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좋아하는 카페의 화장실 벽에는 작은 쪽지가 붙어 있습니다. 은은한 조명까지 그 쪽지만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멋있는 문장이 쓰여 있을 것만 같고 하다못해 ‘깨끗이 써주세요’ 같은 안내 문구라도 있어야 어울릴 것 같지만, 거기에 쓰인 문구는 이렇습니다. “이별의 다섯 가지 단계: 부정-분노-우울-수용-이소라.” 진지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가 풋 하고 웃어버리게 되는 짧은 유머입니다. 이건 커블러 로스의 분노의 5단계 이론을 살짝 변형한 것인데요, 원문에서는 수용으로 끝나는 지점 너머에 가수 ‘이소라’를 붙인 것이지요. 어쩌면 인간의 비애감을 끌어안고 그 너머로 훌쩍 넘어가버린 경지를 이소라(의 음악이거나 그녀 자신 혹은 그 모든 것)라고 칭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이소라 상태’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아직 지겹도록 김사월만 하고 있습니다…. ‘수용’이라는 다음 스테이지가 다가오면 어떤 이유인지 다시 처음 부분으로 돌아가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처럼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아직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엔 능력치가 부족하기도 하고요, 수용에 묘하게 반항적인 마음이 들기도 해서 우울한 얼굴로 부정과 분노의 동네를 빙빙 맴도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 땐 가끔은 회피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이럴 때 왓챠와 넷플릭스가 우리와 함께합니다. 다른 이야기의 세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현재의 시간도 강제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한달 후, 일년 후에도 지금처럼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 걱정과 대비도 합니다. 오늘이 오늘밖에 없다는 걸 매번 자각하면 아까워서 어떻게 살까요. 끝이 없다고 생각하니 바보짓을 하며 시간을 쓸 수 있겠습니다.
요즘 제 사정이 어떻든, 그동안 잘 지냈느냐는 친구들의 일상적인 물음에도 “완전 잘 못 지내는 중”이라며 진실하게 말한다면 조금 곤란해지겠지요. 나야 똑같지, 별일 없었어. 이처럼 걱정 끼칠 내용은 굳이 담지 않은 대답을 건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과 마음을 품은 채 친절히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며 살고 있을까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상상하기 어려운 한 친구가 떠오릅니다. “사월은 요즘 어떨 때가 좋아?” 어느 날 그 애가 저에게 이렇게 안부를 물었을 때는 안간힘을 다해 지금의 저를 담아 대답하고 싶어졌습니다.
요즘 저는 아침 시간이 좋습니다. 그때만큼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침실을 환기해놓고 운동복을 입습니다. 매트 위에서 시간을 들여 요가와 스트레칭, 근력운동이 섞인 나름의 움직임을 합니다. 약간 땀이 난 상태에서 슬쩍 집 청소를 하고 샤워를 합니다. 좋아했지만 익숙해진 샴푸와 보디워시의 냄새를 새삼스럽게 맡아봅니다. 샤워를 마치고 욕실의 작은 창문을 엽니다. 겨울 아침의 공기는 시리고 상쾌합니다. 샤워실을 나가면 간단한 식사를 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제 아침 루틴의 최신 버전입니다. 이렇게 추운데도 햇볕은 따뜻한 느낌이 드네요. 젖은 욕실 타일 위에 오늘의 해가 비치는 걸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 순간, 저의 하루도 새로 생성되었음을 느낍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사라지는 것조차 아까운 아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고 싶었던 영화에 집중하고, 준비해오던 일에 골몰하고 있는 그 순간에는 아픔을 잊고 있을 테지요. 아침 식사로 정해놓은 두유 요거트와 견과의 맛을 음미하며 별생각을 안 하고 있을 때 저의 부러진 부분들은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붙을 겁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고 떼를 쓰지만, 불행히도 저는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 웃겨서 폭소하는 날이 생기고, 뭔가 맛있어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며, 무언가를 다시 사랑하는 마음도 결국 생겨날 겁니다. 그 친구에게 “너는 어떨 때가 좋아?” 하고 되묻자 그 애는 밤 시간이 좋다고 했습니다. 주어진 일들을 어떤 식으로든 해내고 하루가 끝난 그때, ‘오늘도 큰 문제 없이 흘러갔구나’ 하고 느끼며 누워 있는 시간이 좋다고요. 그러면서 같은 질문에 요즘 재미있는 영화, 좋아하는 음악 같은 것이 아니라 루틴을 대답으로 말하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이 대화가, 일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겪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일상을 붙잡으려는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있던 그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 눈을 좀 긁었고, ‘눈이 간지러운가?’ 생각하고 있던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실 이틀 전에 사고로 친구를 잃었어요.” 죄송하지만 저는 그 앞에서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울지도 못하는데 저는 제 고통을 이입해서 울어버린 거지요. 어쩌면 울지 못하는 저의 고름을 짜기 위해 자신의 아픔을 보여주려 하신 걸까요? 당신도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팠던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작은 방 안에서만큼은 두 사람의 고통을 다소 안전하게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걸까요? 어떤 이유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은 슬프게도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가 얼씬거릴 수 없는 그 방에는 어떤 것이 무언가를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제야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