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참 기이한 경험이다. 벽 하나, 층 하나로 구분된 공간을 집이라고 부르고 산다.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두 가구를 구분 짓는 유일한 경계인데 우린 서로에 무심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 막상 벽 너머로 쿵쿵대는 소리가 침범하는 순간 이웃은 철천지원수가 된다. 이토록 삭막한 아파트살이에 돌연변이가 등장한다. 시간도 무척 많고 오지랖도 엄청 넓은 백수 거울(경수진)이 그 주인공이다. 동생의 권고로 급히 구한 ‘백세아파트’에 잠깐 살다 나갈 셈인 거울은 첫날 밤부터 굉음을 경험한다. 한달만 버티고 이사하면 그만인데 거울의 오지랖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과연 넓은 오지랖은 각박한 세태를 이겨낼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난제인 층간소음을 오지랖 넓은 백수가 해결하려 하는 코미디 수사물 <백수아파트>로 장편 데뷔 신고식을 치른 이루다 감독은 확신에 찬 듯 “선의는 결국 전염될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백수아파트>의 시나리오에 실제로 소음 문제를 겪었던 경험이 녹아 있다고.
한창 시나리오를 쓸 때 오피스텔에서 살았다. 복도 맨 끝 집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계속 쿵쿵대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버티면서 지내려 했지만 소리가 들려오는 빈도가 몇분 단위로 점점 빨라지더라. 결국 주말에 날을 잡고 모든 호수를 돌아다니며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헤맸다. 알고 보니 오피스텔 외벽에 찢어진 현수막의 프레임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관리실에서 현수막을 제거한 뒤로는 소음이 사라졌고. 사소한 소음 문제가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웃음)
- 층간소음을 해결하는 주체가 시간이 아주 많은 백수라는 점이 흥미롭다.
층간소음 소재의 시나리오와 백수가 주인공인 시나리오가 각각 따로 존재했다. 백수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는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동안 내가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세상의 모든 백수에게 여전히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응원을 담고 싶었다. 평소에도 <백엔의 사랑>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처음엔 거울이도 진짜 게으른 백수에 가까웠다. 다만 층간소음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가려면 능동적인 인물이 필요했다. 그렇게 오지랖 넓은 백수 거울이 탄생했다.
- 요즘같이 각박한 시대에 오지랖이란 말을 참 오랜만에 듣는다.
낯설기만 했던 타인이 일말의 호의를 베풀 때 우리는 쉽게 감동하기 마련이다. 불현듯 건네는 손수건에 울컥하는 것처럼 말이다. 거울이도 굳은 선의로 무장하고 있다. 그 심지가 주변을 물들여 연대하게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 털털하고 호방한 거울의 모습과 <나 혼자 산다>나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보여준 경수진 배우의 모습이 유사해 보였다.
예능프로그램에서 ‘경 반장’ 캐릭터로 불리지 않았나. 소소하지만 능동적인 일상을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간 청초한 첫사랑 이미지로 많이 등장한 터라 경수진 배우도 본인의 실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야말로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심지어 MBTI도 최고의 궁합이라는 ENFP(경수진 배우)와 INTJ(이루다 감독)였고. (웃음)
- 신기가 떨어진 무당, 주거 침입도 불사하는 공시생, 험악하게 생긴 ASMR 유튜버까지. 백세아파트에는 거울만큼 독특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층간소음의 범인을 쫓는 추적극으로서 용의자를 추려내는 과정이 매우 중요했다.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들이 모두 흥미로운 캐릭터이길 원했다. 30대 여성인 거울을 축으로 성비와 나이를 고려해 인물들을 구상했다. 20대 여성과 남성, 중년 남성과 여성 그리고 동갑내기 친구인 경석까지. 마치 독수리 오형제 같은 조합이다. 영화를 유심히 보면 대체로 반말로 타인을 대하는 거울이 누군가에게는 반말을 쓰지 않는다. 주인공을 축으로 탄생한 인물들이기에 각 구성원과 거울 사이에 오가는 대사의 미묘한 차이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포인트다.

- 스마트폰으로 데시벨을 측정하거나, 주민센터 문서를 찾아보는 등 평범한 시민이 할 법한 수사 과정의 연속인 점도 흥미롭다.
층간소음은 공권력이 쉽게 해결해줄 수 없는문제다. 일단 소음이 시작되면 그저 버티며 살거나 절이 싫은 중이 떠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관객들도 주민의 일부가 되어서 문제의 원흉을 같이 찾아가는 재미를 느끼길 원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항상 내가 백세아파트 주민으로서 어떻게 용의자를 추려낼지 고민했다. 만약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라면 용의자가 아님을 증명할 어떤 알리바이가 있는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소음의 진원지는 어떻게 파헤칠 수 있는지 등 평범한 사람이 시도할 방법을 고려했다.
- 표면에 드러나진 않지만 백세아파트를 둘러싼 층간소음 문제는 재건축과 철거 용역이라는 더 큰 사회문제로 뻗어간다.
층간소음은 세대주 개인의 문제로 일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설계의 문제나 제도의 문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개인에서 출발해 시스템으로 확장해야 영화적일 거라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시공사와 철거 업체간의 카르텔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밝혀내기 힘든 구조인 것 같았다. 사회적 시각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지만 이런 구조가 작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 거울을 돕던 주민들이 아파트 마당에서 벌이는 난투극은 웃기면서도 애잔한 인상을 준다.
마당 액션신은 거울과 함께했던 이들이 그의 오지랖에 물들었음을 드러낸다.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물건인데 다 큰 어른들이 죽자고 달려드는 장면이다. 주위에서 별거 아닌 일에 온 힘을 쏟는다고 거울에게 핀잔을 주었는데 결과적으로 주민들도 그런 사람이 되었다. 마치 거울 없는 거울 팀이라고 해야 할까. 난투극도 자세히 보면 멋있는 장면 하나 없다.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개싸움의 연속이다. 카메라도 최대한 가까이 개입해 멀리서 볼 때는 느끼지 못한 그들 나름의 간절함을 보여주려 했다. 오지랖에 전염이 된 이들은 이토록 간절하게 무언가를 지키려 노력할 수 있다는 점을 관객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