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2]
2003-03-21
글 : 문석
사진 : 이혜정

<모텔 선인장>을 끝낸 직후 그는 봉준호, 김종훈 감독과 함께 <유령>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다. 차승재 대표가 던져준 “잠수함이 나오는 영화다. 일본이 나와야 한다”는 정도의 앙상한 ‘화두’를 놓고 각각 시나리오를 썼고, 이중 장준환의 버전이 채택됐다. 영화의 기본 설정뿐 아니라 자기파괴적인 성격의 캐릭터나 비극적인 결말부까지의 골격은 이때 만들어졌다. “시나리오 초고는 한달 만에 가뿐하게 썼다. 그런데 각색이 힘들었다. 나 혼자 괜히 무거워지면서 한국으로 미사일을 날리는 장면을 생각하고, 그러면서 혼자 감동하고….” <2001 이매진>에서 얼핏 엿보였던 장준환 특유의 비관주의가 스스로를 지배한 탓이었다. 워낙 작업이 더뎌지다보니 두달 동안 달랑 석줄만을 고친 적도 있었다.

어렵사리 <유령> 시나리오를 마친 뒤, 99년 장준환은 몇개의 다리를 건너 캐나다로부터 시나리오 작업 제의를 받는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한국인 제작자가 시나리오 손볼 사람을 찾는다는 전언이었다. 막상 가보니 시나리오가 탐탁지 않았던 그는 ‘베스트 극장 공모용’ 정도로 생각하면서 ‘꿍쳐뒀던’ 이야기 하나를 시나리오에 옮기기 시작했다. 실향민 노인 3명이 LA행 항공기를 탈취해 북한으로 향한다는 내용의 <여우머리>가 그것. <쓰리 아미고>처럼 3명의 캐릭터에게 각각 개성을 부여하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를 엮었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결국 그는 3개월 만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처음엔 물좋고 공기좋은 캐나다에서 편히 쉰다는 생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3개월 동안 벽만 바라보다 온 셈”이었다.

귀국한 뒤 장준환은 차승재 대표의 제안으로 감독 데뷔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만,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시체놀이’와 방바닥을 뒹굴뒹굴 구르는 ‘굼벵이 놀이’를 거듭하면서 <방구맨>의 시나리오를 써나갔지만, 이야기가 점점 거대해지기만 할 뿐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다. “욕심은 나는데, 너무 크고 길어져 감당이 안 되더라. 그래서 저예산영화를 생각하게 됐다.” 그 ‘저예산영화’란 바로 <지구를 지켜라!>다. 하긴, 애초에는 지하실을 주공간 삼아 심리극으로 끌고 간다는 생각이었으니 극저예산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준환 특유의 엉뚱한 상상이 결합되고, 그것이 또 꼬리를 물면서 규모는 만만치 않게 커져갔고 결국 순제작비 33억원짜리 ‘대형영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감독 사는 법 `꿈꾸듯이`

“사람들이 영화나 소설을 보는 것은 작가의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고, 위로도 주고받고 싶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라는 그의 이야기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장준환의 작품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특히 의 주인공 ‘존 레넌’과 <지구를 지켜라!>의 주인공 병구는 더더욱 그와 친화력을 갖고 있다. 물론 장준환 감독이 이들 두 캐릭터처럼 엄청난 망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이로 인해 잔인한 행동을 저지르지는 않겠지만, 타인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내면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이 쌓은 성벽 밖으로 좀처럼 나가려 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탈출구를 몽상 혹은 공상에서 찾는다는 점 등에서 감독과 캐릭터는 근원적인 소통을 이루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절대 영화광은 아니”면서도 “우디 앨런의 모든 영화를 사랑한다”는 그의 말 또한 이해할 수 있을 터. 그리고 한 가지 더.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는 몽상가일지언정 도피자는 아니다. 돈이 없어 어머니를 잃는 등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존 레넌’이나 병구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될 대로 소외됐기 때문에 현실에서 못 디딘 발자국을 몽상 속에서라도 내디디려 한다. 때문에 이들의 몽상은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부딪치며, 적극적으로 세계를 바꾸기 위한 것이다.

이들 캐릭터를 내세운 영화를 만든 장준환 감독이 꿈꾸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가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야 아니겠지만, 적어도 영화가 세상과 부딪쳐 불꽃을 퉁겨주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거대한 풍차를 향해 창을 날리는 돈키호테처럼 말이다. <2001 이매진> 이후 8년 동안의 설렘을 갖게 한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에 기대가 실리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장준환 감독이 되기까지

중딩 때 | <나인 하프 위크>에서 영상의 힘을 느끼다. but 무지갯빛 추억일 뿐.

고딩 때 | <쓰리 아미고>로부터 감동을 받다. but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

대학 4학년 때 | 영화 동아리에 가입. 미래에 대한 불안과 창작본능을 주체 못해.

1994년 | 영화아카데미 11기로 입학. 드디어 영화에 눈을 뜨다.

95년 | 졸업작품 <2001 이매진>으로 잠재성을 인정받다.

95~97년 | 영상원 조교 생활. <방구맨> 프로젝트 구상.

97년 | 박기용 감독의 <모텔 선인장> 연출부로 충무로 입성.

98년 | 봉준호, 김종훈 감독과 함께 <유령> 시나리오 작업.

99년 | 캐나다로부터 시나리오 작업 제의. but 3개월 만에 한국행.

99년 | 감독 데뷔 준비. but 세상사 뜻대로 안 되는 것.

2000년 봄 | <지구를 지켜라!> 영감 떠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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