 서사라는 점에서 엘리아 카잔의 <에덴의 동쪽>(1955)과 짝지어졌고, 유대계 이민자 남성의 일대기를 긴 대서사시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에 비견됐다. 러닝타임 내내 중독과 향락에 취해 허우적대지만 예술가로서의 비전은 놓칠 수 없는 라즐로와 고등교육을 마쳤지만 미국에서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에르제벳을 좌절시키는 존재는 미국 그 자체를 육화한 캐릭터 해리슨이다. 해리슨의 건축 의뢰와 일방적인 후원은 미국의 재건을 위해 쇠망한 유럽의 잔재를 무작정 자본으로 편입하려 했던 전후 미국의 정책과 다를 바 없다. 재정과 권력에서 모두 우위를 점하는 해리슨은 라즐로를 정신적으로 유린하고 성적으로 학대한다. 거듭된 착취 속에 라즐로는 건축 사조 브루탈리즘의 어근인 ‘브루탈’(brutal)의 의미처럼 잔혹해지고, 이내 미국의 폭력을 내면화하기에 이른다. 이때 접미사 ‘-ist’가 ‘어떤 것을 행하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제목 ‘The Brutalist’는 건축물인 동시에 잔혹한 사람을 지칭한다. 그리하여 브루탈리스트는 잔혹의 주체인 해리슨(혹은 미국)일 수도, 똑같게 잔혹하게 살아남는 라즐로일 수도 있다. 영화 속 미국은 낙관이 가득하고 예술은 불멸한다. 반면 그 낙관에 동원한 인간은 비루하고 예술가는 필멸할 뿐이다.
대칭과 반복으로 세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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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건축물이 되고 싶었던 걸까. 프롤로그와 1부, 2부와 에필로그 그리고 그 사이의 인터미션으로 이루어진 <브루탈리스트>의 구조는 실로 건축적이다. <브루탈리스트>는 대칭과 반복을 작품의 조형 원리로 사용한다. 전체 뼈대에 국한한 설명이 아니다. 영화의 세부 장면 역시 대칭과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조피아의 얼굴이 프롤로그를 열고 에필로그를 닫으며 수미상응한다. 프롤로그의 시작과 1막의 끝은 에르제벳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채운다. 1막 초반의 라즐로는 매춘부와, 2막 초반의 라즐로는 에르제벳과 유사 성행위를 나눈다. 프롤로그에서 뉴욕행 여객선의 계단을 오르는 라즐로와 2막에서 뉴욕 마천루 사무실의 계단을 오르는 마이클(피터 폴리카푸)은 핸드헬드로 찍은 트래킹숏에 담긴다. 프롤로그 끝의 휘프 패닝으로 찍은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은 1막의 45도씩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공사 현장의 판금, 2막 끝의 뒤집힌 십자가 숏과 조응한다.
<브루탈리스트>의 구조적 특징은 왜 필요했을까. 몇 가지의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먼저 브래디 코베 감독은 전기영화나 역사물이 인물의 일대기를 선형적으로 묘사하거나 명확한 인과관계로 플롯을 구축하는 것, 혹은 연표로 항목화하는 일에 염증을 느낀다. 대신 그가 생각하는 역사의 미학은 반복에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말하는 것과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느끼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며 현재의 우리에게 어지럽고 기묘한 영향을 끼친다”(<르 시네마 클럽>)라고 역설하는 코베의 사관(史觀)이 중첩되고 변주되지만 서로에게 인과적 영향을 끼치지 않는 장면의 배치와 닮았다. 한편 이같은 반복과 대칭은 작품의 내적 요소와 이격을 이룬다. 작품의 형식과 달리 브루탈리즘 건축은 비대칭과 불균형을 추구한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지난 베니스국제영화제의 기자회견에서 라즐로의 궤적을 “파시즘으로부터 도망친 남자가 자본주의를 맞닥뜨리는 이야기”라 정리한 바 있다. 여기서 잠깐. 파시즘 건축이나 레니 리펜슈탈 등 나치즘에 동조했던 예술가들은 규격과 통제, 좌우대칭과 동형반복을 미의식의 요체로 삼았다. 달리 말해 이 영화는 라즐로의 아메리칸드림을 그가 미국으로 도망치기 이전 그를 괴롭게 한 세상이 추구하던 미학에 가둔다고 볼 수 있다. 압도적인 서사를 지닌 세 캐릭터가 종적이 묘연한 퇴장을 헐겁게 맞이한다는 점도 치밀하게 짜인 작품의 구조와 대립한다. 에필로그 직전 해리슨은 실종된다. 에필로그 속 에르제벳은 이미 고인이며 라즐로는 무슨 일인지 언어 능력을 상실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각 캐릭터를 독 안에 든 쥐처럼 몰아가던 스토리의 논리가 무색하게 결말에 이르면 작품의 구조를 제외한 대부분의 요소가 전조 없이 일시에 증발해버린다. 비평가들은 <브루탈리스트>에 상찬을 보내다가도 대뜸 영화의 장력을 무력화하는 에필로그가 이야기 끝에 맞붙어야 할 당위에 의문을 표했다. 이 결말은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왜 건축을 하나요?”라고 묻자 라즐로가 “어떠한 격변이 있어도 오래 살아남는 것을 만들기 위해 건축을 합니다”라고 답하는 문장과 통한다. 영화는 라즐로와 에르제벳, 해리슨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산화한다. 하지만 그 구조만은 엔딩크레딧까지 버리지 않는다. 끝까지 살아남는 집요한 대칭과 반복. <브루탈리스트>가 건축물의 위용을 뽐내도록 만드는 콘크리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