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도그빌>의 선물의 경제와 심판의 윤리를 넘어서
2003-08-13
글 : 정승훈 (영화평론가)

(영화 보시고 읽는 게 좋겠습니다.)

표독하고도 능글맞게 생긴 라스 폰 트리에의 ‘착한 여자 괴롭히기’는 이러나저러나 문제적이다. 실컷 당하던 그녀가 맘껏 갈겨대는 <도그빌>은 트리에 수난극의 터닝포인트를 찍는데, 그 ‘깨는’ 유턴이 마냥 카타르시스로 질주하는 건 아니다. 너무 극단적인 해답은 정답이 아닌 것 같기에. 게다가 노골적인 반미 알레고리는 정의의 심판을 자처하던 미국적 파시즘을 복사한 혐의도 받는다. 그래서 오히려 그레이스가 미국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런 논란에 대해 트리에는 내레이터의 입을 빌려 입을 다문다. “그녀가 도그빌을 떠난 건지 도그빌이 그녀를 떠난 건지는 대답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 침묵에서 양자택일의 전제를 벗어날 여지를 읽을 순 없을까? 뻔한 교훈극의 빈약한 사상으로 폄하될 표면적 의미망 아래에는 이분법 너머를 엿보게 하는 매우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종교철학과 정치미학의 가능성이 맥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소 오버해서라도 청진기를 대보자.

모두가 노예

<도그빌>의 키워드 중 하나는 톰이 강박처럼 되뇌는 ‘선물’(gift)이다. ‘수용’의 미덕을 설파하기 위한 ‘실례’ 즉 선물을 갈구하던 그는 ‘그레이스’라는 선물을 받고선 신의 관대한 ‘은총’에 감사한다. 이때 선물은 신성한 대상처럼 무상으로 주어지지만, 사람들간에 오고갈 땐 교환가치도 띠게 된다. 그레이스를 수용하기로 한 사람들은 선행의 대가로 시혜자의 ‘우쭐함’을 얻게 되며, 그녀는 이에 대한 답례거리를 찾게 된다. 고로 선물은 관대함에서 우러나온 자발성을 띠면서도, 주기-받기-답례의 의무를 규칙화한 교환체계에 속한다. 그것은 자유롭고 공평한 것 같지만 강제적이고 타산적이며, 비경제적이면서도 이기적인 경제이다. 물론 선물하는 자의 우월감이 악덕은 아니며, 자본주의를 대안적으로 보충하는 기부문화도 거기서 비롯된 면이 있다. 하지만 “속임수를 쓰라”거나 “당신이 속았다”는 귀띔은 극도로 경직된 선물의 경제, 이해타산의 보이지 않는 벽이 도그빌의 텅 빈 무대를 구획하고 있다는 언질과 다름없다. 흉한 인형들에 빗대며 사람들의 단점만 소개하는 톰은 겉으론 ‘사랑하는’ 마을이 속으론 ‘썩었음’을 척만큼 잘 알고 있다.

이런 도그빌에 대해, 그레이스는 “필요없지만 하면 더 좋은 일”을 함으로써 잉여가치의 자발적 창출이 선물 고유의 미덕임을 일깨워준다. 보답의 일환이지만 ‘+α’의 진심이 담긴 그녀의 선물은 구즈베리 덤불을 미화할 뿐 아니라 톰에게 사랑을, 척에게 미소를 되살려주며 “도그빌을 살 만하게 만든”다. 참된 선물은 교환체계에 속하면서도 체계 바깥에서 체계를 움직이는 윤활유인 셈이다. 마을에서의 2주 뒤 그녀에게 쏟아진 선물들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답례로 비대칭적 호혜성을 키워가는 선물의 경제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잭의 고독을 보충해주는 수준을 넘어 장님 잭의 눈을 대리하게 될 무렵부터, 그녀의 노동은 잉여에서 필수로 옮아가고 무형적 진심은 계량적 보수로 환산되며 비대칭적 선물은 대칭적 교환체계에 종속된다. 더불어 그녀를 신고하는 것은 사적으로 보상금에, 공적으로 법적 의무 준수에 대응하는 가장 확실한 교환체계처럼 나타난다. 그녀는 더이상 선물이 선물다울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률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노예가 된다.

