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모> 열풍에 이은 <스캔들> 흥행, 젊은 사극이 대중 사로잡은 까닭은?
사극이 대중을 사로잡고 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하 <스캔들>)가 개봉 2주 만에 전국 200만 관객을 동원하고 <황산벌>이 <스캔들> 못지않은 예매스코어를 보여주면서 사극은 갑자기 한국영화의 새로운 주류로 부상했다. 눈길을 TV드라마로 돌리면 사태는 더 분명해진다. <다모>로 말미암은 폐인 열병이 수백만 젊은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니 이번엔 <대장금>이라는 아리송한 제목의 사극이 방송 4주 만에 주간시청률 1위로 떠올랐다. “내가 너에게 무엇이더냐?”, “통하였느냐?” 같은 고풍스런 문어체 말투가 유행어가 되는가 하면 한복과 궁중음식에 대한 관심도 전에 없이 뜨겁다. 대체 사극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갑자기 옛것이 첨단 기술과 최신 유행을 마다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고 있는 것인가?
현재 대다수 언론이 사극 열풍의 진원지로 꼽는 것은 <다모>다. 시청률 30%를 넘기지 못했지만 <다모>는 방송사 홈페이지 게시판에 오른 글만 100만건(<올인>과 <옥탑방 고양이>는 각각 6만7천여건, 3만4천여건에 불과했다)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다모폐인’이라는 독특한 팬덤문화를 만들었다. 20만명이 넘는 다음의 다모카페 회원들은 ‘한성좌포청 신보’ 같은 신문을 만들어 <다모>와 관련된 흥미로운 뉴스를 공급하고 그들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다모> 외전을 생산하며 드라마 한편의 콘텐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시켰다. 이런 열혈시청자로 인해 시청률은 상대적으로 저조했지만 <다모>의 VOD(다시 보기) 서비스 이용건수는 iMBC 유료화 이후 최고인 40만건을 넘었다. 가히 <다모>를 새로운 문화현상이라 부를 만한 반응인 것이다. 이병훈, 김재형이라는 거물급 사극 전문 프로듀서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언론의 관심을 끌었던 <대장금>과 <왕의 여자>의 시청률 경쟁이 <대장금>의 완승으로 끝난 것도 <다모>가 새로운 사극에 대한 수요를 끌어낸 데 힘입은 바 있다. 적어도 TV사극에서 <다모>는 혁명적인 전환점을 이룬 작품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진화된 캐릭터 통해 역사 뒤집어 보기
하지만 <다모>로 최근 사극 열풍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다모>에 대한 열광적 반응 가운데 상당 부분이 기존에 TV에서 볼 수 없던 스펙터클한 액션연출에 있었던 반면 <스캔들> <황산벌> <대장금>은 액션연출이 두드러진 작품이 아니다. 이들 네 작품의 특징은 <용의 눈물> <태조 왕건> <여인천하> <허준> 등 중·장년층의 사랑을 받았던 사극과 비교할 때 선명히 드러난다. 정통사극이 왕의 역사, 권력투쟁의 역사, 위인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반면 새로운 사극은 풍속의 역사, 생존의 역사, 민초의 역사를 무대에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정사보다 야사에 입각한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다. 단적으로 <스캔들>이나 <다모>는 야사에서 소재를 얻은 작품이 아니며 <황산벌>은 정사에 입각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들 작품이 100% 상상의 산물인 것도 아니다. <다모>는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지만 <스캔들>이나 <대장금>은 고증과 복원이 중요한 작품이고 <황산벌>도 역사적 사실이 중심에 놓인 영화다.
따라서 새로운 사극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기존 사극에서 외면했던 부분, 또는 일방적인 해석이 이뤄졌던 부분을 뒤집어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스캔들>은 “남녀가 유별하다”는 것 외에 알지 못했던 조선조 사대부 집안 깊숙한 곳의 은밀한 풍경을 들춰냈고 <황산벌>은 충신이요 명장인 김유신과 계백, 두 장군의 삶 또한 정치가에 이용당하는 피곤한 것이었음을 일깨워준다. <다모>의 포도청이나 <대장금>의 궁궐 안 궁녀들의 처소도 정통사극에선 뒷배경에 머물렀던 장소다. 카메라가 비추는 대상이 달라지면 내용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정치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은 새로운 사극에선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모>에서 중요한 것은 혁명의 성패가 아니라 채옥과 황보윤과 장성백의 사랑이었고 <스캔들>의 중심은 과연 조원이 숙부인의 마음을 뺏을 수 있을 것인가였다. <대장금>에 등장하는 궁녀들의 암투 역시 왕의 총애를 받는 일과 무관하다.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 권력은 ‘겨우’ 수라간 최고상궁일 뿐이다. <황산벌>은 네편 가운데 가장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신라와 백제의 흥망은 관심 밖의 일이다. <황산벌>의 승리자는 계백도, 김유신도 아닌 ‘거시기’로 판명난다.
