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굳세어라 금순아>의 귀여운 금순이, 배두나
2002-10-02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정진환
행복한 웃음,전염시켜드릴까요?

배두나는 웃음소리가 무척 크다. 얼마나 우렁찬지 <복수는 나의 것> 마지막을 촬영한, 개울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폭이 넓은 냇물 건너편에서도, 겨울바람을 헤치고 달려오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도 활기차겠군, 기대한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 선 배두나는 뜻밖에 기어들어가는 난처한 목소리로 “그러면 안 되는데”, “싫은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사진 찍는 게 너무 좋아” 카탈로그 모델에서 CF로, 드라마와 영화로 폴짝폴짝 뛰어온 배두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이십대 중반을 코앞에 뒀는데도, 배두나는 가슴이 깊이 팬 파란 니트와 고개를 살짝 들어달라는 사진기자의 요구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에로틱하단 말이에요. 난 에로틱한 거 잘 못해요.” 그녀는 알고나 있는 걸까. 어떤 낯익은 주문이라도 배두나가 받아들이면 화학구조가 완전히 뒤바뀐 ‘배두나 식’이 돼버린다는 사실을.

사진촬영을 끝내고 털썩 주저앉은 배두나, 역시 알고 있다는 듯 솔직한 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참 이상해요. <복수는 나의 것>의 영미도 원래 그런 인물이 아니었는데 귀여워졌잖아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굳세어라 금순아> 금순이도 어떻게 보면 바로 배두나가 떠오르는 인물 같고.” 10월18일 개봉하는 배두나의 신작 <굳세어라 금순아>는 젖먹이 아기를 들쳐업은 어린 엄마 금순이가 술취한 채 단란주점에 볼모로 잡혀 있는 남편을 구하러 나서는 한밤의 모험담. 한때 배구선수였던 기운이 남아 잘 뛰고 잘 때리고, 한눈 잘 파는 실수투성이 주부면서도 시부모 잘 대접하겠다는 욕심이 넘치는 금순이는 그녀 표현대로 딱 ‘배두나 스타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100m를 20초에 달리는 무딘 운동신경을 모른 척하면서 배구훈련까지 마친 씩씩한 배두나는 금세 푸념 끝을 자랑으로 타넘는다. “어제 편집본을 봤는데, 금순이가 귀엽기만 한 건 아니에요. 짜증도 내고…. 하여튼 좀 달라요. 태우 오빠(남편 준태를 연기한 김태우)랑도 너무너무 죽이 잘 맞았으니까. 전 파트너 느낌에 따라 많이 달라지거든요.” 유독 많이 울면서 찍었다는 <복수는 나의 것>과 “세상에 이렇게 컷이 많은 영화도 있구나” 알게 해준 생소한 블록버스터 <튜브>, 그리고 <굳세어라 금순아>에 이어 9월30일 촬영에 들어가는 <밑줄긋는 남자>.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거친 영화를 세다보면 숨이 찰 지경인데, “너무 재미있어요!” 소파가 들썩거리도록 힘찬 대답을 내지르는 배두나는 기운 떨어질 기색이라곤 없다.

영화에서 보는 모습 그대로 솔직담대한 배두나지만, 피곤하거나 속상한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고민을 오래 붙들고 있는 성격이 못 돼서” 대부분 훌훌 털어버리는 와중에, <굳세어라 금순아>의 아기는 드물게 겪은 고난이었다. “아기가 금방 크니까, 전부 세명이 나왔어요. 근데 얘들이 나한테만 업히면 고생한다는 걸 알았는지 자꾸 울기만 하는 거예요. 나는 슬프게 감정잡아야 하는데 아기 운다고 즐거운 음악 틀고, 그런 게 좀 힘들었어요. 그런데 엄마에게 안겨서 방실거리는 거 보니까 아기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알겠더라구요.” 조폭한테 쫓기면서 서울 거리를 활보하는 역이라 만만치 않게 뛰었을 텐데도 “스탭들은 무거운 장비들고 나랑 똑같이 뛰니까 힘든 내색도 못했다”는 속깊은 스물셋의 배우. 출연작 대부분이 흥행에 실패했지만 <복수는 나의 것>으로 자신의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다며 배시시 웃음을 덮어내리는 그녀에겐 자신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 하고야 마는 정직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머리로 계산할 줄 몰라요”라는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해 들어도, 말의 속뜻을 셈하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그 두나, “영화 찍고나서 이런 인터뷰 하는 거 지겹지 않아요?” 의례적 질문에도 “네!” 대뜸 외치더니, “다른 배우들도 다 그렇게 대답하나봐요?”라며 멋대로 앞질러나간다.

배두나 자신은 그런 직관 때문에 행복하기도하고, 헷갈리기도 한다. 처음 나가본 CF 오디션. 계산없이 늘어져 있다가 “너 참 지루해 보인다”는 ‘평’을 들으며 메인 모델이 됐다. 연기를 계속하게 만들어준 <플란다스의 개>도 봉준호 감독의 “있는 그대로”라는 요구를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벌써 일곱편, 많이도 찍은” 지금은 가끔 걱정된다. “저는 정말 연기력에 자신이 없거든요. 나이 먹으면 어떤 모습일까 무섭기도 한데, 그래서 생각 안 하려구요. 연극하신 엄마도 연기 가르쳐달라고 조르면 아직 때가 안 됐다고만 해요. 경험이 쌓이면 눈이 떠질 때가 있겠죠.” 뉴욕에서 보낸 3주일의 휴가. 돌아다니는 것보다 가만히 쉬는 게 좋아 공원 벤치에 늘어져 있거나 자전거를 타고 놀면서도, 빨리 돌아가 일하고 싶었던 것은 그 깨달음의 시기를 앞당기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까.

“저 너무 행복해 보여요? 남들이 얄밉게 보인다고 그러지 말랬는데. 쉽게 만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해 주세요.” 욕심이 없다지만, 그래서 행복하다지만, 사실 행복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은 다 웃는데 혼자 안 웃고, 혼자 크게 웃고나면 주위 사람은 아무도 안 웃어” 코미디영화에 감이 없다고 스스로 믿었는데, <굳세어라 금순아>만큼은 다같이 웃었다며 기뻐한다. 데뷔 시절, 밀리오레 CF를 함께 찍었던 김남진과 함께 하는 <밑줄긋는 남자>에선 “별명은 곰탱이지만 너무너무 매력적인 인물”을 맡았다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질 정도로 팔짝거린다. “우리 영화 너무너무 잘될 것 같아”라며. 어쩌면 석달 정도 어학연수를 떠날지도 모른다. 앞일을 걱정하기엔 할 일이 너무 많은 배두나. 두나는 하얀 니트 머플러로 목을 야무지게 감싸고선 힘차게 또 다른 일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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