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선택하러 여기 온 게 아니야. 이미 선택은 했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여기 온 거야.”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예언자 오라클을 만난 네오는 묻는다. 당신이 미래를 이미 알고 있다면,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라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 선문답이 근래 종종 떠오른다. 자칭 신중한, 타칭 우유부단한 성격의 나는 현대인이 모두 일정 정도의 선택불가 증후군을 앓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고 주장 중이다. 너무 많은 정보와 선택지가 주어지면 때때로 그냥 멈추고 주저앉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OTT에 접속한 뒤 메뉴만 살피다 지쳐 결국 작품은 보지 않기’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좀처럼 결정을 못 내리는 건 팔할 이상이 환경 탓이라고 소심하게 변명해본다.
어른이 되면 선택에 대한 확신이 들까 막연한 기대를 한 적도 있다. 나이 들고 보니 그건 단호함이 아니라 후회하고 망설일 기력이 없는 것뿐이라는 슬픈 진실을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이유가 무엇이건 만성 선택불가 증후군은 편집장에겐 치명적이다. 최근 “신중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오래 가지되, 일단 선택하면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어느 유명인의 고백을 듣고 저게 리더의 덕목과 자질이구나 싶었다. 평범함에서 약간 모자란 내 경우엔 반대다. ‘할지 말지 고민되면 일단 하라’는 조언처럼 고민의 시간이 길 뿐 대개는 마음속에 이미 판단이 정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일단 결정한 뒤에도 그때 왜 그랬을까를 오래도록 곱씹는다는 거다.
그렇게 자책이 습관이 된 내가 오래전 영화 <매트릭스2> 속 오라클의 현답에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왜 이렇게 됐는지, 이유를 곱씹는 건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한동안은 우유부단함을 교정하려 꽤 애쓴 시기도 있었다. 요즘은 어차피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 차라리 제대로 이유를 곱씹어보자고 다짐 중이다. 타고난 꼴을 더 날카롭게 갈고닦는 편이 에너지 소모가 덜할 테니까. 그게 지금 주간지를 만들고 있는 이유이자 매주 버틸 수 있는 동력이기도 하다. 덧붙여 언제나 영화에서 길을 발견하고 위로받는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다. 그저 자주 접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이미 결정된 운명이 이런 거라면 기꺼이 믿을 용의가 있다.
그리하여 준비한 이번주 특집은 2025년 아카데미를 향한 질문이다. 지난주 오라클에 빙의해 수상 결과 예측을 해보았다면, 이번주는 아카데미가 오늘의 선택을 하게 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수상 결과는 물론 시상식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 모두 일종의 징후로 해석할 만하다. 필연이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매년 아카데미는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의지와 더불어 예정된 미래를 반영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카데미 외에도 ‘왜’를 물으며 이해하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다. <사랑의 하츄핑>이 어떻게 뮤지컬로 확장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갔는지 궁금하고, 미야케 쇼 감독의 <와일드 투어>가 어떻게 ‘워크숍 영화’들에 영향을 미쳤는지가 궁금하다. <플로우>가 어떻게 역대 최고 흥행 성적을 거둔 <인사이드 아웃2> 같은 쟁쟁한 대작들을 뚫고 애니메이션 팬들의 마음을 훔쳤는지도 궁금하다. 이렇게 매주 이유가 궁금해지는 일들이 쏟아지니 쉴 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