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프롤로그- 디카프리오가 영화의 영감을 주다
2000년 어느 봄날 , 감독의 자취방
오늘도 감독은 12시쯤 눈을 떠 졸린 눈을 비비며 늦은 아침을 먹고 멍하게 누워 시체놀이를 즐기고 있다. 1년쯤 공들인 시나리오를 데뷔작으로는 너무 거대한 이야기라는 둥, 엄청난 특수효과와 CG를 소화하기 힘들다는 둥, 갖가지 핑계를 대가며 스스로 엎어버린 뒤 감독은 별반 즐거울 일이 없다. 감독은 거창한 얘기보다는 신인감독에게 맞는 적당한 규모의 이야기를 찾고 있다. ‘영화를 보면 색다른 영감이 떠오를까? 그래 오늘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은 감이 들어!’ 감독은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영화 보러 나간다. 그의 뒷모습이 경쾌하다.
몇 시간 뒤, 돌아오는 버스 안
햇살 따가운 구석자리에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감독. 별 소득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착잡한 표정의 감독은 가판대에서 산 <씨네21>을 펼친다. 이리저리 기사를 뒤적이던 감독의 눈이 한 페이지에 꽂힌다. 기사는 ‘안티 디카프리오’ 사이트를 소개하고 있다. <타이타닉>으로 한창 주가가 올라 있는 디카프리오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만든 이 사이트에는 디카프리오를 토막낸 그림들과 디카프리오가 그 곱상한 외모로 지구의 모든 소녀들의 마음을 홀려 지구정복을 꿈꾸는 외계인이라는 둥, 앞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게 다른 외계인들과의 통신을 위해서라는 둥, 별별 황당한 주장들이 올라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이거야!”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한 청년이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사장을 납치하고, 외계인임을 자백받기 위해 고문하는 상황을 만들어본다. 여기에 감독이 평소 재밌게 본 <미저리>의 구조를 얹어보는 감독. 감독의 머리에서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며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적한 버스 안에서 혼자 미친 듯이 키득거리는 감독. 옆에 앉아 불안한 눈길로 감독을 쳐다보던 아줌마가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옮긴다.
02. 병구 태어나다
강사장/ 다… 당신들 왜 이래? 여기 어디야?
병구/ (눈을 가늘게 뜨며) 가증스러운 놈! 괜히 연극할 필요없어… 다 알고 있으니까.
강사장/ 무… 뭘 안다는 거요?
병구/ (다가서며) 난 다 알아…. 니들이 왜 안드로메다에서 지구까지 왔는지….
니들이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니 원래 이름이 quoaaktekguk라는 것까지!! 다 알아. 다 안다구! (시나리오 중)
2000년 봄, 감독의 방
감독은 주인공을 만들어간다. 나이는 한 27살? 자기의 모든 불행이 다 외계인 때문이라고 생각해. 한마디로 맛이 간 놈이지. 이름은… 이름은 이병구. 이 병(강조)든 지구(강조)를 지키는 영웅이 되고 싶은 놈이야. 그는 인정받고 싶어. 아무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아. 그래서 병구는 지구를 지키려고 해. 자신의 존재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야. 병구는 외로워….병구는 집요한 놈이야.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해왔어. 벌써 5년 동안 외계인을 연구해왔어.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해. “너 외계인이지! 빨리 부는 게 좋을 거야. 다 알고 있으니까. 너희들이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왜 지구에 왔는지 빨리 불란 말야!” 사람들은 고문에 못 이겨서 자기가 외계인임을 인정해. 병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이놈도 외계인이야….” 병구는 그런 놈이야.
어느새 감독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집요하게 밀어붙인다.병구는 약을 먹어. 약을 먹으면 고통을 잊을 수 있으니까. 약을 먹으면 외계인들을 고문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니까. 약을 먹지 않으면 너무 무서워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 병구는 약한 놈이야.
병구에겐 여자친구가 있어. 언제나 병구 옆에서 병구를 지켜주지. 병구를 사랑하니까. 이름은 순이. 자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 그 힘으로 병구를 도와줘.두근두근두근…. 머릿속을 조몰락거려 지구 위의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낸 감독은 창조주의 희열을 느낀다. 그리곤 이상한 생각이 든다. ‘신은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만들었다는데. 혹시 병구와 내가…?’
03. 감독의 어머니 물파스 고문을 만들다
병구/ 조금만 참어. 저놈 신경 시스템만 약화시키면 벗어도 돼.
순이/ 정말? 어떻게?
병구, 순이와 떨어지더니 가죽 케이스에서 물파스를 꺼낸다.
병구/ 이상하게…. 저놈들 유전자 구조는 우리랑 거의 똑같애.
하지만 신경체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그래서 여기 들어 있는 말레인산클로르페니라민이 몸 속에 침투하면, 저놈들 신경전달물질인 트란스크리산테메이크에 협착하게 되고… (중략)… 그럼 저놈은 아무런 힘도 못 쓰게 되는 거야. (시나리오 중)
2000년 여름, 감독의 방
주인공을 창조한 감독은 이제 그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술 취한 강 사장을 순이의 도움으로 무사히 자신의 집 지하실에 납치한 병구. 자 이제 뭘로 강 사장을 고문하지? 고민하는 감독.
이때 어디선가 살며시 콧속을 파고드는 자극적인 냄새. 감독, 시선을 돌리면 감독의 어머니가 물파스를 흔들고 있다. 평소 물파스를 만병통치약처럼 쓰시는 감독의 어머니. 벌레에 물려 가렵다거나 어딘가 멍이 들었다거나 하는 일반적인 용도 이외에도 다양한 신체부위에 발라보며 물파스의 무한한 용도와 효능을 개척하신 분! 감독의 어머니, 오늘은 물파스를 면봉에 적시더니 귀를 후비며 개운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저… 저런!’ 감독의 눈가에 경련이 인다. 어머니의 충격적인 모습과 자극적인 파스 냄새를 피해 방을 뛰쳐나가던 감독, 굳은 듯 멈춰 선다.
휙! 고개를 돌리는 감독, 어머니의 목덜미를 맴돌고 있는 목이 구부러진 하얀 물파스 병을 째려본다. ‘그래 바로 저거야! 우리에겐 그냥 파스지만 외계인들에겐 치명적인 약물이 섞여 있을 수 있어!’ 감독은 컴퓨터 앞으로 달려간다.신 구성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돌아본 순간. 물파스의 탁월한 효능 때문일까?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감독의 어머니. 평생 모든 것을 주시는 어머니. 오늘도 아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셨군요. 어머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