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경찰이란 직업은 그 자체로 흥미롭지,<와일드카드>
2003-05-13
글 : 김현정 (객원기자)
■ Story

방제수(양동근)는 강력반 형사다. 관내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선배 오영달(정진영) 형사와 함께 범인을 뒤쫓기 시작한다. 4인조로 행동하는 범인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둔기로 때려 살해하고 금품을 빼앗는 일명 ‘퍽치기’ 일당. 단서도 없고 목격자도 없는 범인들을 찾기 위해 오영달은 퍽치기 전과가 있는 범죄자들에게 주변을 수색하라는 수배령을 내린다. 지루한 잠복근무와 탐문수사가 계속되던 어느 날, 범인으로 추정되는, 묵직한 쇠구슬을 가진 네명의 사내에게 강간당한 여자가 나타난다. 여자의 증언으로 완성된 몽타주를 들고 형사들은 범인을 잡으러 나선다.

■ Review

“난 대한민국 형사다. 난 한번도 저놈들보다 앞서 달려본 적이 없다. 하나 뛰어봤자다.” 티셔츠에 달린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운동화 끈을 바짝 조이고, ‘분명 차두리보다 빠른’ 범인을 쫓아가는 형사. 파트너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범인을 몰아가는 형사 방제수는 좋아하는 여자 뒤를 따라가다가도 소매치기가 눈에 띄면 곧바로 몸을 던지는 청년이다. 그 파트너 오영달 형사와 “출근할 때 한놈 잡고 퇴근할 때 두놈 잡던” 전설적인 형사반장, 비닐봉지에 든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잠복하는 동료 형사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은 속옷도 갈아입지 못하면서 일하지만, 그런 노고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진짜 깡패가 헷갈려 할 정도로 깡패 같고 조폭 같다. 그러나 <와일드카드>는 여기저기에서 욕을 먹고, 사람들이 험악하다면서 피해다니는 형사들에게 한번쯤 받아보고 싶었을 법한 질문을 던진다.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 당신들은 무엇을 하느냐고.

<와일드카드>의 김유진 감독은 퍽치기와 형사들의 일상, 두 가지를 기둥으로 세워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양쪽 모두 한국영화가 좀처럼 다루지 않았던 소재다. 그 미지의 영역에 뛰어들기 위해, 김유진 감독은 <약속>의 이만희 작가와 다시 한번 손을 잡았다. 여러 형사를 취재하고 이야기를 덧붙여 두 남자가 완성한 시나리오는 자칫 하나가 다른 하나를 먹어치울 수도 있었을 두 줄기를 소박하지만 단단하게 결합했다. <와일드카드>가 보여주는 형사들의 사생활은 얌전하게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끈끈하다. 그들은 생일을 맞은 형사반장을 위해 깜짝파티를 준비하고, 아내가 “국경일에만 한다”고 불평하면서 ‘국경일 반장’이라는 별명을 주었다고 킥킥거린다. 아이가 잠들어버려서 손으로 뼘을 재 훌쩍 자랐을 키를 가늠하는 오영달, 칼에 찔렸던 기억 때문에 중학생들도 칼만 들었다 하면 무조건 잡아들이는 장칠순, 마음에 둔 여자 앞에서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라는 말만 스무번 넘게 되풀이하는 방제수. 그들은 세상의 흉악한 얼굴과 부딪치면서 살지만, 상처가 있고 인정이 있다.

<와일드카드>는 형사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달라고 말하는 영화다. 그러나 그런 호소만 되풀이한다면 인간미 넘치는 TV 다큐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와일드카드>는 세밀한 일상을 밑바탕에 깔면서도 퍽치기 일당을 뒤쫓는 형사영화의 재미를 잃지 않는다. 감독과 작가는 퍽치기를 묘사하는 부분 역시 현실에서 원료를 찾아냈다. 성경책을 돈가방으로 착각한 퍽치기 일당이 새벽예배 보러가는 노인을 살해하는 일화나 “퍽치기가 강간보다 악랄하다”는 장칠순의 투덜거림은 모두 취재과정에서 얻어낸 조각들이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보기 드물게 선명하다. “느닷없이 당하기 때문에 정말 무서운 범죄”라고 퍽치기에 주목한 까닭을 설명한 김유진 감독은 섣부른 사회비판을 시도하지 않는다. 동정할 가치도 없는 범죄자들이 있고, 그들을 추적하는 형사들이 있다. <와일드카드>는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방제수처럼 열심히 뛰어갈 뿐이다. 오랫동안 기술을 연마해온 중견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데는 신이 내린 재능 못지않게 탄탄한 기본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형사들과 범인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인 <와일드카드>는 배우들을 배치하는 솜씨 역시 뛰어나다. 다소 경직돼 보였던 정진영은 <백만송이 장미>를 백만번쯤은 열창하는 소탈한 형사로 새로운 자리를 찾았고, 양동근은 박자가 어긋나는 듯한 특유의 리듬으로 혈기 넘치는 방제수를 연기했다. 안마시술소 사장 도상춘으로 출연한 이도경은 툭툭 내뱉는 유머가 끊이지 않는 이 영화에서 동분서주하는 코미디를 선보였다.

:: 김유진 감독 인터뷰

“경찰이란 직업은 그 자체만으로 흥미롭다”

김유진 감독은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등을 연출한 중견감독이다. <약속>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그는 신작 <와일드카드>에서 강력반 형사들의 일상을 따뜻하게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 오랜만에 만든 영화다. 느낌이 어떤가.

지금은 만족스럽다. 감독이란 사람들은 다 똑같아서, 자기들이 영화 잘 만든 줄 안다. (웃음) 몇년 지나봐야 창피한 구석이 보일 것이다.

- 강력반 형사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는지.

어디선가 고등학생들이 조폭이 되고 싶어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요즘 조폭영화가 워낙 많아서가 아닐까?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폭 세계와 친하다보니 (웃음), 그 반대편에 서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경찰이란 직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가 있기 때문에 관객도 좋아할 것 같았다.

- 형사들의 캐릭터가 잘 살아 있다.

형사인지 깡패인지 구분하기 힘들 때도 있는데. 형사하고 깡패는 하는 일만 다를 뿐이지 정말 비슷하다. 한 발자국 이쪽으로 가면 깡패가 되는 거고, 조금만 다른 쪽으로 가면 형사가 되는 거고. 첫 부분에 깡패들이 형사들을 보고 새로운 조직인 줄 아는 장면이 있는데, 그렇게 형사인지 깡패인지 착각하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다 사람이니까. 딱 하나 취재하면서 형사들이 영화에 넣어달라고 부탁한 게 있는데, 그건 그대로 살렸다. 어린아이들 잡아다 범죄자로 만드는 형사는 나쁜 놈이니까 꼭 영화에 넣어달라고 하더라. 그게 장칠순이다.

- 퍽치기 두목인 노재봉은 캐릭터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것 같다.

노재봉에게 이야기를 붙일 시간이 없어서, 그냥 단순하게 나쁜 놈, 이렇게 가기로 했다. 이야기를 붙여보려니까 영화가 2시간40분으로 늘어날 것 같았는데, 그럴 순 없었다.

- <와일드카드>는 형사영화지만 군데군데 코믹한 부분이 많다. 시나리오와는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시나리오에 숨어 있는 디테일을 끌어내는 게 감독의 몫이다. 가만히 보면 관객이 웃는 부분은 다 시나리오에 배치돼 있었던 것들이다. 안마시술소 사장인 도상춘도 관객이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인물이다. 배우를 잘 만나서 훨씬 재미있어지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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