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닫은 웬디, 창 밖의 피터
아이들은 언젠가는 어른이 된다, 단 한명만 빼놓고. 피터는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달아나버렸다. 그의 완벽한 세계는 어른을 원하지 않는다. 네버랜드의 판타지로 초대받을 수 있는 것은 어린이뿐이다. 어른의 세계는, 단순히 행복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날아다니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어린 영웅을 요구하는 판타지는 <피터팬>만이 아니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 나라 이야기> 시리즈의 주인공은 어린 네 남매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해리도 물론 소년이다. 르 귄의 대표작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의 1, 2편은 각각 게드와 테나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출발하고, 3편의 아렌 역시 미숙한 소년이다. 어찌보면 <반지의 제왕>도 그렇다. 반지원정 당시 프로도는 50살로 어리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안락한 샤이어 밖으로 나와본 적 없는, 그리고 누군가 계속 돌봐줘야 하는 무력한 존재다.
판타지에 어린 주인공이 많은 게 읽는 이가 어리기 때문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견해다. 어린이들이 열망하는 것은 오히려 어른의 세계다. 1959년 바비인형이 처음 등장했을 때, 어른들은 성숙한 여성의 육체를 가진 인형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 소녀들의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판타지는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검 한 자루로 용과 맞서 싸울 수 없다. 사람들이 판타지에 매혹되는 것은 현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타지는 현실이다. 처음 보는 것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비천한 현실이 날개옷을 입고 있는 모습에 미혹되는 것이다. 온전히 새로운 낯선 세계였다면 빠져들 수 없다. 도망치거나 무시했을 것이다. 판타지는 현실과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경계에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너무 숨가쁜 곡예다. 조금만 이쪽으로 와도 지루해지고, 잠깐만 저쪽으로 가도 황당해진다. 어린이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머무르는 존재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어른보다는 어느 쪽으로 갈지 혼란스러워하는 어린이야말로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으로 어울린다.
판타지는 또한 성장의 이야기다. 시작부터 이미 어른이라면 모험은 성립될 수 없다. 고향을 떠날 때 어린이였던 주인공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다 어느새 어른이 된다. 매끄럽던 이마에 면류관처럼 주름살이 잡히고 어깨는 커다란 칼을 머리 위로 쳐들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진다. 게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어스시의 대현인이 되었다. 나니아의 네 남매의 성장한 모습은 성자에 필적한다. 프로도보다 스물두살이나 어린 철부지 피핀은 곤도르의 기사가 되어 왕과 영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노동 계급 출신 샘은 샤이어 시장을 일곱번이나 역임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드디어 끝나면 어른이 되어 있는 것은, 해리 역을 맡은 대니얼 래드클리프만은 아닐 것이다.
<피터팬> 역시 성장의 이야기다. 빅토리아 시대 중류 이상 가정에서는 어른과 아이의 세계가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아침 기도 시간을 제외하면 아이들은 부모를 만나는 시간이 별로 없다. 식사도 함께하지 않는다. 어린이방은 아이들의 세계의 전부다. 나이가 차면 학교로,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남자아이들과 달리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교육받는 여자아이들은 더욱 그랬다. 피터는 웬디가 어른이 되었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할 즈음 찾아왔다. 하지만 웬디는 아직 어린이방을 나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유모에게, 동생들과의 놀이에 여전히 미련이 있다. 그런데도 문이 아닌 창문을 통해, 걷거나 뛰는 게 아니라 날아가버렸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남자아이가 보여준 판타지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하루에 세번씩 옷을 갈아입는 어른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웬디는 결국 극복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어른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 순간 모험은 끝났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피터팬>은 어쩌면 안티판타지다. 성장은 모험의 축복받은 완결이 아니라 중단, 그것도 폭력적 중단이다. 집으로 돌아간 웬디가 다시는 피터를 만나지 못한 것은 그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후크의 예언은 정확했다. 웬디는 창문을 닫았다. 어른의 현실을 선택했기에 피터의 얼굴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서랍 속에 판타지를 봉인한 용감한 아버지가 돌아온 아이들을 보고 곧장 기뻐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을 통해 그가 순간적으로 본 것은, 닫혀진 창문을 두드리다가 지쳐 적도 친구도 사라진 네버랜드에서 홀로 늙으며 조만간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피터의 모습이다. 어쩌면 죽은 피터는 후크로 다시 태어나 손목이 잘린 채 누군가의 판타지에서 조연 노릇을 할 것이다. 미스터 달링이 그랬던 바로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