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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포그래피의 역사는 이견 없이 솔 배스에게서 시작한다. 이 미국 그래픽디자이너가 1950년대 할리우드에 입성해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영화 타이포그래피의 세계엔 이름난 인물이 없었다. 그전에 해당하는 무성영화시대에서부터 194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까진 미술팀의 누군가가 그때그때 역할을 해왔다. 광고 회사에서 근무하던 솔 배스가 할리우드로 건너가게 된 건 오토 프레민저 감독의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1955)를 맡으면서부터다. 마약중독자인 재즈 뮤지션의 극복기를 다룬 영화의 포스터와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를 헤로인으로 향하고 마는 팔의 이미지와 간격이 좁은 굵은 글씨를 사용해 디자인했는데 이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중 감옥에 있는 듯한 답답한 느낌을 주는 서체는 타이포그래피가 영화의 분위기와 인물의 심리까지 전달할 수 있다는 걸 확실히 알리는 계기가 됐다. 솔 배스는 히치콕을 만나면서 대성하고 그와 함께 영화 타이포그래피의 예술성도 점차 발전한다. 현기증을 겪는 여자주인공의 불안정성을 함축한 내부가 텅 빈 역설적 서체(<현기증>), 도망치는 남자의 상황을 화살표 이미지와 사선 배열로 표현한 역동적인 서체(<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이코드라마의 분위기를 반영한 글자의 허리 부분이 수평으로 잘린 채 파괴된 서체(<싸이코>)가 모두 혁신성을 인정받으며 영화 타이포그래피를 독립적이고 예술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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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가 개척한 길에 머지않아 신성이 나타난다. 솔 배스처럼 광고 업계에서 먼저 경력을 쌓은 쿠바 출신의 그래픽디자이너 파블로 페로는 1950년대 후반에 할리우드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의 이름은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로 빠르게 알려진다. 타이틀 시퀀스에는 (<가여운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손글씨로 쓴 듯한 얇은 글자들이 등장한다. 무기를 실은 채 나는 비행기를 덮어버리는 글자들은 너무 크거나 작고 그중엔 키다리 아저씨처럼 생긴 길게 늘인 듯한 글자도 있다. 일반적인 비율에서 벗어나 기이하고 어긋나 보이는 동시에 장난스럽기도 한데 이 모든 느낌은 영화의 배경인 냉전시대의 긴장감과 핵전쟁과 군사주의에 대한 풍자성과 맞물리면서 페로의 타이포그래피의 탁월성을 증명한다. 페로에게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예외적인 작업이었다. 디자인 전문 온라인 매체 <아트 오브 더 타이틀>과 2014년에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원래는 일반적인 영화용 글자들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스탠리가 글자를 봐야 할지 비행기를 봐야 할지 모르겠는 느낌을 원한다고 했다. 그게 뭔지 알 수 없어서 원래 내가 낙서하듯 얇고 키가 큰 글씨들을 써냈는데 스탠리가 그걸로 화면을 채웠다. 보는 순간 완벽하다고 생각했다”라고 회고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스톱 메이킹 센스> <아담스 패밀리> <맨 인 블랙> 등을 거치며 확립된 페로 서체는 영화 타이포그래피에서 중요한 레퍼런스로 자리 잡으며 전형성을 깬 서체 디자인이 탄생하는 데 영향력을 끼쳤다.
SF의 리처드 그린버그와 감정의 카일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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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배스와 파블로 페로가 앞장선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를 영화 타이포그래피의 기틀을 세운 시기라고 한다면 타이틀 디자이너 리처드 그린버그가 활약한 1970년대부터는 확장의 시기로 부를 수 있다. 솔 배스를 동경하고 파블로 페로 밑에서 배운 리처드 그린버그는 동생 로버트와 프로덕션 스튜디오 ‘R/Greenberg Associates’(현재 ‘R/GA’)를 설립한 뒤 창작 파트를 맡으며 타이틀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3D그래픽과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한층 살아 움직이는 듯한 서체를 만든 점이 그를 유명하게 했다. 대표적인 작업은 크리스토퍼 리브 주연의 <슈퍼맨>(1978)이다.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오프닝 타이틀에서 푸른빛을 발산하고 흡수하는 영롱한 서체는 아이코닉한 슈퍼히어로의 탄생을 알리는 데 제격이었다. 각진 대문자에 존 윌리엄스의 음악에 맞춰 하늘을 나는 듯한 움직임으로 슈퍼맨이 가진 힘과 그의 능력을 함축했다. 또한 그린버그는 사운드를 비주얼에 접목함으로써 영화 타이포그래피 발전에 기여했다. <에이리언>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타이틀 로고는 멀리 떨어진 글자 조각들이 아주 천천히 떠오르다가 결국 맞춰진다. 그는 이러한 미니멀한 타이포의 움직임을 제리 골드스미스의 “느릿하고 불쾌한 사운드를 타이포그래픽 방식으로 추상화해 긴장감을 조성”(<아트 오브 더 타이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극 중 미지의 생명체의 등장 방식과 그것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도 맞아떨어지면서 영화 전체를 압축하기도 한다. 1980년대에는 데이비드 스나이더가 <블레이드 러너>(1982)와 <터미네이터>(1984) 등을 담당해 SF영화에서의 타이포그래피의 영향력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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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 급부상해 2010년대까지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이는 카일 쿠퍼다. 그린버그의 스튜디오에서 디자인 경력을 쌓은 그가 명성을 얻은 작품은 <세븐>(1995)이다. 이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에 나타나는 텍스트는 혼란스럽다. 의상, 촬영 등의 직함은 도장을 같은 곳에 여러 번 찍은 듯 글자들이 겹쳐 있고 손글씨 느낌의 제작진 이름은 잉크가 거의 닳은 펜으로 쓴 듯 흐릿하며 삐뚤빼뚤하다. 찢어지고 왜곡된 서체는 영화의 주요 테마인 혼란과 폭력, 미스터리한 장르적 성격까지 반영한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글자들의 움직임은 살인자와 추격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암시한다. 카일 쿠퍼는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2012~15)의 오프닝 타이틀 제작 비하인드 영상에서 “성공적인 타이틀 시퀀스란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서체에 극의 정서를 탁월하게 담아냈다고 평가받으며 영화 타이포그래피의 세계의 새로운 깊이를 만들어낸 거장으로 손꼽힌다. 현재는 디자인 회사 ‘프롤로그 필름스’(Prologue Films)를 운영 중이다. <아이언맨>(2008)과 <셜록 홈즈>(2009) 등을 담당한 대니 욘트 등 많은 그래픽디자이너의 멘토 역할을 하며 영화 타이포그래피 전문 인력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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