역사를 뒤집어보는 이런 시도에서 드라마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은 역시 캐릭터다. 최근의 사극은 캐릭터의 진화를 잘 보여준다. <스캔들>의 조원은 과거를 봐서 출세하는 일에 뜻을 접은 인물이다. 세상만사에 염증을 느끼는 조원에게 남은 희망은 풍류를 즐기고 여인을 취하는 것밖에 없다. 어디서 본 듯한 인물이라 느껴지지 않는가? 조원은 삶에 대한 태도에서 홍상수 영화의 남자처럼 보인다. 또는 문학을 포기하고 연애에 몰두하는 <질투는 나의 힘>의 편집장 문성근을 닮았다. 마지막에 사랑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지만 술에 취해 인사동 골목을 서성이는 조원을 우리는 분명 스쳐지난 적이 있다. 기존 사극에서 볼 수 없던 인물들은 <다모>와 <대장금>에도 무수히 등장한다. <다모>의 포교들이나 <대장금>의 궁녀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다. 그런가 하면 <황산벌>의 계백이 풍기는 매력은 <용의 눈물>이나 <태조 왕건> 같은 사극에 나오는 충신을 닮았으되 결코 같지 않다. 계백은 의자왕을 위해 목숨을 각오하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의자왕의 명을 따라 결사대를 이끌지만 그의 눈에 핏발이 서면서 아내와 자식을 죽인 것을 회상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계백의 죽음이 일종의 속죄의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계백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 그 순간, 인간은 이름 때문에 헛되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를 쳤을 것 같다. 사극의 캐릭터가 마치 바로 옆에서 숨쉬는 인간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고뇌와 욕망을 나누는 존재로 나오는 탓이다.
사극, 주류 장르로 진입하다
물론 사극의 변화가 <다모> 이후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다. TV사극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97년 <용의 눈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한차례 사극 붐이 일었다. <용의 눈물> <태조 왕건> <여인천하> <허준> 등 꾸준히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사극이 나왔고 <홍국영> <암행어사 박문수> <상도> <대망> 등은 기존 사극의 전형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줬다. 영화에선 80년대 토속에로물이 유행한 뒤로 한동안 사극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영원한 제국>처럼 사극에 미스터리를 더한 영화가 나왔지만 장르로서 유행할 파급력은 없었다. 9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진 사극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제외하면 무협액션물이다. <단적비연수> <비천무> <무사> <청풍명월> 등은 홍콩 무협영화에서 사극의 활로를 찾으려 했지만 유행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어쨌든 이런 과정에서 TV와 영화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았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망>이나 <다모>는 무협영화를 TV드라마로 바꾸었고 <스캔들>과 <황산벌>은 TV드라마가 표현하지 못했던 영역에서 활로를 찾았다. 여기엔 흥미로운 아이러니가 하나 있다. TV사극이 지나치게 국사책에 있는 사실에 집착한 반면 영화는 무협액션이라는 판타지에만 집중했다. <대장금>의 연출자 이병훈 PD는 “그간 사극이 사실을 늘어놓는 구성에 치중했고 소재도 궁에서 벌어지는 일에서 찾으려 했다. 하지만 사극은 드라마이고 픽션이 필요하다. 기록되지 않는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조선왕조 500년>에서 <허준>으로, <상도>로, <대장금>으로 이어지는 이병훈 PD의 작품궤적 자체가 TV사극의 변천을 반영한다. 반면 <단적비연수>에서 <청풍명월>까지 무협영화에서 역사적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 영화는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재해석보다 장르가 요구하는 멜로드라마와 액션연출에 힘을 집중했다. 지금 TV와 영화는 각자 영역에서 놓치고 있던 면을 보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이같은 사극 열풍을 언론에서는 흔히 ‘퓨전사극’의 성공이라고 부른다. 