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레전드 오브 리타>에 남다른 울림이 느껴지는 이유
2003-04-17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슬픈 신념의 흔적

<레전드 오브 리타>는 슬픈 영화다. 서독의 적군파(RAF: Rote Arme Fraktion) 테러리스트의 일원이었던 리타 폭트의 삶과 사랑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 그 저변에 운명적인 비극성의 정조가 흐르고 있음은 필연적이다. 특히 그 비극성이 독일 분단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 같은 분단 경험을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 남다른 울림을 갖는다. 그러나 감독은 그 비극을 낭만화시키지 않는다. 굴곡 많은 리타의 운명을 그리는 감독의 문체는 건조하고 냉정한 관찰자의 그것이다. 70년대부터 80년대(정확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89년까지)에 이르는 20년에 걸친 서사적 시간은 간결하게 압축되어 있다(이 영화에서 시간은 그 흔한 시간 자막도 없이 여러 번 ‘점프’한다). 영화의 행간을 읽기 위해 독일과 독일영화의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이하, ‘적군파’와 ‘뉴 저먼 시네마’를 중심으로 한 독일과 독일영화의 역사에 대한 내용들은, <세계영화사 강의>(연세대 출판부 펴냄, 2001)에 실린 이상면씨의 ‘뉴 저먼 시네마’를 참조하여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그 글을 영화감상 전후로 함께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어찌 보면, <레전드 오브 리타>를 통해 이루어진 서독의 적군파 행동대원 리타와 뉴 저먼 시네마의 일원이었던 감독의 만남은, 운명적인 것일 수도 있다. 적군파와 뉴 저먼 시네마, 그 둘은 모두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던 서독사회의 민주적, 진보적 흐름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1962년 2월 ‘오버하우젠 선언’을 통해 당당하게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고 외치며 첫발을 내디뎠던 뉴 저먼 시네마. 그것의 전성기는 ‘68운동’의 물결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제2세대’를 통해 열렸다. 70년대 그들의 영화는 “당대 문제들의 토론장”으로서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68년,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네이팜탄 폭격에 반대하는 정치적 행위의 일환으로 백화점에 수제 폭탄을 터뜨리며 활동을 시작한 서독 적군파. 그들은 자신들의 무모한 극좌적 노선과 70년대 중반 이후 진행된 서독사회의 재보수화로 인해 짧은 ‘전성기’를 마감한다. 78년, 일개 ‘범죄집단’으로 변질된 그들은, 좁혀지는 수사망과 조직원간의 내분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붕괴되며, 정치적 고아가 된 조직원들의 일부는 동독으로 망명한다. 뉴 저먼 시네마를 이끌던 중심적인 감독들의 대부분은, 80년대 초반 이후 서독 시민들의 탈정치화 경향 속에서 자신들의 영화를 수용해주던 지식층 관객을 잃고, 오랜 정치적, 영화적 방황을 한다. 폴커 슐뢴도르프는 이 영화에서 테러리스트 리타의 삶과 사랑을 통해 오늘의 통일독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뉴 저먼 시네마가 견지했던 정신의 정수가 늘 ‘과거와 현재에 동시에 말을 거는’ 그 치열함에 있었다고 한다면, 이 영화에는 뉴 저먼 시네마의 기나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레전드 오브 리타>의 각본을 쓴 볼프강 콜하세는 구동독 출신이고, 감독 폴커 슐뢴도르프는 구서독 출신이다. 1990년 독일의 한 신문에 실린 ‘서독 테러리스트들이 동독에 잡혀 있다는 기사’로부터 시작된 이 이야기 속에서, 콜하세는 서독 테러리스트들의 구체적 ‘활동’에, 슐뢴도르프는 동독 사람들의 ‘일상’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영화를 통해 50회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한 두 여배우는 각각 서독(리타 폭트를 연기한 비비아나 베글라우)과 동독(타탸나를 연기한 나쟈 울) 출신이다. 구서독과 동독 영화인들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출발부터 통일독일의 현재에 대한 질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영화는 리타 일행의 은행 강도(‘돈의 국유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감독·작가는 출발부터 주인공 리타의 정치적 신념에 뚜렷한 윤곽을 부여하지 않는다(테러리스트로서의 그녀를 상징하는 기표인 ‘왼쪽 팔꿈치의 흉터’는 끝내 화면 속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애인 앤디에 대한 사랑 때문에 테러리스트의 길에 들어섰다는 그녀의 정치적 신념은, 체포된 앤디의 탈출을 돕겠다고 나선 친구 프리드리카의 그것과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는다. 위험을 경고하는 리타에게 프리드리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승마, 테니스, 고급 요리를 싫어하거든…. 세상의 아름다움을 누리려면 불행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해”. 그러나 앤디의 탈출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 살인으로 인해, 그 낭만적 순수성은 설자리를 잃는다. 리타의 내레이션과 함께 그려지는 그들의 70년대 운명은, 늘 자신의 의도를 거스르며 파국으로 치닫는 ‘철부지 낭만주의자’들의 그것이었다. 동독 비밀경찰의 70대 고위 간부는 그들의 행위를 용인할 수 없는 극좌 모험주의라고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꿈과 낭만성에 공감을 표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것을 승인한다. 동독 사회주의의 관료화 속에서 아직도 “진정한 꿈”을 지니고 싶어하는 그 노혁명가의 양가적 감정에는, 어쩌면 감독/작가가 70년대의 ‘그들’에게 보내는 이중적 시선이 투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과 신념이 하나일 수 있었던 리타의 ‘전성기’는, 애인 앤디의 배신으로 끝난다. 그녀는 그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선택을 한다. 레바논에서 제3세계 혁명에 참여하기로 한 동료들과 결별하여 동독 잔류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후 그녀는 동독에서, 날염공장 노동자와 여름캠프 관리교사로서 두개의 ‘전설’적인(‘전설’은 동독 비밀경찰이 신분 위장을 가리키는 은어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제목이 legend가 아니라 legends인 이유이다)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신분 위장을 통해서 가능해진 리타의 두번에 걸친 새로운 삶과 사랑은, 또한 그것으로 인해 모두 좌절된다. 감독/작가의 담담하고 냉정한 연출과 수사법으로 전해지는 그 ‘전설’은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그런데 감독/작가의 그 객관적 시선은, 전설의 비극성을 주조해내는 것보다 서독인과 동독인의 만남에서 빚어지는 일상의 작은 충돌들을 그려내는 데 더 맞추어져 있는 데서 비롯된 듯하다. 특히 타탸나와의 만남이 그러하다.

