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에필로그
2003년 초 편집실
감독은 적이 당황하고 있다. “이 장면은 너무 어두워. 빼는 게 좋겠어.” 제작진들이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2002년 5월부터 11월까지 힘겨운 촬영을 끝낸 가뿐한 상황임에도 감독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모든 스탭과 배우가 고생했지만, 그중에서도 누구보다 힘들어했던 주연 신하균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장면을 뺀다고 생각하니 감독은 하균 앞에 면목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구? 다음을 봐라.
플래시백- 2002년 여름 강원도의 어느 국도
감독은 병구가 친구인 태식으로부터 무시당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찍고 있다. 태식이 자신의 상처를 건드려 괴로운 병구의 내면이 드러나야 하는 장면이다. 병구가 자신의 뺨을 세게 때리며 트럭을 운전한다는 설정은 이렇게 그의 아픔과 이상심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감독은 생각한다. 근데 왠지 불안하다. 병구 역의 신하균이 수동기어를 어색하게 조작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드디어 감독은 ‘슛!’이라고 외친다. 불안한 기어소리와 함께 트럭이 출발하고 병구가 자신의 뺨을 때리기 시작한다. 어찌나 세게 때리던지 엄청난 엔진 소음 속에서도 ‘짝! 짝! 짝!’ 하는 따귀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이때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대형트럭. ‘악 이러다 사고가 나는 게 아닐까?’ 재수없는 생각을 하는 찰나, 아슬아슬하게 대형트럭을 비켜가는 병구의 트럭.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균은 그치지 않고 ‘짝! 짝! 짝!’ 소리를 낸다. 놀란 가슴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감독이 뺨이 벌겋게 부어오른 하균에게 다가간다.
감독: 얼굴 괜찮아? 아이구 많이 부었네….하균: (눈을 번득거리며) 어땠나요?감독: 좋아, 잘했어!하균: 정말 괜찮으세요? 전 괜찮으니까 맘에 안 드시면 한번 더….감독 : (당황해 고개를 마구 흔들며) 아… 아냐. 딱 좋아. 내가 원하던 대로 나왔어흐뭇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하균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음,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신하균 무서운 놈이다.’
영화의 주무대인 지하공간은 두개의 공간이다. 지하 2층은 병구가 마네킹을 만들며 외계인을 연구하는 작업실이자 연구실. 그리고 1층은 올라가는 사이에 비밀스런 공간인 외계인 고문실이 자리잡는다. 초록과 빨강색의 강렬한 대비로 인물들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다시 2003년 초 편집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목숨 걸고 찍은 장면을 빼내는 감독. ‘미안하다 하균아. 이 장면은 DVD에는 꼭 넣을게.’ 감독은 마음속으로 외친다.
2002년 3월 중순의 어느 날 녹음실
감독은 이제 5개월간의 긴 후반작업까지 거의 마무리짓고 있다. 이동준 음악감독에게 열심히 주문 사항들을 외쳐댄다. 엔딩 크레딧에 나올 병구의 테마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장중한 분위기의 음악이 화면없이 들려오는데 감독의 눈이 붉어진다. 그동안 영화를 만들면서 고생했던 게 떠올라서였는지, 미쳐갈 수밖에 없었던 병구의 슬픔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감독은 생각한다. ‘이게 내 개인적인 느낌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딱 이 정도였으면 좋겠다고. 극장에 불이 켜지고 관객이 영화관을 나갈 때 이런 느낌으로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감상에 빠졌던 감독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장 감독,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감독은 또다시 데뷔작을 놓고 뿌듯함과 설렘, 아쉬움과 불안함이 뒤섞인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촬영현장의 5대 사건외계인들은 말한다 “꾸오아-악떼ㄱ꾹”
첫 번째 사건: 2002년 6월 부산 - 외계어를 창조하다
병구가 강 사장의 외계인 이름을 알고 있다며 소리치는 장면. 감독은 신하균과 함께 외계인 말을 어떻게 소리낼 것인지 궁리 중이다. 비밀이지만… 사실… 감독은 외계인 언어를 모른다! 그래서 일단 시나리오엔 ‘quoaaktekguk’라고 적었는데. 그러니까 소리나는 대로 읽으면 ‘꾸오아-악떼ㄱ꾹’ 정도 될까? ‘아 그게 이렇게 목을 몇번만 상하좌우로 움직여주면 되는데….’ 감독은 마음속으로 이미 완벽한 연기를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이 외계 언어를 모른다는 사실을 스탭들이 알아챌까봐 모른 척 시치미 떼고 고민하는 척한다. 그런데 신하균이 눈의 끔벅거림, 삐죽거리는 입, 목 관절의 놀림까지 완벽하게 감독의 마음을 읽어내며 외계어를 만들어낸다. ‘그래 내가 원했던 게 바로 그거야!’
