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부산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내한한 프랑스 감독 클레르 드니
2002-12-04
글 : 홍성남 (평론가)
아시아 감독들, 자유를 줬다

로르(발레리 르메르시에)는 다음날이면 애인의 집으로 이사해 그와 함께 새 생활을 꾸려갈 예정이다. 그처럼 자신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기 바로 전인 금요일 밤에 로르는 친구와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차를 몰고 시내로 나선 로르. 하필이면 그날 밤은 엄청난 교통정체가 일어난 날이어서 그녀는 도로 위에서 꼼짝도 못할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로르는 장(뱅상 랭동)이라는 낯선 남자를 자기 차에 태워주게 된다.

클레르 드니의 신작 <금요일 밤>(2002)은 새로운 삶을 눈앞에 둔 한 여자가 그 전날 밤 동안 겪게 되는 짧은 외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렇게 간단히 이야기하면 사실 이런 유의 영화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만든 사람이 클레르 드니라는 동시대 프랑스영화의 출중한 시인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말이지 그녀는 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특유의 관능적인 형식미 안에 담아냄으로써 한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로르라는 여자주인공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이 영화는 마치 그녀와 함께 그녀의 짧은 망상 혹은 꿈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과도 같은 몽롱한 느낌을 안겨준다. 국내에서 드니라는 영화감독은 아직 생소한 인물이지만, <아름다운 직업>(1998) 같은 매혹적인 걸작을 선보이며 영미권 평자들로부터 공히 “프랑스 영화계가 가장 잘 감춰온 비밀스런 존재”라는 평가를 받아낸 시네아스트이다. 드니는 신작 <금요일 밤>을 통해 자신에게 붙는 그런 명칭이 절대 과언이 아님을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다.

<금요일 밤>의 감독으로서, 그리고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으로서 한국을 찾은 이 프랑스의 시네아스트를 만나보았다. 드니는, 이를테면 이 영화는 마치 꿈과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건 의도한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저 그렇다고만 말하고 그칠 정도로 대체로 말을 아끼는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매우 친절한 태도로 자신의 영화와 영화관에 대해 들려주는 성실한 면모도 어김없이 보여주었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이야기에 처음 그녀는 “나는 결코 모범이 못된다”고 웃으며 말했지만 곧이어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고 음악도 많이 들으라고 아주 ‘모범적으로’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쌓은 ‘경험’들이 자신의 내부에 차곡차곡 쌓이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밖으로 표출될 것이라고.

-아프리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들었다. 혹 그런 경험이 당신 영화에 어떤 영향을 끼친 건 아닌가 이를테면 데뷔작 <초콜렛>은 아프리카에서의 유년기를 회고하는 영화였고, 그 밖에도 당신의 영화들 속에서는 국외자적인 것(foreignness)에 대한 매혹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태어나긴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생후 한달 만에 아프리카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렇다고 내 어린 시절이 특별히 영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유년 시절은 중요한 시기이니까 그것이 내 영화에 조금씩 스며들어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은 든다. 만일 내가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내 영화에 한국에서의 삶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났겠지.

-영화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유년 시절을 보낸 아프리카에서는 영화를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가끔씩 할리우드영화나 보았을 정도였다. 파리로 돌아와 지낸 10대 시절에는 시네클럽을 드나들며 러시아영화와 누벨바그영화들을 많이 봤다. 그 당시 본 영화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무셰트>였다. 뒤에 영화공부를 하면서 본 영화들 가운데에는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가 기억에 남는다. 그 밖에 장 뤽 고다르의 <작은 병정>도 나를 매료시킨 영화였다. 난 영화를 통해서 삶이란 것에 대해 많이 배웠다. 영화는 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영화 외에 달리 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영화감독이 된 것이다.

-특별히 영향을 준 영화감독을 꼽는다면.