날염공장 노동자 슈미트가 된 리타는 자명종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아직도 어둠에 묻혀 있는 새벽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새 생활을 시작한다. 그 새벽 출근장면은 더할 나위 없이 신산스러워 보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리타의 되찾은 ‘일상’과 새로운 정치적 ‘희망’에 대한 설렘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이어지는, 술과 수면 부족 탓에 지친 표정으로 힘들게 일하고 있는 타탸나의 얼굴 클로즈업. 서독을 버리고 동독을 택한 리타와 동독에서의 힘든 삶을 벗어나 서독행을 꿈꾸는 타탸나의 갈등과 애정에 대한 세밀한 묘사에는, 감독/작가의 분단된 양 독일과 통일독일에 대한 진지한 정치적 질문이 배어 있다. 니카라과에 보낼 성금으로 10마르크를 선뜻 내놓는 리타의 순진성을 비웃고, “서독 것들은 술 한병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몰라!”라고 분노를 터뜨리던 타탸나는, 리타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이후, “넌 중요한 사람이야. 우리 같은 것하고는 달라”라고 외치며 그녀를 감싸안는다. 리타와의 관계 때문에 감금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위기에 빠진 리타를 변호하기 위해 애쓰는 타탸나는, 갈 곳 없어진 리타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찾아가야 할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이고 안식처였을 것이다.

영화의 비극적인 마지막 결말은 우리의 영화 <이중간첩>과 많이 닮아 있다. 그러나 <이중간첩>에서의 그것이 지상에 더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 분단 한반도의 이중간첩의 숙명적 운명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피해 있던 림병호는 발견되어 처단당한다)이라면, <레전드 오브 리타>의 그것은 리타의 마지막 결단(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목숨을 걸고 타탸나가 있는 동독으로 향한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감독/작가가 ‘그녀들’의 삶에 보내는 애정어린 헌사일 것이다(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잉게 비트를 비롯한, 실제로 리타와 같은 삶의 경로를 거쳤던 많은 인물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영화의 결말과는 달리 서독으로 보내져 수감되었다).

리타가 독일의 직장 동료들에게 마지막으로 던지는 말(“(통일이 되면) 너희들은 리바이스 청바지를 쉽게 살 수는 있겠지…. 이건(독일의 사회주의) 실험이었어, 어리석어서 망쳐버렸지만….”)은 그대로 감독/작가가 통일독일에 던지는 질문일 것이고, 어쩌면 많은 독일인들(특히 구동독인들)의 내면 속에서 여전히 웅성거리고 있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슐뢴도르프 감독의 70년대 뉴 저먼 시네마 전성기 영화들에는 강렬한 비판의식과 화려한 수사법이 있었다. 자신의 출세작인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1975)에는 적군파의 테러를 정치적 입지의 확대 계기로 삼고자 광분하던 보수세력(경찰과 언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양철북>(1979))에는, 그 상징적이고 우의적인 수사법에도 불구하고, 과거 나치를 추종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직설적이고 치열한 풍자와 비판이 담겨 있었다. 그에 비하면, <레전드 오브 리타>에 담긴 감독의 정치적 발언은 주장이라기보다는 냉정하고 성찰적인 질문에 더 가까워 보이며, 그 화법은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독일사회에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한 언론은 “말도 안 되는 범죄드라마”라고 혹평했다고 한다. 우리는 어느덧 전세계적으로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반전시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명분’이 ‘힘의 논리’와 ‘실리적 계산’ 앞에서 무력해지는 시대. 이 시대에 되돌아본 그들의 비극은 그래서 그만큼 더 비극적으로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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