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新 사극 전성시대 [4] - <대장금> 김영현 작가 인터뷰
2003-10-24
글 : 김혜리
사진 : 정진환
“의사나 음식하는 사람의 기본은 어머니와 같다”

<대장금>의 김영현(37) 작가는 10여년 전 어느 출판사가 주최한 방송창작반 교실에서 방송작가라는 직종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당시 교사였던 황인뢰 PD가 수강생들이 숙제로 제출한 10분짜리 대본 중 하필 그의 것을 복사해 돌린 일이 ‘화근’이었다. 잘 썼다 못 썼다는 말도 없이 띄어쓰기법을 설명한 것이 다였으나, 당사자는 “혹 이 길이 아닐까?” 하는 직감에 샐러리맨 생활을 작파했다. <간이역II> <테마게임> <애드버킷> <신화>를 거쳐 <대장금>의 수라간에 발을 들인 김영현 작가는 왜 사극이냐는 질문에 실존인물이니 자연히 사극이 된 것이지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답한다.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사온데 어찌 홍시맛이 나냐고 물으시오면…” 하고 곤란해하던 장금이처럼. <대장금>은 <허준> <상도>(극본 최완규)의 직계로 이병훈 PD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전문직 사극’이지만 그 안에 담긴 뜻과 인간상의 면면에는 작가의 색도 만만찮게 배어 있다. 한때 높은 포부를 품었으나 한 차례 좌절을 겪은 뒤 궁궐 구석구석에 몸을 낮추고 조용히 살고자 하는, 그럼에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는 극중 인물들에는, 학생운동으로 뜨겁게 보낸 대학 시절을 뒤로 하고 “지금은 그저 나쁘게 살지 않으려고 할 뿐이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얼굴이 도리없이 겹친다.

-총 50부 가운데 10부가 끝났다. 몇부쯤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는 대강의 설계는 정해졌나.

=20부 이후 장금이 수라간에서 쫓겨나 관비가 되고 다시 의녀로 뽑혀가는 과정이 그려질 것이다. 후반은 의녀로서 성공하는 스토리를 담는다. 금영은 음식 갖고 장난치는 권력 다툼에 염증을 느껴 “그렇다면 차라리” 하는 심정으로 후궁이 되고자 한다.

-<대장금> 기획의 뿌리는.

=지난해 2, 3월경 이병훈 PD와 만나 ‘어사 박문수’를 준비했다. 사헌부 조직을 현대의 검사, 판사 이야기처럼 풀면 재미있을 거라는 구상이었는데, 다른 팀에서 제작하게 됐다. 처음 쓰는 사극인 만큼 원작을 물색하다가 이병훈 PD가 <허준>의 리서치 과정에서 발견한 장금이라는 의녀 이야기를 꺼냈다. <허준>에서 의녀를 보여준 적이 있어 망설였지만 의의와 재미의 가능성을 보아 결국 돌아왔다.

-준비과정에서 발견한 조선조 의녀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남녀 구별이 중국보다 심한 조선 문화가 낳은 존재다. 지금까지 사극이 남자의원이 발을 드리우고 여인의 손목에 실을 매어 진맥하는 것을 보여줬지만, 실제로는 의녀가 진맥한 소견을 듣고 남자의원이 약을 짓고 침을 놓았다고 한다. 실력 불문하고 시침탕액의 권한은 의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의녀 교육과정은 요즘 고등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비록 제대로 운영되지는 않았으나 일일, 주말, 월말, 기말 시험이 엄격해 이를 충실히 따라가면 의사만큼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의녀와 궁녀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전문직 여성이었다.

-역사에 의녀로 기록된 장금이 극중에서 수라간 궁녀로 출발하도록 설정한 것은 그 때문인가.

=극적인 유추다. 실록이나 기록에 보면 임금이 장금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는 정황이 나와 근거로 삼았다. 옛날식의(食醫)라 불리는 수라간과 의술을 함께 관장하는 직책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직분이 있었다. 모든 의서에는 처방전에 음식을 잘 먹이는 것이 기본으로 나온다. 작가로서 수라간에서 쌓은 경험과 정신이 뛰어난 의사가 되는 것이 주제의 흐름상 좋겠다는 감이 와서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장금은 인간적으로 어떤 여자인가.

=나는 장금이를 ‘왜 안 되나요 캐릭터’라고 부른다. (웃음)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어린 장금이는 어머니에게 연신 묻는다. “그 애는 산에 가도 되는데, 전 왜 안 되나요? 그 애들은 책을 읽어도 좋은데 저는 왜 안 되나요?” 그렇게 세상에 끝없이 호기심을 품는 캐릭터다.

-<허준>과 어떻게 차별화할까에 대한 논의는 없었나.

=‘여자 허준’이냐고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도리어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여자가 의사가 되기는 어땠겠나. 후반에 가면 장금이 한 계단 승진할 때마다 남자 관헌들이 떼지어 반발한다. 여자가 시침탕약을 하자 기득권의 치명적 침탈이라고 여긴 남자 내의원과 장금이의 갈등 상황이 벌어진다. 허준은 개인의 성공에 대한 시기와 유도지라는 살리에리적 인물의 질투가 주요 갈등이지만, 장금의 경우는 한 여자의 성공 때문에 발생하는 양반사회, 봉건관료사회의 동요가 주요 갈등이다. 그러나 누군가 병들고 그것을 치료하는 그림은 일단 똑같을 테니, 그걸 두고 아류작이라고 이야기하면 할말이 없다.

-주인공 캐스팅에는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지.

