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동 판타지의 핵심에 다가간 <피터팬> [2]
2004-01-16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꿈과 학살이 공존하는 네버랜드

어쩌면 호건은 원작에 충실하자는 가장 단순한 원칙만을 따랐을지도 모른다. 그 원칙을 지킨 사람은 많지 않았다. <피터팬>은 1924년작 무성영화, 1953년과 2002년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몇 차례의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TV영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후크> 등으로 각색됐다. 후일담을 제외한다고 해도 이 많은 <피터팬>은 잃어버린,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을 향한 향수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열두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누구나 행복해지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그러나 네버랜드는 독약과 학살과 질투도 있는 섬이었다. 자라지 않는 소년과 “미안해, 난 어른이 되어야 해”라고 말하는 소녀가 정을 나눈 비극의 섬이 웬디는 엄마 달링 부인이 가진, "오른쪽 끝에 키스가 숨어있는 입술"을 동경한다. 그러나 웬디는 이제 자라야 할 시간이라는 아빠의 말을 듣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기도 했다. 그 충돌과 모순은 언어와 사물의 관계에 집착하는 루이스 캐롤의 <앨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피터팬>을 몇번이라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텍스트로 만들었다. <지금 혹은 네버랜드, 피터팬과 영원한 젊음의 신화>의 저자 앤 요먼은 “피터팬과 웬디 사이엔 로맨스가 있다. 그것은 사춘기 이전의 사랑이라 매혹적이다. <폭풍의 언덕>의 히드클리프와 캐서린처럼. 그들은 어린 시절 멋진 열정과 기쁨과 삶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른의 세계엔 그런 것들이 차지할 자리가 없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리고 판타지 문학의 초엽을 장식하는 소설 <피터와 웬디>는 20세기 말엽, 성인들의 비극적인 로맨스로, 혹은 제2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지나간 런던에서의 황폐한 판타지로, 여러 차례 무대에 올랐다.

이처럼 피터팬은 100년 동안, 배리가 받지 못했던 사랑을 차지해왔다. 그러나 피터팬이 스크린에서 목소리를 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화는 연극과 달리 진짜 네버랜드처럼 보이는 공간을 내놓아야 할 텐데, 지금까지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피터팬>의 프로듀서 루시 피셔가 몇 차례 좌절을 겪었던 건 오히려 다행이었을 것이다. 피셔는 1979년 원작의 판권을 사려고 했지만, 당시 몸담고 있던 프랜시스 F. 코폴라의 영화사 조트로프가 파산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고도 프로젝트는 매년 미뤄졌다. 피셔는 “이젠 테크놀로지가 존재한다. 우리는 사람을 정말 날게 할 수도 있고, 20년 전이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네버랜드를 마음껏 상상할 수도 있다.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영화를 만들지 못했던 세월 동안, 매년 기하학적으로 발전해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피터팬>은 쉽지 않았다. 콜럼비아와 유니버설, 레볼루션 스튜디오가 합작을 하고서야 이 1억달러짜리 영화는 요정의 불빛을 싣고 크리스마스를 밝힐 수 있었다.

판타지영화 산업을 발판 삼아

영국 영화잡지 <엠파이어>는 그 동력을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판타지영화를 다시 한번 거대한 산업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두 시리즈는 판타지영화가 제작비에 걸맞은 관객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LA타임스〉 역시 “<반지의 제왕>의 성공은 요정 이야기에 무모한 모험을 덧붙인 배리가 옳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배리는 글을 쓰기 전에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섬세하게 맞추었고, 다양한 연령의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C. S. 루이스의 전설적인 판타지 <나니아 나라 이야기> 시리즈가 첫 번째 영화제작에 들어가는 것, 로알드 달의 동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다시 한번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할리우드는 지금 십대 초반 관객에게 주목하고 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 <왓 어 걸 원츠> <워크 투 리멤버>는 스크린에서 소외된 열서너살 소녀들을 끌어들여서 성공을 거두었다. 〈LA타임스〉는 “<피터팬>은 로맨스를 들려준다. 피터는 네버랜드 소녀들이 모두 동경하는 대상이다. 웬디와 팅커벨, 그리고 원작에선 인디언 공주 타이거 릴리까지. 그런 로맨스는 십대 소녀들의 영역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영화가 또 다른 관객층을 개척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

막상 선을 보인 <피터팬>은 박스오피스 7위로 데뷔하는 치욕을 겪었다. 그러나 박스오피스 전문가 폴 데가라베디언은 “이즈음 개봉하는 판타지영화는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그늘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피터팬>은 극장 수입보다는 DVD와 비디오 판매를 통해 장기적으로는 성공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살아 움직이는, 그것도 매우 아름다운 피터팬을 볼 수 있다는 건 놓치고 싶지 않은 경험일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100년을 살면서도 시들지 않은 소년, 산과 들판을 지배하는 그리스 신화의 신 ‘판’(Pan)의 이름을 가진 소년이므로. 그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올해 개봉하는 조니 뎁의는 <피터팬>을 쓰던 무렵 배리에게로 돌아가는 영화다. 배리도, 그가 아낀 존과 마이클과 피터 레웰린도, 모두 조금씩은 피터팬이었으므로, 이 영화 역시 일종의 <피터팬>이 아닐까. 배리는 “네버랜드는 모든 아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아이들마다 좋아하는 무언가로 채워넣은 나라”라고 말했다. 세상의 아이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네버랜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별을 향해 아침이 올 때까지 날아가면 나오는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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