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자연구소>는 클리셰를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강원도 산골에 위치한 한 감자연구소. 감자칩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선녀식품이 감자칩의 주원료이자 인류의 먹거리인 감자를 연구하기 위해 운영 중이다. 하지만 호시절도 잠시, 선녀식품이 대기업 원한리테일에 합병되면서 새로운 연구소장 소백호(강태오)가 등장한다. 대기업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온 그는 뛰어난 사업력, 판단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지닌 냉철한 리더다(싸늘하다 못해 추울 지경이다). 여기까진 여느 오피스 로맨스물의 전형적인 남주상과 다르지 않다. 곧 여자주인공의 명랑함과 온기로 무장해제될 거라 평이하게 예측되지만 오히려 그 방향이 요상하게 흘러간다. 그의 냉소에 제동을 건 첫 번째 요인은 바로 시골 텃세. 게다가 소백호 설정 자체에도 기존 ‘대표님’(혹은 그에 준하는 리더 자리)과는 다른 지점이 있다. 그는 재벌가와 연결돼 있지만 정확하게는 원한 장학생 출신의 임원이다. 보육원에서 나고 자라 기댈 곳 없던 그는 한정식 단체룸 담당 알바, 호텔 뷔페 서빙 알바, 놀이공원 주차장 요원 알바를 거쳐왔다. 4화 ‘요리대회’에서 소백호가 온갖 잡일을 화려하게 수행하는 장면이 웃음을 자아낼 수 있었던 건 기존 고위직 남자주인공이 보여준 권위, 위엄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그것들을 과감히 비틀어내는 역설적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자연구소>가 로맨스의 궤적을 좇으면서도 시골의 인력 부족, 초고령화 문제, 인류의 식량난 위기 등을 노련하게 짚어낼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동일하다. 안전한 전형성에 기대기보다 그것을 깨부술 때 나오는 희열의 힘을 믿는 것. 권력형 남주조차도 이제 새로운 유형으로 탄생한다. 다음엔 또 어떤 새로운 것이 나올까. <감자연구소>가 그 기대를 높인다.
check point
감자연구자들이 감자를 사랑하는 방식을 바라보는 것도 무척 큰 재미. 감자연구자를 두고 “감자의 생명을 연구하는 과학자”라고 표현하는 부재중 부장(유승목)의 말이나, 진드기 한 마리에도 작물 전염병을 걱정하는 이들의 모습이 그렇다. 실제 어딘가에서 우리의 감자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과학자들을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