=이영애씨의 선택이었다. 어차피 안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제의했는데 뜻밖의 답을 얻었다. <봄날은 간다>를 좋게 보았고, 음색이 연약한 것이 단점이었지만 노련한 이병훈 PD가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다고 봤다. <상도>의 김현주씨도 그랬지만 복식호흡 발성으로 바꿨고 진중하고 섬세한 이미지가 의녀로 변모해갈수록 어울릴 것이라고 보았다.

-장금의 활약에 대한 봉건관료사회의 반발이 부각되지 않은 초반이지만, 아버지 서천수의 운명을 결정하는 세 여인의 예언부터 궁녀의 직업세계까지 ‘여성극’의 느낌이 강하다.

=수백의 궁녀 중에는 다양한 인물이 있었을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것에 자족하며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때우며 사는 궁녀도 있고, 조정대신과 가까이 지내는 권력지향적 나인도 있고 직업여성인 만큼 직업에 투철한 궁녀도 있었다. 재주도 다양해 글 잘 쓰는 궁녀는 출궁 뒤에도 문장을 청하러 불러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마작, 투호도 즐겼고 임진왜란 이후 담배가 들어온 뒤에는 나인이 되면 줄담배를 피우게 해 그것을 견디면 선배들과 맞담배를 허했다는 일화도 있다. 모두 고종조 조선 최후의 궁녀들 증언을 채록한 김용숙 교수의 <조선조궁중풍속연구>를 자료로 삼았는데, 그 책에는 궁궐에 들어온 일본군이 궁녀가 몰래 키운 자식을 발견한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대장금>에서 노상궁의 일화로 이용했는데, 비밀을 감쪽같이 숨긴 궁녀들에 대해 일본인들이 “조선 궁녀는 정말 무섭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여학교 기숙사 같으면서도 일에는 철저한 흥미로운 조직이었다.

-상상과 고증의 비중은 어떻게 말할 수 있나.

=스토리라인은 상상이지만, 그 일들이 가능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작가나 PD 입장에서 고증에 충실하다고 자부한다. 궁중요리, 한의학, 역사에 관해서는 대본이 나오면 촬영 전 각각 전문가와 기관에 보내 검증받고 있다.

-<대장금>을 참신하게 보이게 하는 힘은, 극적으로는 ‘양념’에 해당하는 인물들에서 나오는 듯하다.

=기획의도부터, 왕족을 제외한 궁중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는 뜻이 있었기에 가능한 한 다양한 궁중 사람들을 많이 찾아내려고 한다. 모래주머니와 멍석을 차고다녔던 멸화군(궁궐 소방대)도 그렇게 등장한 인물이다.

-매회 시련이 닥치고 극복하기를 반복하는 구성이다. 만두피 가루가 없어진다거나 냉국수 육수가 모자란다거나. 요리 명인 만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미스터 초밥왕> 같은 만화는 요리가 어떻게 사건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재미난 작품이었다. 그러나 극적 구조도 다르고 일본 음식이라 본뜰 수도 없다. 비법이 등장해야 마무리가 되니 아이디어를 끌어낼 수밖에 없다. 매회 사건이 터지는 건, <허준> 때부터 이병훈 PD의 스타일인데 작가로서는 고달프다. 캐릭터로만 가도 재미있을 듯한데 용납을 안 한다.

-실력과 페어플레이 정신을 갖췄으나 장금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금영은 독특한 악역이다.

=생각보다 금영이에게 동기를 주기 쉽지 않았다. 11부부터는 금영의 동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고, 11, 12부에 걸쳐 정 상궁-한 상궁-장금과 제조 상궁-최 상궁-금영이의 세력이 확연히 갈라진다. 세계관 차이로 인한 대립이라 말해도 좋다. (웃음)

-<대장금>에도 전형적이고 원색적인 갈등의 씨앗은 내재돼 있다. 당파와 결탁한 권력싸움이나 민정호를 사이에 둔 금영과 장금의 삼각관계가 뒤로 가면서 드라마를 지배하게 되지 않을지.

=권력투쟁은 최 상궁 집안을 중심으로 “아랫것들도 권력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도지 그 이상은 아니다. 멜로드라마가 잘 붙지 않아 괴롭다. 궁녀는 수녀나 진배없으니 고증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남녀를 한번 만나게 하기가 어렵다. 개인적으로 ‘찔끔 멜로’라고 부른다. (웃음) 후반부에는 왕과 민정호, 장금이의 삼각 로맨스가 있다. 이는 설득력 있게 쓸 자신이 있다. 왕은 장금을 취하면 그만인데 왜 안 취했을까. 왕은 치열한 암투 와중에서 유일한 휴식처로서 장금을 사랑한다. 그 휴식처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장금을 보호하고, 장금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입지전 드라마지만, 자연과 음식으로 사람과 세상을 치유하고 위안한다는 메시지가 비친다.

=의사나 음식하는 사람의 기본은 어머니와 같다는 생각이 있다. 장금을 치열하게 살도록 하는 힘은 어머니의 기억이고 한 상궁과 장금의 관계도 모녀에 가깝다. 제도적 보건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몇몇 어머니들에게만 위생교육을 해도 무수히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는 장금의 활동도 뒤에 나온다.

-한 상궁 인기가 대단하다. 짐작했나.

=예상 못했다. 여성 시청자들은 로맨스보다 장금 엄마와 한 상궁의 우정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남자들은 나도 임금처럼 한 상궁 같은 아내나 어머니에게서 수라상 한번 받아봤으면 하는 판타지를 품는 것 같다. (웃음) <태조 왕건>에서 잘못된 길을 걷는 군주도 죽음으로 지키는 신하에 대한 남성 판타지가 보이지 않는 성공요인이었던 듯하다. 그처럼 줄거리와 무관한 매혹이 없다면, 드라마는 어느 선 이상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장금>에 나오는 음식 중 실제로 먹어본 것이 있나.

=유일하게 먹어본 것은, 소라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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