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건축가의 눈으로 본 영화 <브루탈리스트>, ‘아름다움’을 팝니다
2025-02-13
글 : 윤웅원 (건축가)

영화 <브루탈리스트>에는 미국에 도착한 이민자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가 매춘부를 품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상하게 이 장면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매춘부보다 라즐로의 몸을 전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매춘부의 머리 위로 라즐로의 조각상 같은 몸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 몸을 파는 것인지 다소 모호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생각나는 문장 하나. 미국 현대건축의 대부로 불리는 건축가 필립 존슨은 잘 알려진 그의 건축 글래스 하우스만큼이나 도발적인 말을 남겼다. 보통 “건축가는 창녀다”라고 짧게 알려져 있지만 전체 문장을 소개하면 “건축가는 상류층의 창녀다. 매춘부가 고객을 거절하는 것처럼 건축가도 프로젝트를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각자의 직업에서 살아남으려면 둘 다 누군가에게 ‘예’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이다. 필립 존슨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일찍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자신이 건축주가 되어 사면이 유리인 글래스 하우스를 설계하는 것으로 건축가 경력을 시작했다. 이런 건축가가 한 말이라는 점이 다소 의아하지만 어쨌든 그의 말에는 중요한 설명이 빠져 있다. 건축가와 매춘부 둘 다 매력을 팔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는 많지만 직업이 가진 구조적인 특성을 내재화한 영화를 본 기억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브루탈리스트>는 “건축가는 상류층의 창녀다”라는 문장에서 시작한 영화처럼 보인다.

건축가는 다른 전문 직업군과 달리 기술뿐만 아니라 매력을 팔아야 한다. 영화 속 라즐로가 자신의 건축을 설명하는 대사들을 한번 생각해보자. 자신의 설계에 대해 주로 말하는 것은 공간과 빛이 만드는 아름다움에 관해서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전문용어 뒤의 의사들이나 복잡한 법전의 세계 속 변호사와 달리, 건축가가 우선 의존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던 미술가들의 시대와 달리 현대의 예술가들은 더이상 특정한 개인을 위해 작업하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생일 파티에 불려가는 유명 가수들이 존재하지만, 예술가의 주 대상은 시장이라는 이름의 대중이다. 어쩌면 건축가만이 유일하게, 여전히 개인을 위해 작업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영화 <브루탈리스트>의 라즐로 토스처럼 실제로 나치를 피해서 미국에 정착한 헝가리 태생 건축가가 있다. 뉴욕의 휘트니 뮤지엄을 설계한 마르셀 브로이어다. 라즐로가 친척의 가구 회사에 전시한 의자는 마르셀 브로이어가 바우하우스 시절 디자인하고 바실리 칸딘스키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바실리 체어를 연상시킨다. 영화 속 건축가 라즐로와 다르게 실제의 마르셀 브로이어는 미국에서 쉽게 자리를 잡았다. 바우하우스 출신이라는 후광과 먼저 도착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덕분에 하버드에서 강의하고 이를 통해 미국 건축계에서 어렵지 않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영화는 건축주에 의존하는 건축가라는 극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유럽에서 갖고 있던 라즐로의 명성이 단절되는 것으로 그려졌다. 미국에 도착한 건축가 라즐로 토스는 여느 이민자들처럼 먼저 자리를 잡은 친척의 도움을 받는다. 가구 회사를 하는 친척과 라즐로의 동거가 주는 불안감은 라즐로가 디자인한 의자를 전시하는 장면에서 잘 보여준다. 자전거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파이프 의자의 쓰임새에 주저하며 뱉는 그의 설명은 라즐로가 갖게 될 미래의 불화를 암시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라즐로가 가구 회사에서 처음으로 진행한 건축 작업은 갑부 밴 뷰런 집안의 서재 개보수공사다. 아버지 해리슨(가이 피어스) 모르게 진행된 이 계획은 불같이 화내는 해리슨에 의해 거부된다. 비용도 받지 못하고 끝나버린 이 사건을 계기로 건축가와 가구 회사의 짧은 동거는 끝이 난다. 이제 낯선 땅에서 육체노동만이 라즐로가 구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구세주처럼 해리슨이 라즐로를 찾아온다. 서재를 본 사람들의 찬사가 해리슨의 마음을 바꾸어놓았다. 해리슨의 집 파티에서 라즐로의 서재 설계를 두고 “놀랍게도 책장의 배치로 의도적인 원근법을 구현했다”는 평도 인상적이다. 이 대사는 서재에 대한 찬사가 지닌 연약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리슨은 초판본 책들을 수집하고, 자신이 평생 마실 마데이라 포도주를 충분히 모은 후,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포도주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후 해리슨이 포도주 대신 선택한 것이 라즐로의 건축이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기념하는 건물 설계를 라즐로에게 요청한다.

해리슨의 저택 별채에 머물며 작업을 하는 라즐로가 큰 모형을 들고 해리슨을 찾아가는 장면은 흥미롭다. 이는 해리슨이 라즐로를 찾아가지 않는 관계, 둘 사이의 권력 구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모형에는 이상한 점이 있는데, 지나치게 크게 만든 모형임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발견할 수 없다. 물론 오직 천창으로만 채광을 해결하는 건물도 있지만 도서관, 체육관, 채플을 포함한 시설에서 창문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모형을 통해 라즐로가 설명하고자 한 것은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효과다. 라즐로에게 중요한 것은 빛과 공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창문 없는 모형이 잘 보여준다. 라즐로는 공사 기간 내내 건물 높이를 줄여 예산을 맞추라는 집요한 요구와 마주한다. 놀랍게도 건물 높이를 유지하기 위한 라즐로의 선택은 자신의 설계비를 줄이는 것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잠시 울컥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공간의 높이 때문에 자신의 설계비를 포기하는 건축가 라즐로의 순진함과 간절함에 이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진행되던 기념관 공사는 중단된다. 공사 중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공사 중인 건물이 늘 마주하는 건축주의 불안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난 후, 공사를 재개하기 위해 방문한 대리석 광산에서, 대리석 표면에 물을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 물을 머금은 대리석은 긴장한 몸의 힘줄처럼 자신의 문양을 드러낸다. 놀랍게도 이때 해리슨은 마치 아름다움에 매혹된 사람처럼 대리석 표면에 천천히 얼굴을 갖다 댄다. 이 장면은 이후 벌어진 해리슨과 라즐로 사이의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극단적인 비대칭관계가 만들어낸 이 사건을 계기로 기념관 건물을 목적지로 한 건축가 라즐로와 건축주 해리슨의 여정은 마침내 그 끝을 맞이한다.

영화의 에필로그는 1980년 열렸던 첫 번째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다(건축가 라즐로 토스 회고전이지만 실제 1980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주인공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들이었다). 회고전에 나오는 라즐로의 건축은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내게 이것들은 건축 형태가 아닌 태도의 브루탈리즘으로 보였다. 그것은 자신의 설계비를 줄여서라도 목적지에 다다르고 싶어 했던 건축가가 만든 결과들이었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영화 속 라즐로의 건축을 정의하는 문장, “여정이 아니라 목적지”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도그마에 세뇌되어 내가 잊고 지내던, ‘도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시 필립 존슨의 문장으로 돌아가보자. “건축가는 상류층의 창녀다”라고 말한 건축가 필립 존슨의 경력에서 재미있는 점은 20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세 가지 중요한 건축 사조,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모두에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마치 당대의 경향들을 수집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졌다. 라즐로가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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