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장준환과 <지구를 지켜라!> 탄생기 [4]
2003-03-21

04. 당신은 외계인을 믿으십니까?

강사장/ 지구를 처음 발견한 건 칠십오 대조 선왕님이셨어

강사장/ 선왕께서는 이 아름다운 행성을 푸른 행성이라고 불렀지.당시 푸른 행성은 멍청한 파충류들이 지배하고 있었어.(중략)실험대 위에서 아기 공룡을 해부하는 외계인들. (시나리오 중)

2000년 가을, 수서 작업실

다시 찾아온 슬럼프. 시나리오의 진도도 잘 나가지도 않고 컨디션도 좋지 않은 감독은 멍하게 누워 시체놀이를 즐기고 있다. 곧이어 굼벵이놀이로 전환, 뒹굴뒹굴 몸을 굴리던 감독의 눈에 며칠 전 길거리에서 받아서 바닥에 던져놓았던 전단 하나가 눈에 띈다. ‘외계로부터의 xx… 라엘리언 어쩌고저쩌고….’‘음… 저기에 가면 뭔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몇 시간 뒤, 종로 탑골공원 근처

전단지를 든 감독, 종로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다. 한참을 헤매다 허름한 콘크리트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감독은 얼마 전 자료조사차 마네킹 공장을 방문해 눈치없이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경쟁회사의 스파이로 오인받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영화 속에서 병구는 부업으로 마네킹을 만든다).경계의 눈길을 풀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행사장으로 들어서는 감독. 강의실 입구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을 뿐 행사장은 썰렁하다. 감독은 입구 탁자에 놓인 1천원짜리 팸플릿과 엽서 몇장을 산다. 불순한 의도로 이곳에 온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감독의 전략이다. 엽서에는 고대 불상 벽화에 그려져 있는 비행접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런 걸 보면 정말 외계인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외계인으로 오인된 강 사장을 감금하는 지하실, 외계인과 UFO 그림 스케치, 병구 지하실에 수집해놓은 각종 기괴한 표본들. 모든 아이디어를 꼼꼼히 스케치했다.

사실 감독은 외계인의 존재엔 별 관심이 없다.잠시 뒤 사회자가 나와서 이러저러한 인사를 하고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틀어준다. 카메라에 잡힌 각종 비행접시의 사진들, 영국 밀밭에 그려진 미스터리 서클들, 로즈웰 사건에 대한 설명과 외계인 해부장면 등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각종 자료들이 보여진다. ‘음… 그럴듯한걸….’ 감독은 아무래도 외계인이 정말 존재할 것 같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다음 테이프를 트는 사회자. 외계인을 만나서 영적 능력을 얻었다는 한 프랑스 남자가 소개되고 그는 아직도 외계인과 텔레파시로 교류하고 있으며 외계인들은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잘 나가다가 저런 황당한 이야기를….’ 감독의 뺨에 흐르는 한 줄기 땀방울.다시 사회자가 나오더니 세례의식을 진행한다. 영적 능력을 가진 사회자가 물을 찍어 이마에 바르면 자신의 유전자 정보가 외계인들의 컴퓨터에 등록되고 나중에 말세가 와도 복제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쭈뼛거리던 사람들 중 몇몇이 교단 위로 올라가 세례를 받는다. 이마에 물을 찍어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외계인의 컴퓨터에 등록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독은 생각한다. ‘아 세상엔 병구처럼 외로운 사람들이 많구나….’

칼바람 맞으며 열연한 신하균의 유인원 연기, 지구를 지키려는 병구와 졸지에 외계인으로 지목된 강 사장이 마지막 대결을 펼치는 연구실 장면 등 <지구를 지켜라!>는 영화 제목만큼이나 촬영현장도 기발하고 신났다.

05. 초저예산영화의 꿈, 무참히 밟히다

“강원도 태백산 위에 만든 병구네 집 세트에만 한 2억 정도요. 전체적으로 미술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죠. 그런 디테일이 굉장히 중요하고, 감독님이 집요하게 원하시기도 하고, 장근영 미술감독도 그렇고….” (김선아 프로듀서와의 인터뷰 중)

2000년 가을, 감독의 방

시체놀이와 굼벵이놀이 속에서 데뷔작의 밑그림을 꽤 꼼꼼히 그린 감독은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래 지하실 세트하고 몇몇 로케이션만 오가며 찍는 저예산영화야! 데뷔작품으로 완벽해!’바로 그 순간, 감독은 희미한 불안감을 느낀다. 어린 시절부터 취향과 감성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그리 공유할 것이 없었다는 뼈아픈 과거사를 떠올린 그는 제3자의 눈을 통해 이 프로젝트를 검증하고 싶어진다.

2000년 가을 어느 카페

감독은 봉모 감독을 비롯한 몇몇의 영화아카데미 동기생 친구들에게 트리트먼트를 보여준다. 꿀꺽. 친구들이 돌려 읽는 동안, 감독은 손바닥엔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훌륭해!”, “엄청난걸!”, “대박이구먼!”, “그런 의미에서 한잔 사!” 등등의 찬사가 쏟아진다. 이들의 추임새를 사실로 받아들이곤, 벌어지는 코와 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입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애쓰는 감독. 그의 가슴이 벅차오르며,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혹시 난 천재가 아닐까? 나도 내 재능이 무서워….’

2001년의 어느 날 싸이더스 사무실

감독은 친구이자 이 프로젝트의 프로듀서를 맡기로 한 김선아씨와 마주하고 있다.

감독: 어때? (재밌고, 의미심장하고, 위대하지?)소심한 감독은 짧게 물어본다.김 PD: 음….어색한 침묵에 자신감이 떨어진 감독은 영화의 미덕을 애써 강조하려 한다.감독: 그래도 예산이 아주 적게 드니까 괜찮겠지?김 PD: 글쎄, 아무리 줄여봐도 한 30억 정도 들 것 같은데….‘헉! 사사삼십….’ 감독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태연한 척해야 한다. 감독이란 모름지기 그런 것이다.감독: 응… 그래…. 생각한 거보다 ‘좀’ 드네….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첨엔 저예산영화로 생각한 거였는데….김 PD: 콘티를 봐라, 콘티를. 이렇게 특수효과가 많고, CG도 장난 아니고, 촬영도 이렇게 많은데 이 정도도 선방한 거야.감독은 방을 나가며 생각한다. ‘그래 크게 한번 놀아보는 거야. 까짓 거 30억이 별건가? 잘 만들어서 한 1천만명만 들게 만들면 되지 뭐!’ 불끈 움켜쥔 감독의 손.

몇 시간 뒤 잠잘 시간, 불 꺼진 감독의 방

말똥말똥. 감독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음… 그래도 30억이면 좀 부담이 되기는 해…. 관객이 적어도 120만 정도는 들어야 되는 거 아닌가? 거기다 홍보비까지 포함하면…. 아~ 첨엔 이런 게 아니었는데….’ 방금 전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감독은 불면의 밤 속을 헤맨다.

글: 장준환/ <지구를 지켜라!>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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