=어떤 한두 사람의 영화감독이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위대한 시네아스트들보다는 영화 자체가 내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물론 내 인생 역시 내 영화에 큰 영향을 주었겠지. 그래도 굳이 영향을 준 다른 감독들을 꼽자면 빔 벤더스, 짐 자무시, 자크 리베트를 꼽을 수 있겠다. 난 조감독으로서 이들의 영화작업에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과의 만남과 영화작업은 내성적인 성격의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혹시 여성이라서 영화작업을 하는 데 어려운 점이 있는가 아니면 영화를 만드는 데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란 게 있는가.

=(단호하게) 내가 여성이라서 특별히 어렵거나 곤란한 점은 없다. 물론 제작비를 마련하고 시나리오 작업을 해나가는 것 등에서 어려움을 느끼지만 이것들은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누구나가 느끼는, 성(性)의 문제를 넘어선 어려움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으로서 영화를 만드는 데 특별한 장점을 가질 수도 없다고 본다.

-최신작 <금요일 밤>은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가.

=소설의 원작자인 에마뉘엘 베르넹과는 전에 함께 일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사람이 참 편안하게 같이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당시 베르넹은 <금요일 밤>이라는 소설을 쓰던 중이었다. 나중에 집필을 마친 그녀가 내게 자신의 소설을 한번 읽어보라고 해서 읽어보았더니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흥미있는 부분들을 더 많이 찾아냈다.

-영화 <금요일 밤>의 구성방식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인물들을 포착할 때 마치 브레송의 영화처럼 전체가 아니라 부분들만을 잡아내는 방식이다.

=사실 우리의 눈으로 전체를 보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인간의 지각상태를 되도록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전체보다는 부분만을 포착하는 방식을 썼다. <금요일 밤>은 여자주인공 로르의 머릿속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어가는 식의 영화다. 그런 면에서 1인칭의 영화, 주관적인 영화이다. 원작이 그런 식인데 이건 내가 이 원작에 충실하려고 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 속의 남녀주인공 역을 맡은 발레리 르메르시에와 뱅상 랭동은 배우로서는 비교적 평범한 외모를 가진 이들인데, 이들을 캐스팅한 특별한 의도가 있었는가.

=실제로 발레리는 내게 “왜 나를 주연으로 선택했죠 나는 못생겼는데 말이에요. 좀더 예쁜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게 어때요 난 러브 스토리에는 안 어울려요” 하고 말하곤 했다. 이 영화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겪음직한 아주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인위적인 느낌을 주는, 아주 잘생기고 아주 매력적인 배우들이 오히려 불필요했다.

-<금요일 밤>을 포함해서 당신의 많은 영화들은 형식의 관능미를 보여주는 데 탁월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관능미 혹은 관능적인 형식이라는 게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에로티시즘에 이끌리고 그것에 의해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당신의 영화들을 보면 당신은 음악을 꽤 중요시하는 영화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특히 <아름다운 직업> 같은 경우는 삽입된 음악만으로도 관객을 상당히 매혹시킬 정도인데.

=대개 내 영화의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는 그 영화에 들어갈 음악이 이미 선정이 된 상태라고 보면 된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어떤 부분에 어떤 음악이 들어가야 할지 감이 온다. 그래서 촬영할 때도 항상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한다. 내 영화의 음악을 맡고 있는 딕슨 힌치클리프와는 좋은 친구 사이라 그 사람의 조언도 중요하게 여긴다. 나는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음악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음악이 영화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상태처럼 보이는 게 좋다. 예를 들어 나라면 키스신에다가 절대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음악을 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 영화들은 대체로 중간 부분들이 툭툭 끊기는 식의 관습적이지 않은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데, 어떤 식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지 궁금하다.

=물론 영화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갖고 시나리오를 먼저 쓰는 식이긴 하지만 정작 촬영에 들어가면 그 순간순간이 아주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는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사람이다. 그곳에 이미 내러티브가 있긴 하지만 배우와 함께 작업하면서 또한 내러티브라는 게 더 성장하게 된다. 예컨대 <금요일 밤>을 처음 찍기 시작할 때만 해도 발레리는 자기가 별로 예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부끄럼을 많이 탔다. 그러나 뱅상 랭동과 함께 작업하면서 그가 발레리의 손도 잡아주고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도와주면서 지금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바로 그 배우들이 시나리오에는 없는 어떤 것을 영화에다가 가져다주는 것이다. 나는 스크립트와 스토리보드가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내가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실제 촬영장소로 가져가면 그곳에서는 비가 올 수도 있고 아니면 아주 더울 수도 있어 촬영에 곤란함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실제 촬영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영향을 받는 것을 오히려 좋아한다.

