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어바웃 슈미트>에서 발견되는 페인 감독의 개성과 솜씨
2003-03-20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어바웃 슈미트>가 대배우 잭 니콜슨의 영화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시 한번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게 될 것인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가 창조해낸 슈미트라는 인물은 오래 기억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새삼스러운 확인이 필요한 사실 하나는, 감독 알렉산더 페인의 정확한 연출력 없이 잭 니콜슨의 슈미트 되기는 가능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어바웃 슈미트>는 배우 잭 니콜슨에 대한 ‘확인’의 기쁨과 감독 알렉산더 페인에 대한 ‘발견’의 기쁨을 동시에 선사해준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과의 첫 대면은 2년 전쯤 비디오로 출시된 <일렉션>(election)을 통해서 우연히 이루어졌다. <일렉션>은 한 야심만만한 10대 소녀의 성장기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감독의 문체는 주인공인 트레이시(리즈 위더스푼)의 당돌함만큼이나 장난스러운 재기로 흘러넘친다. 그러나 그 경쾌한 문체의 이면에는 신랄한 풍자의 시선이 담겨 있다. 트레이시가 보여주는 출세 지향과 약육강식의 논리는 미국적 가치(아메리칸 드림)의 속물성을 체현한다. 그에 맞서는 윤리 교사 짐 매칼리스터(매튜 브로데릭)는 건전한 미국 민주주의의 신념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감독은 짐이 트레이시에게 패배해가는 과정을 통해 오늘의 미국과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신화에 대해 신랄하고 냉정한 풍자를 가한다.

좀더 절제되고, 아주 절묘한

10대 소녀의 경쾌한 성장기를 미국의 지배적 가치에 대한 신랄한 정치풍자로 옮겨냈던 감독의 개성과 솜씨는 <어바웃 슈미트>를 통해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어바웃 슈미트>는 무엇보다 한 정년 퇴임한 66살 노인의 성장영화(<판타스틱 ‘노인’백서>)이다. 그리고 그 노인의 성장기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허와 실을 되돌아보는 ‘정치영화’이다. 대목대목 웃음을 끌어내는 그의 솜씨는 여전하지만, <일렉션>과 달리 그 경쾌함은 많이 절제되어 있다. <어바웃 슈미트>에서 나타나는 감독 페인의 문체와 시선은 신랄함이 많이 줄어든 대신, 그만큼 냉정해져 있는 듯 보인다(감독은 관객에게 슈미트의 슬픔에 충분히 젖어들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해주지 않는다).

모든 성장과정이 그러하듯이, 정년 퇴임한 슈미트 앞에는 반드시 거쳐야 할 몇 차례의 통과의례가 놓여 있다. 정년 퇴임, 아내의 죽음, 딸의 결혼식, 이 모든 일들이 마치 노도처럼 그에게 밀려온다. 평생을 바쳐온 회사를 다시 방문해서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새파란 젊은 후배와 주차장 한구석에 폐품처럼 버려진 자신의 파일이다. 상실감에 비척거리는 그를 조롱이라도 하듯, 늘 타고 다니던 차마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믿었던 아내와 친구의 배신을 뒤늦게 알게 됨으로써 더이상 끝이 있을 수 없는 절망에 빠진 그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유일한 기회는 놈팡이 같은 놈과 결혼하고자 하는 딸을 구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희망이었던 딸은 그의 간절한 호소를 냉정하게 거절한다. 이쯤 되면 이 영화는 누구나 눈물없이 볼 수 없는, 한 불쌍한 노인의 비극에 관한 감상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감상에 호소하지 않는다.

도대체 한 노인이 성장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자신의 사회적 효용가치와 그로 인해 가능했던 힘(권위)의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것들은 거의 각질화된 습관으로 한 인간의 신체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기에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 노인의 성장 과정은 좌절과 절망 그리고 인정과 희망의 드라마로 점철된 싸움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어바웃 슈미트>는 이러한 사실을 경쾌하고 극적으로 하지만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엔두구에게 보내는 편지, 내레이션 풍자효과

누구나 물러나야 할 때에 대한 마음속의 체념은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물질화된 습관의 힘을 거역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슈미트 또한 예외가 아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멍한 표정으로 깨끗이 정리된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슈미트는 그저 습관으로 오후 5시를 기다려 퇴근한다. 아침 7시를 가리키는 시계는 저절로 그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다.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의 공허를 견디지 못하는 그는 습관처럼 옛 자신의 사무실을 찾지만, 새파란 후배 놈에게 무시당할 뿐이다. 그의 마음은 갑자기 잃게 된 아내로 인해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지만, 습관처럼 몸에 밴 그의 경제 관념은 ‘싸구려 관’을 고르도록 한다. 딸이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의 이러한 완고한 경제관이다. 아마도 그는 40년 동안 이러한 ‘짠돌이 기질’로 아내와 딸을 숨막히게 해왔음에 틀림없다. 마음을 배반하는 이 습관의 힘은 이제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그를 한층 더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정작 그 습관을 버리는 일은 쉽지 않다. <어바웃 슈미트>는 강고한 습관의 힘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슈미트의 일상을 촘촘히 그려냄으로써 우리에게 그에 대한 감상적인 동정을 뛰어넘어 노인-되기의 진정한 고통과 어려움을 깨닫도록 해준다. 자신의 추하고 볼품 없어진 육체를 긍정하는 것이 그의 성숙의 단초였다면, 아내와의 정치적 타협으로 몸에 밴 ‘앉아서 오줌누기’의 습관을 저버리고 마음껏 서서 오줌을 누는 그의 몸짓은 그의 진정한 홀로서기가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 홀로서기는 딸의 결혼식에서 울며 겨자 먹기 식의 축사를 마친 뒤 홀로 화장실을 찾아 울음을 터뜨리는 패배 승인을 통해 완성된다.

