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한 돌다리 위에서 볕을 쬐고 있던 상궁과 별감들에게 길을 물었다. “촬영? 저쪽에서도 하고, 저∼쪽에서도 하는데, 어디로 가려고?” 의정부 너머에 웅크린 MBC 오픈세트, 산과 계곡과 궁궐과 민가가 오밀조밀하게 고개를 맞댄 축소판 한양에서, <대장금> 제작진은 수라간 창고와 내금위 마당으로 팀을 나눠 흩어져 있었다. 발걸음을 아끼려는 계책이려니 했다. 그러나 누명을 쓰고 광에 갇힌 장금이(이영애)를 찍는 A팀도, 내시에게 흥분제를 팔았다가 잡혀온 숙수 강덕구(임현식)를 찍는 B팀도, 도무지 한 장면 촬영을 끝낼 줄을 몰랐다. “네 시간을 이렇게 앉아 있었다고! 어이구, 목이야.” 산속 맨흙 위에 무릎 꿇은 임현식의 탄식과 함께 날씨는 자꾸만 추워져갔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지난 10월15일은 <대장금> 제작진에게 매우 힘든 날이었다. 운이 나쁜 날은 스물네 시간 내지 스물여섯 시간을 꼬박 촬영한다고 했는데, 이날이 바로 그날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문제가 된 장면은 한 상궁(양미경)이 장금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고 목숨을 구하라고 설득하는 대목이었다. 어둡고 추운 광 안에서 쪼그리고 오전나절하고도 두 시간을 보낸 이영애나 얇은 노방으로 지은 한복만 입고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연기자들이나 헝겊에 불을 붙여 스모크 효과를 주는 스탭이나 파랗게 질리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오늘은 파산이네”라고 선고를 내린 이병훈 프로듀서는 마음이 타는 듯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감정이 담기는 장면이어서” 함부로 넘어갈 수가 없노라고 설명했다. 그는 밥먹고 하자는 제조상궁(박정수)에게 “점심 안 먹습니다”라고 못을 박고는 평소보다 두배나 시간이 걸렸다는 촬영에 몰두했다. 물론 점심상은 차려졌지만, 오픈세트 구석에서는 궁중요리팀이 준비한 제조상궁 생신연회상이 끝모를 촬영을 기다리며 식어가고 있었다.
50부에 달하는 <대장금>은 카메라를 몇대 더 동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도 이처럼 한대의 카메라만 고집하면서 가시밭길을 걷는 중이었다. 김근홍 조감독은 “카메라를 한대만 쓰면 그에 맞추기 위해 매번 조명을 달리해야 한다. 그 때문에 더 깨끗하고 디테일이 사는 화면이 나올 수 있다”고 프로듀서의 고집을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힘들어 보여도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면 다들 이런 식으로 산다”는 그의 말이 위안이 될까. 그러나 길어지는 촬영 탓에 사고도 많았다. 수라간 최고상궁 정 상궁(여운계)은 카메라가 나인들을 찍는 틈에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창틀에 놓아둔 대본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어느 상궁은 머리를 다듬고자 가채를 내려놓았다가 빨리 들어오라는 성화에 시달리기도 했다. 의상 담당 스탭이 여운계에게 다가가 “저, 선생님, 이거 선생님 의상 아니죠? 품이 좀 안 맞는 것 같은데…”라고 점검한 정도는 귀엽게 넘어갈 만했으니까. 그럼에도 <대장금> 촬영현장은 냉기보다 온기가 우위를 점하는 곳이었다. 이병훈 PD는 “방송국 직원만 쓰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외부인력을 채용한다. 밤을 새우면 돈을 더 많이 버니까 불평이 줄었다”지만, 수라상에 오른 떡을 사이좋게 나눠먹는 스탭들은 시간여행길에 오른 듯한 촬영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는 듯했다. 스탭들이 패스트푸드 치킨에 눈이 멀어 조명을 대충 친다는 최 상궁(견미리)의 앙탈, 오후에 나타난 여운계가 외치고 다닌 “굿 애프터눈, 에브리 보디!”는 지친 스탭과 출연진에게 힘든 고비가 지났다는 자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조선왕조 오백년>부터 <허준> <상도>에 이르기까지 사극 기술을 갈고 닦은 이병훈 PD는 “이제 10회를 넘겼으니 시청자들이 <대장금>과 친해질 때가 됐다. 장금이의 비중을 줄여가면서 조연이 주는 재미를 더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나이 지긋한 상궁들이 나타나면서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한 촬영현장은 <대장금>이 인기를 얻는 까닭을 그대로 보여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궁과 내시들, 빨간 댕기를 묶은 나인들이 종종거리는 대전 앞은 키득거리는 웃음이 넘나들었다. 나인들이 정 상궁 앞에 줄지어 앉았을 즈음, 쉬고 있던 수발상궁(이숙)이 커다란 주전자를 끼고 커피를 타서 젊은 아이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몇 시간 전부터 입에 붙어 있던 진상 목록을 지치지도 않고 외우면서. 드라마와 똑같이, 긴장을 인정으로 녹이는 <대장금>은 그렇게 저물어가는 해를 맞이했다. 생신연회상은 아직도 채 차려지지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