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카사블랑카> <대부> <대부2>….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아카데미를 휩쓴 20세기가 오스카 최후의 화양연화 같지만 21세기의 아카데미도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2001년부터 2025년까지 아카데미에서 역사를 쓴 수상자/작을 정리해보았다.
2001 마샤 게이 하든

‘아카데미의 이변’ 목록에 늘 오르는 수상 결과. 마샤 게이 하든은 <폴락>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당시 하든과 경쟁한 배우는 주디 덴치, 줄리 월터스, 프랜시스 맥도먼드, 케이트 허드슨. 네 배우가 각각 미국배우조합상(SAG), 영국아카데미상(BAFTA), 크리틱스 초이스, 골든글로브를 나눠 수상했고 하든은 오스카를 제외한 어떤 시상식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예측 5순위였던 그의 이름이 불리자 하든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무대에 올라 외쳤다. “짜릿하네요!”(What a thrill!) /정재현
2002 핼리 베리

97회에 달하는 아카데미의 역사에서 비백인 여우주연상은 단 두명. 그 벽을 처음 넘어선 배우가 <몬스터 볼>의 핼리 베리다. 핼리 베리는 오열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소감을 남겼다. “이 순간은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앞선 도로시 댄드리지, 리나 혼, 다이앤 캐럴을 위한 것이자 내 옆에 선 제이다 핀켓 스미스, 앤절라 배싯, 비비카 A. 폭스를 위한 것입니다. 또한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모든 비백인 여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해의 남우주연상은 <트레이닝 데이>의 덴절 워싱턴에게 돌아갔다. 시드니 포이티어가 흑인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지 38년 만의 일이었다. /정재현
2003 <Lose Yourself>

오스카의 파격적인 수상 결과에 늘 이름을 올리는 목록. 전세계를 뒤흔든 에미넴 최고의 히트곡이자 <8마일>의 삽입곡인 <Lose Yourself>가 주제가상의 영예를 안았다. 힙합 최초의 오스카 수상이었다. 시상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고 시상식에 불참한 에미넴 대신 루이스 레스토가 무대에 올라 소감을 남겼다. 이날 이루어지지 않은 <Lose Yourself>의 라이브 공연은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야 이루어졌다. /정재현
2004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작품의 부제가 상을 예견한 걸까. <반지의 제왕> 3부작의 마지막인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11개 부문 후보에 올라 11개 부문 모두를 석권하는 쾌거를 누렸다. 이는 <벤허>(1959), <타이타닉>(1997)과 함께 아직도 깨지지 않은 아카데미 최다 수상 기록이다. 하지만 후보 지명을 받은 전 부문에서 수상에 성공한 영화는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유일하다. /정재현
2005 클린트 이스트우드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마틴 스코세이지의 <에비에이터>의 격돌이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이날 <에비에이터>는 5개의 트로피를,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4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하지만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까지 대중의 주목도가 높은 상은 모두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차지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제작, 연출한 <용서받지 못한 자>(1992)와 마찬가지로 두개의 오스카를 받고 돌아갔다. /정재현
2006 리안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자.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2회 수상한 자. 모두 리안 감독이 보유한 타이틀이다. <와호장룡>으로 처음 아카데미 감독상 지명을 받은 리안은 2006년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생애 첫 오스카를 거머쥐었다. 영어와 중국어 모두로 소감을 전한 리안은 훗날 <라이프 오브 파이>로 한번 더 트로피를 손에 안는다. 한편 감독상과 작품상이 대개 한 작품에 돌아가는 오스카의 경향과 달리 <브로크백 마운틴>과 <라이프 오브 파이>는 모두 작품상을 놓쳤다.정재현
2007 마틴 스코세이지

전설 마틴 스코세이지는 수십년간 오스카의 이슈메이커다. <택시 드라이버> <코미디의 왕> 등의 걸작은 감독상 지명조차 받지 못했고, <분노의 주먹> <좋은 친구들>은 감독상과 작품상 수상에 실패했다. 스코세이지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범작 축에 속하는 <디파티드>로 생애 첫 오스카 감독상과 작품상을 가져갔다. 이후에도 다수의 작품으로 후보에 올랐지만 현재로선 <디파티드>가 그의 유일한 수상작이다. /정재현
2008 하비에르 바르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 ‘안톤 쉬거’로 기억되는 하비에르 바르뎀. 일생일대의 배역과 헤어스타일을 남기며 오스카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스페인 배우 최초의 아카데미 수상자다. 바르뎀 이후로는 지금까지 단 한명의 스페인 배우가 오스카를 탔다. 그의 파트너이자 스페인 최고의 배우 중 하나인 페넬로페 크루스가 이듬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정재현
2009 히스 레저

많은 외신이 2009년 시상식 이후 아카데미가 작품상 후보작을 5개에서 최대 10개로 늘린 현상을 ‘다크 나이트 룰’이라고 칭한다. 흥행과 비평 모두를 사로잡은 히어로 블록버스터인 <다크 나이트>가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않자 아카데미가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포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던 것이다. 이해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는 모든 시상식의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고 그의 가족이 대리 수상자로 나섰다. /정재현
2010 캐스린 비글로

거대한 유리천장이 2010년에서야 깨졌다. <허트 로커>를 연출한 캐스린 비글로가 여성 최초로 오스카 감독상을 받았다. 비글로는 리나 베르트뮐러, 제인 캠피언에 이어 세 번째로 감독상 후보에 오른 여성이다. <허트 로커>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작품상을 받은 여성감독의 연출작이며, 비글로는 이 작품의 제작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트로피를 모두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됐다. 이 기록은 11년 후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가 이어받는다. /정재현
2011 제임스 프랭코와 앤 해서웨이

영예의 순간을 돌아봤으니 망측한 순간도 되짚어보자. 오스카는 화제성을 견인하고자 당시 가장 전도유망한 배우였던 제임스 프랭코와 앤 해서웨이를 쇼의 호스트로 발탁했다. 하지만 <할리우드 리포터>가 “역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오스카 생중계”라고 맹비난했을 정도로 이들의 진행은 쇼에 녹아들지 못했다. 해서웨이는 성실했지만 진행에 재능이 없었고, 프랭코는 해서웨이의 전력투구에 줄곧 무반응하는 등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정재현
2012 메릴 스트리프

메릴 스트리프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다 노미네이션 기록(21번)을 보유한 전설이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로 여우조연상을, <소피의 선택>(1982)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내리 후보에만 오른 스트리프는 <철의 여인> 속 마거릿 대처 연기로 생애 3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갔다. 수많은 동료의 기립박수 속에 연단에 선 스트리프의 첫마디. “수많은 미국인이 ‘또 저 여자야?’라며 불평하겠죠. 뭐… 별수 있나?” 대배우는 너스레도 남다르다. /정재현
2013 제니퍼 로런스

올해 마이키 매디슨이 여우주연상을 받기 전까지 제니퍼 로런스는 지난 12년간 유일한 1990년대생 오스카 주연상 수상자였다. 22살 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제니퍼 로런스는 아카데미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다. 이날 로런스는 시상대로 올라가던 계단에서 드레스 자락을 밟아 넘어진 사진으로도 수많은 이슈를 낳았다. /정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