슈미트는 40년 넘게 보험수리사로 근무한 사람답게 직감적으로 든든한 보험 하나를 들어둔다. 탄자니아의 6살 소년 엔두구의 후원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엔두구는 그가 힘겹게 성장통을 겪어나가는 동안 유일하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마음놓고 자신의 고통을 풀어버릴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처음으로 겪게 되는 당황스러운 현실 앞에서 좌충우돌 헤매는 그의 모습은 엔두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그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해 쓰는 일기이기도 하다)으로 들려오는 점잖게 정리된, 때로는 교훈적이기까지 한 슈미트 보이스오버 내레이션과 겹쳐진다. 그러한 ‘시청각적 대위법’은 유쾌한 풍자효과를 통해 우리에게 웃음을 자아내는 장치이다(감독은 전작 <일렉션>에서도 이러한 수사법을 보여준 바 있다. 귀엽고 깜찍한 트레이시의 정지화면과 그 이미지 위를 흐르는 그녀의 섬뜩한 내면을 폭로하는 짐의 신랄한 내레이션). 그러나 그 내레이션을 통해 우리는 슈미트가 더디게나마 성숙해져가고 있음도 느끼게 된다.

엔두구를 향한 슈미트의 태도에는 하나의 ‘징후’가 드러나고 있다. 뿌리뽑힌 사회적(회사와 가정) 정체성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슈미트는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아메리칸 드림의 신화)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려고 한다(더이상 가족의 사진을 지니고 다니지는 않지만 링컨의 사진(돈)만큼은 꼭 지니고 다닌다는 그의 농담은 한낱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탄자니아의 가난한 소년 엔두구는 그런 점에서 정말 적절한 상대일 것이다. 그의 자신을 되찾기 위한 여정은 철저히 이 신화의 복원을 겨냥하고 있는 듯하다. 시간적으로 그는 자신이 그 신화와 온전히 하나일 수 있었던 어린 시절(월트 디즈니와 헨리 포드 되기를 꿈꾸던 초등학교 시절 그 꿈을 향한 야심찬 첫발을 내디디던 대학 시절)을 찾아간다. 공간적으로 그는 미국의 건국 신화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을 주로 찾는다. 그러한 자신의 여정을 소개하면서 슈미트는 엔두구에게 자신처럼 꿈을 가지라고 점잖게 충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슈미트의 시도는 언제나 부질없는 짓임이 판명된다. 자신의 어린 시절 집은 이제 타이어 가게로 바뀌어 있으며, 그곳에서 그는 희미한 환청(소리를 통한 청각적 플래시백)을 통해서만 그 시절과 조우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모교의 후배들과 자신의 당당했던 시절을 과시해보려 하지만 새까만 후배들의 반응은 썰렁하기만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슈미트가 복원하고자 하는 그 신화의 부질없음을 끊임없이 환기시켜주고 있는 것은 바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소’의 이미지다.

소 이미지로 미국 신화의 공허함 환기

<어바웃 슈미트>에서 소의 이미지는 정확히 네번 등장한다. 먼저 퇴임 축하 파티를 하는 술집 벽에 걸려 있는,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소의 모습을 담고 있는 두개의 사진(그 사진 이미지는 그 파티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걸려 있는 슈미트의 사진과 그가 상무이사로 승진했음을 알려주는 게시판에 실린 그의 사진과 병치를 이룬다). 둘째, 절망감에 무작정 캠핑카를 몰고 도로를 질주하는 그의 뒷모습을 연민하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떼의 모습. 셋째,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옆으로 지나가는 트럭의 창살 사이로 마주친 슬픈 소의 눈망울(그 모습에 마주친 슈미트는 순간 흠칫 놀란다). 마지막으로 그가 들른 박물관 벽화에서 전경화되어 나타나는 쟁기를 끄는 소의 모습.

이러한 반복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 보인다. 자본주의 미국의 시골 출신으로서, 근면 정신 하나로 40년 동안 한 회사(상징적이게도 그 회사의 이름은 우드멘-나무꾼-이다)의 기반을 다져왔고, 검약 정신 하나로 견실한 가정을 이루어왔던 그의 자부심은 그 소들의 이미지와 정확히 겹쳐진다. 그러나 그 소의 이미지는 이제 사진과 그림으로 박제화된 것일 뿐이다. 현실의 소는 이제 오로지 슬픈 체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며 그렇게 서 있을 뿐이다. 자부심으로 복원하고자 했던 신화가 이렇게 서글픈 표정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을 때, 새내기 노인 슈미트의 마지막 각성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엔두구의 그림 답장을 보며 터트리는 슈미트의 감격의 눈물은 미국의 신화에 대한 그 과시적인 현시가 얼마나 공허한 몸짓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알렉산더 페인이 만든 세편의 영화는 모두 자신의 고향인 오마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진정한 영화(판타지)는 자신이 잘 아는 현실 속에서만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견실한 작가적 태도. 그 현실의 이면에 있는 기만과 허위를 직시할 줄 아는 날카로운 시선. 그는 할리우드의 풍요 속의 빈곤을 채워줄 소중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준비 중이라는 그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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