그레이스로 인한 위험부담 증가로 마을은 노동강화와 임금삭감이라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처방전을 들이민다. 이제 거래 주체간에 인격적 질적 관계를 맺어주던 선물교환은 거래 대상간 객관적 양적 관계만 엮어주는 상품경제로 완전히 대체된다. 대상화된 그녀는 감시와 처벌 속의 노동상품일 뿐 아니라, 밀고의 협박 아래 남자들의 노리개가 되는 육체상품으로도 전락한다. 창녀를 즐길 권리의 인정은 그녀를 창녀로 만드는 반인권적 답례로 보상받는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건데, 여기에 화룡점정의 배신을 때리는 톰은 그것이 얼마나 ‘맛간’ 것인지를 저열하게 보여준다. 사랑과 성욕, 지성과 명예욕이 뒤엉킨 건 그렇다쳐도, 이중성이 꼬집혔다고 그녀를 앞날의 위협으로 여겨 제거하려는 잔머리 굴림은 ‘이놈이 가장 나쁜 놈’이란 결론을 주기에 충분하다. 죽기 직전까지 ‘교훈’과 ‘실례’를 떠드는 위선적 지식인의 비겁한 기회주의는 신의 선물을 가장 자의적으로 전락시킨 교훈적 실례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개 같은 남정네들이 그레이스를 착취할 때 공적 체제의 안전보험을 위해선 사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는 지점이다. 개인의 죄책감을 집단에 전가하여 면죄부를 얻어내는 이 알량한 술수 밑에는 모종의 주인-노예 변증법이 깔려 있다. 선량한 아저씨들이 “암소와 수음”해대는 마초로 돌변할 때, 그들은 미모의 창녀를 붙잡아두려는, 그 상품성을 물신숭배하는 어쩔 수 없는 고객이 된다. 그녀는 남자가 취하는 노예이자 취하도록 허락하는 주인이며, 주인의 자격으로 노예들의 나약한 탐욕을 ‘용서’해준다. 안 해도 될 일들을 가중해서 수행함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체제가 형성된 사정도 이와 같다. 그레이스의 나태를 꾸짖는 여자들은 노예를 부리는 주인인 동시에, 바로 그 노예의 노동없이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된 노예의 노예들이다. 그레이스를 부려먹는 건 그들이 사디스트나 수전노라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그 안의 인간 모두를 제어할 수 없는 가속도로 욕망과 노동의 교환체계에 종속시킨 탓이다.

