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주 오프닝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을 때 불현듯 위화감에 휩싸였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왠지 모르게 개운할 때 엄습하는 불안감과 비슷한 감각이라고 할까. 모든 게 제자리에 있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 뭔가 비어 있는 기분. 평소와 무엇이 달라진 건지 찬찬히 살펴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3주 만에 처음으로 <미키 17> 관련 원고가 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꾸로 말하자면 그제야 (미리 준비한 기간까지 합쳐) 거의 지난 두달 가까이 온통 ‘봉준호’에 둘러싸여 살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가 실렸던 1495호 <미키 17> 특집을 시작으로, 1496호에는 스티븐 연 배우 커버 인터뷰와 <미키 17> 비평, 1497호에는 세 가지 질문으로 풀어본 <미키 17> 기획 기사가 <씨네21>에 실렸다. 미리 자백하자면 이번주만 쉬어갈 뿐 다음주는 물론 그 뒤에도 <미키 17>과 봉준호 감독 관련한 지면은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어쩔 수가 없다. 상반기 최대 화제작인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동시에 그 앞에 ‘봉준호’라는 이름 세 글자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순 없었을 것이다.
봉준호는 ‘감독 봉준호’ 그 이상이다. 봉준호의 등장은 2000년 이후 한국영화의 징후가 축약된 사건이자 분기점이라 불릴 만하다. 한국에서 영화를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 입장에서 봉준호와 동시대에 산다는 건 축복이자 거대한 숙제와도 같다. <살인의 추억>(2003) 이후 ‘봉준호라는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설명하고 싶은 수많은 말들이 쏟아졌다. <미키 17> 개봉을 앞두고 적어도 3권 이상의 봉준호 관련 책이 출간됐다는 것만 봐도 그 열망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그럴수록 마치 잡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메워지지 않는 공백을 거듭 확인 중이다. <씨네21>에서 봉준호를 계속 다루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기분 좋은 허기에 빠진다.
봉준호는 빼어난 창작자인 동시에 성실한 해설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설계도를 펼쳐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수많은 ‘해석’들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기억되지 않는 건 봉준호 자신만큼 스스로 잘 설명할 이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적어도 신간 <봉준호 되기>를 읽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봉준호 되기>는 제목 그대로 봉준호라는 창작자가 ‘영화’라는 꽃을 피우기까지 무엇을 자양분 삼아 피어났는지 뿌리를 탐색한다. 어쩌면 문제는 언어의 양이 아니라 접근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던 오만으로 채워진 좁은 세계가 좋은 필자들의 날카로운 통찰을 지렛대 삼아 책 한장 넘길 때마다 한뼘씩 넓어진다.
책 중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명료한 애매성을 멋지게 구현해낸” 봉준호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다. 그렇기에 봉준호에겐 더 다양한 색깔의 길잡이가 필요하다. <씨네21> 역시 <봉준호 되기>처럼 본질을 놓치지 않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길 희망하며 새로운 경로를 모색 중이다. <미키 17>의 흥행 성적을 두고 벌써부터 아쉬운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흥행은 중요하다. 그것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걸 윤리적 의무라고 말해온 감독”(<봉준호 되기> 서문 중)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또렷한 ‘봉준호 말하기’가 필요하다. 멈출 수 없는 불안과 본능적 귀여움 사이 여전히 못다 한 말들이 넘쳐흐른다. 당분간 어떤 식으로든 봉준호를 계속 호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