-당신의 영화는 비주얼로 이야기를 전달해준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비주얼이 중요하고 또 뛰어난데, 거기에는 물론 당신의 감수성도 큰 몫을 차지하겠지만 촬영감독 아녜스 고다르의 공헌도 큰 것 같다.

=고다르와 나는 영화학교(IDHEC)에서 같이 영화를 공부했다. 그녀는 영화에서 나의 자매와 같은 존재이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보고 같이 토론을 하곤 한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촬영장에 있을 때 서로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나는 고다르말고도 같이 영화작업을 하는 사람들과는 서로 가족처럼 지낸다.

-시나리오를 쓰는 장 폴 파르조도 당신 영화의 크레딧에 계속 나오는 사람인데.

=그는 <US 고 홈>과 <금요일 밤>을 제외한 나의 모든 영화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해왔다. 그는 원래 연극 대본을 썼었다. 언젠가 그의 작품을 보러 갔다가 그와 친구 사이가 되어 지금까지 같이 영화작업을 해오게 된 것이다. <금요일 밤>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업도 같이 한 에마뉘엘 베르넹 역시 나의 좋은 친구이다. 그녀는 <카이에 뒤 시네마>에 영화비평을 쓰기도 했었다.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글쎄…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관객으로서 영화를 보고 있을 때 나는 영화란 무언가 신비스러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완전한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영화는 말로는 하기 힘든 강렬한 어떤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삶의 어떤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직접 영화를 만들 때는 또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이것이 영화로 완성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 영화의 편집과정에 들어갈 때에서야 이것이 결국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여하튼 나는 심리적인 측면을 설명하는 체하는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영화란 좀더 비밀스런 어떤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당신이 알고 있기는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고 그럼에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할 수는 있는 어떤 것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영화에서 예컨대 왜 내가 너를 좋아하는가 하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내가 봤을 때 삶이란 그런 식이 아니니까. 실제로는 어떤 것을 먼저 느끼고 그 다음에 그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하는 식이 아닌가 무언가를 느낄 시간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줄 말을 찾지 못하는 수도 많다. 나는 영화가 바로 그런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덧없는 순간’(fragile moment) 속에.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으로 부산에 왔는데, 최근의 아시아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꽤 많은 아시아영화들을 봐왔다. 현재 유럽의 영화감독들은 할리우드 감독들처럼 흥행의 포로가 된 경향이 있다. 반면 아시아 여러 나라의 젊은 영화감독들이 만든 풍성한 영화들은 우리에게 ‘자유’라는 걸 가져다줬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양한 길을 추구하면서 영화가 이미 죽은 형식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최근의 아시아영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이번에 부산에 온 프랑수아 오종에게 동시대 프랑스영화에 대해 물었더니 가스파르 노에, 브뤼노 뒤몽과 함께 당신을 높이 평가하는 현재의 영화감독으로 꼽더라. 그럼 당신은 오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종과는 개인적으로 꽤 친한 편이다. 나는 그가 매우 용감한 젊은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나보다도 훨씬 지적이고. 그래서 그를 매우 좋아한다. 오종의 첫 번째 영화(<시트콤>)를 보고 나는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지금 시나리오 하나를 막 마치려는 상태다. <금요일 밤>의 홍보도 해야 하고 여러 페스티벌에도 가봐야 하기 때문에 계획보다 늦어지면서 아직 다 끝내지는 못했다. 그 사이에 마틸드 모니에라는 프랑스 안무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있다. 시간이 있을 때 조금씩 작업하고 있는 중이다.

사진 이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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