당신은 어떤 체제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레이스와 도그빌, 양쪽 모두 주인-노예의 양가성을 띤다는 점은 누가 누구를 떠났는지 모른다는 결론과도 연결된다. 영화는 자본주의 비판인 동시에 대안없는 심판의 정당성을 심문하고, 그레이스의 ‘오만과 편견’을 꼬집다가도 아버지 방식의 오만함을 회의하게 한다. 엔딩 크래딧을 수놓는 미국의 타자들은 그레이스라는 이름의 니콜 키드먼을 공유한 <디 아더스>의 윤리학과도 겹친다. 자신의 타자성을 깨닫고 타자에게 겨눈 총을 거두던 그레이스는 이제 자신을 타자로 이지메하는 집단 주체에 은총 대신 총질을 가한다. 타자의 수용으로 건설된 미국이 갈수록 자신의 기원을 배반하는 데 대한 항의겠다. 개인/집단의 괴리나 집단 권력의 악용은 최근 정세를 통한 트리에의 입장 선회를 뚜렷이 시사해준다. 무엇보다 톰이 대변하는 청교도적 도덕률과 금욕주의는 그 배면의 위선이나 욕망과 더불어 미국식 자본주의의 뿌리와 내통한다. 하지만 섣부른 미국 대입은 두 가지 문제와 마주친다. 심판관의 권위는 어디서 오며, 영화 속 미국은 실재와 얼마나 부합하는가? 트리에가 기댄 유럽정신은 미국주의의 선배일 뿐이며, 사진 찍으러 미국에 가진 않을 듯한 그의 추상적 반미가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현실의 다층성을 투과한 건 아니다. 그레이스가 미국식 논리를 보여준다는 간편한 뒤집기도 사정은 똑같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이분법적인 윤리 판단은 타협없는 찬반토론에 그칠 우려가 크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심판과 선물이 대두된 종교적 맥락에 대한 철학적 접속이 필요하다. 예수의 모성적 용서(신약)에서 모세의 부성적 응징(구약)으로 이행한 그레이스는 신약에 기반하고도 이를 왜곡한, 미국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보편체제를 심문하기 때문이다. 고루한 이웃사랑을 떠들며 예수 흉내내는 위선적 기독교인이 버티고 선 그 체제는 선물을 타락시킬 수밖에 없다. 한데 진짜 선물은 선물로 인식될 수도 없는 대가없는 선물이다. 인식되는 그 순간 감사나 의무 같은 감정이 교환되는 탓이다. 인식 불가능한 선물은 그레이스의 ‘+α’처럼 체제 바깥의 잉여로서 체제를 순환시키는 기반인데, 그녀의 선행이 이내 체제화된 것과 달리 진정한 잉여는 결코 가두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적 사유와 언어를 모두 능가하는, 인간은 그 위에서 그것을 통제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 바탕에 가깝다.

결코 직접 체험되기 어려운 그 바탕을 <도그빌>은 학살 뒤 분필 흔적조차 사라진 공백의 무대로 보여준다. 주차장 같던 경계선들이 인간적 탐욕을 각축하던 체제의 바깥은 말 그대로 체제의 바탕이었던 셈이다. 이를 선물이라 하는 것은 진짜 선물이 체제적으로 포착될 수 없다는 선물의 아포리아를 빗댄 표현이겠다. 그리고 바로 이 무규정적 선물에서 존재가 주어진다(es ‘gibt’ Sein). 존재는 곧 선물의 선물, 증여의 사태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대가로 존재하는가는 난센스다. 그레이스가 하늘의 선물이고 “모세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듯, 존재는 기적처럼 선물로 주어진다. 텅 빈 무대, 오직 DOG의 문자 위로 사슬을 풀고 하늘로 도약하는 그 개는 하늘로부터 율법을 선물받은 선지자의 이름을 하고 있다. 존재의 선물성을 훼손한 개 같은 인간들 대신 체제 바깥의 온전한 선물만이 구원받는다. 그 존재-선물은 신의 시점숏, 곧 관객을 향해 당신은 어떤 체제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느냐고 짖어댄다.

효과적인 정치미학

<도그빌>은 결국 트리에의 전작들을 배반하지 않는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영적 육체성, <백치들>이 게워내는 고요한 광기, <어둠 속의 댄서>가 빚어낸 판타지는 모두 선악의 피안, 체제의 너머를 겨냥하는 것이었다. <도그빌>은 용서의 선물이 유지시켜준 체제를 바탕째로 드러내면서 역설적으로 체제 바깥이 어떻게 선물을 선사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이 아낌없이 주다가 남김없이 죽인 까닭 아닐까? 연극적 스타일은 앙상한 철학에 복무하는 실험적 장난이 아니라 충분히 효과적인 정치미학이다. 자코메티 조각상처럼 뼈만 추린 듯한 미니멀리즘은 모든 걸 들어내면서 진짜 봐야 할 것들, 존재의 바탕과 존재자들의 체제 자체를 보게 한다. 브레히트식 장치들과 트리에 특유의 클로즈업은 신의 조망과 인간 내면의 시추를 모두 끌어내는 연출로 손색없다. 그 신이 오만하다고? 이때의 신은 무신론자조차 기꺼이 쓰고 볼 수 있는 가면이자 거울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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