스스로 ‘퓨전역사코미디’라 이름붙인 <황산벌>은 물론이고 <스캔들>은 18세기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모>는 홍콩 무협영화의 액션을 적극 차용했다는 점에서, <대장금>은 수라간 궁녀를 전문직 직업으로 주목했다는 점에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혼재된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통념상 떠올리는 사극과 다르다는 점에서 퓨전사극이라는 표현은 무난해 보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대사를 반복하던 정통사극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스캔들> <황산벌> <다모> <대장금>에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조선조 사대부 집안에선 “아니, 이게 언제 이렇게 커졌답니까?”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백제의 결사대를 소집한 장군 계백의 입에선 “느그들 나랑 거시기해야겄다”는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포도청 다모가 혁명의 회오리에 휘말리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는가 하면 구중궁궐 한구석에 ‘생각시’라 불리는 여학생들의 기숙사가 있었다는 낯선 이야기들이 예전 사극에서 볼 수 없던 흥분과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문제는, 역사를 뒤집어볼 용기와 상상력
하지만 이런 변화와 혁신을 단순히 ‘퓨전’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긴 힘들다. <스캔들>의 이재용 감독은 퓨전사극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이 든다며 <스캔들>에서 의도한 것은 “당대의 풍속사를 최대한 고증해서 제대로 그려보자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퓨전’이 된 것을 부인할 순 없지만 퓨전사극이라는 표현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 “난 기본적으로 원칙주의자이고 클래식에 충실하자는 입장이다. 근본을 모른 채로 이것저것 섞어버리는 태도는 달갑지 않다.” 실제로 <스캔들>은 당대 복식과 음식, 가구와 건물을 철저히 고증하느라 상당한 노력을 투자했으며 문어체 말투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프랑스 소설이 원작이지만 조선시대 양반이라고 욕망의 구조가 18세기 프랑스 귀족과 다르겠느냐”는 것이 ‘퓨전’보다 중요한 지점이었던 것이다. <황산벌>이 탄생한 과정도 ‘퓨전’과 거리가 멀다. <황산벌>의 기획자인 조철현씨는 “리얼리티 있는 것이 새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신라와 백제가 싸울 때 사투리를 썼을 것이라는 점, 계백의 아내가 죽을 때 ‘당신 뜻대로 하소서’ 하진 않았을 거라는 점, 계백을 충신의 귀감으로 삼지만 이데올로기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수 있다는 점 등 진짜 역사적 사실은 어땠을까, 라는 점에 주목했다.” <대장금>이 전하는 신선함도 장르를 혼합하는 것과 무관하다. 정통사극과 역사책에서 한번도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던 궁녀의 생활상이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궁궐 구석에 숨죽이며 살던 다채로운 인물들이 눈길을 끄는 것이다. 당대에 대한 고증에 크게 개의치 않은 <다모>가 예외적이지만 무협물의 전통을 염두에 둔다면 <다모> 또한 ‘퓨전’이 중심에 놓인 작품은 아니다. <다모>를 퓨전사극이라 부른다면 <단적비연수> <비천무> <무사> <청풍명월> 등을 같은 장르로 묶지 못할 이유는 찾기 힘들다.
따라서 지금의 사극 열풍을 신종장르나 장르혼합의 성공으로 보긴 힘들다. 또한 <용의 눈물>이나 <태조 왕건>이 정치 현실을 반영해 인기를 끌고 <허준>이 IMF와 의약분업을 둘러싼 분쟁 와중에 희망을 제시한 것처럼 현실의 사회심리와 호응한 결과로 보기도 어렵다. <다모>에 대한 열광에서 지난해 월드컵에서 분출했던 신세대의 힘을 읽는 분석도 나오긴 하지만 잇단 사극의 인기가 신세대만을 겨냥한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사극의 시야와 품이 전에 없이 넓어졌다는 사실이다. <황산벌>의 이준익 감독은 “오래전부터 사극에 관심이 있어서 <아나키스트>도 제작했다”며 “역사는 드라마의 보물창고”라고 말한다. “200년 넘는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서부극이 나왔는지 생각해보라. 5000년 역사를 가진 우리가 다양한 사극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런 맥락에선 <장화, 홍련>도 사극의 변화를 보여준 일례가 될 만하다. 문제는 역사를 뒤집어볼 용기와 상상력과 끈기다. 지금의 사극 열풍은 사극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