두 번째 사건: 2002년 7월 부산 - 구를 길거리 캐스팅하다
감독의 마음은 갑갑하다. 병구가 키우는 집 강아지 이름이기도 한 지구의 캐스팅이 좀처럼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미술감독이 촬영장 근처 식당에서 졸고 있는 강아지를 발견했다며 안고 왔다. ‘안기에는 좀 지저분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뚱뚱한 게 멍청해 보이고, 다리도 짧다며, 그리고 결정적으론 너무 더러워서 이가 있을 것 같다면서 반대한다. 하지만 감독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지구도 강아지 세계에서는 뭔가 상처가 있는 존재로 보였으면 좋겠어~. 일단 씻겨놓으면 괜찮을 거야.”
세 번째 사건: 2002년 8월 강원도 모 여관 - 감독, 상태가 나빠지다
벌써 세 번째다. 태풍 말이다. 감독은 화가 치밀어 오른다. 러브호텔 내음이 물씬한 숙소에 독수공방 묶여 있는게 어언 한달째 아닌가. 감독은 음주를 통해 기공을 단련하려 한다. 하지만 공력이 너무 쌓였는지, 신경만 예민해진다. ‘안 되겠다. 오늘은 무슨 수라도 내야지.’ 감독은 30여분을 걸어서 마을로 나온다. ‘뭘 해야 하지?’ 두리번거리는데 미용재료상이 눈에 들어온다. 비닐봉투에서 염색약을 꺼낸 감독은 욕실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정성껏 색을 칠한다. 아주 샛노란 색깔로 머리칼을 물들이니 감독의 마음도 가라앉는다. 완성. 그런데 스탭들의 눈치가 이상하다. 뭐라고 수군거린다.
네 번째 사건: 2002년 9월 강원도 산골 벌집언덕 - 벌떼, 습격하다
왱왱-. 감독은 이제 벌떼가 나오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 그때 감독의 머릿속에서 아픈 상처가 되살아난다. 어릴 적 그는 풀밭에서 놀다가 땅바닥에 뒹구는 벌을 발견하곤 장난을 쳤는데, 벌이 갑자기 독침을 드러내고 그의 다리를 공격한 것이다. ‘교활한 외계인 같은 놈.’ 어쨌건 촬영시간을 맞은 감독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연출부에 외친다. “벌이 너무 힘이 없어. 생생한 놈으로 풀어봐!” 감독은 얼른 보호망을 뒤집어쓴다. 흠흠….
다섯 번째 사건: 2002년 11월 변산반도 해변 - 신하균, 유인원 변신
드디어 마지막 촬영이다. 대역을 써도 된다는데 신하균이 직접 유인원을 하겠다고 나선다. ‘이상하다. 어차피 유인원 탈을 쓰면 얼굴이 안 보일 텐데?’ 아무튼 하균의 열의는 감독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감독은 그 보답으로 이런 결심을 한다. ‘내가 너무 디테일에 집착한다고? 흥! 오늘은 마지막 촬영인데다 털옷을 입고 뼈를 내려치기만 하면 되니 연기도 필요없고. 좋았어. 가볍게 가는 거야.’잠시 뒤. 감독은 어느새 이렇게 말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균아. 눈빛이 조금 더 슬퍼보였음 좋겠어. 손바닥이 5도만 뒤로 젖혀지면 어떨까?” 등등. 그러는 사이 조수간만의 차이가 뚜렷한 서해안 해변은 물이 차 오른다. 스탭들이 웅성거린다. “어 물 들어온다…. 우리도 잠기겠는데. 카메라는 저기 두고 왔는데 어쩌지?” 하지만 감독은 딴 생각을 하고 있다. ‘역시 털이 바람에 나부끼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