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촬영장 동행취재기 [2]
2004-01-30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일상성 - 완벽하게 디렉팅 된 인공의 세계

2003. 12. 13 26회차 촬영장

처음 허용된 시간은 3분이었다. 경기도 부천의 허름한 호프집에서 벌어진 리허설 장면을 취재하는 데 주어진 시간이 그랬다. 좁은 공간이었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첫 촬영장 공개인 만큼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영화사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각 매체에 배당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의외의 장면을 목격했다. 현장에서 즉흥성을 중시한다던 홍상수 감독이 배우에게 대사의 억양, 고갯짓의 크기까지 너무나 세세하게 ‘디렉팅’하고 있었다. 유지태와 김태우가 진짜 소주와 맥주를 마시는 건 예상했던 일이지만 감독과 번갈아 대사를 되뇌일 줄은 몰랐다.

헌준(김태우)과 후배 문호(유지태)가 7년 전의 연인인 선화(성현아)를 찾아와 기다리는 참이다. 헌준이 먼저 선화와 연애를 했고, 얼마 뒤 선화를 남겨두고 도망치듯 유학을 갔다. 그뒤에 선화는 문호와 연애를 했다. 두 사람과의 연애가 끝난 뒤 선화는 무슨 생각에선지 대학을 관두고 사회로 진출했고, 현재 호텔 커피숍을 경영하고 있다. 지금, 헌준은 예비 영화감독이고, 문호는 예비 대학교수다. 함께 낮술을 먹다 과거의 여자를 찾아온 이들은 각자 제멋대로 선화와의 과거를 회상하고, 선화와의 재회를 상상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두 남자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중국집에서 낮술을 먹다가 문득 이야기가 선화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끄집어내는 홍상수의 A4 두쪽짜리 각본의 첫머리다.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헌준은 앞으로 하고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다. 4초. 고개를 들고 2초 동안 고추잡채를 먹고 있는 문호를 보고는 바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찾는다. 바지에 없다. 옆에 옷걸이에 걸린 잠바를 챙겨보니 거기에 지갑이 있다. 지갑을 꺼내서 자리에 앉아 지갑 속에 있는 사진관 영수증을 챙긴다. 문호는 그 사이 고추잡채를 먹고 그 다음으로 중국빵을 먹는다. 중국빵을 고추기름에 찍어서 입에 넣고는 밖에서 서성대는 택시녀를 쳐다본다. 샷 시작할 때 택시녀는 갈비탕 집 앞에서 창에 쓰인 메뉴를 보고 있다. 그러다 핸드폰을 꺼내서 어딘가 전화를 건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서서히 왼쪽으로 프레임 아웃한다. 계속 쳐다보는 문호, 그런 문호를 쳐다보는 헌준. “문호야, 너 기억하냐, 박선화?” 헌준이 묻는다.

배우들이 고개를 숙이거나 들고 있는 시간, 빵을 먹는 순서와 행동, 밖의 엑스트라 움직임까지 너무도 ‘친절하게’ 적어놓고 있는 시나리오. 홍상수 영화의 일상은 이런 식으로 홍상수의 머리 속에서 완벽하게 디렉팅된 인공의 세계다. 홍상수 영화에서 인물과 사건의 표면에 떠도는 리얼리티는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주 섬세하게 세공된 것이다. 리얼리티와 가공의 세계가 그토록 딱 붙어 있다니.

2003. 12. 28 31회차 촬영장

영화 촬영장은 대체로 재미가 없다. 스펙터클과는 기본적으로 인연이 없는 홍상수 영화의 촬영장은 그래서 지루할 것이라고 예단했다. 그러나…리허설을 포함해 대략 9시간 동안 단 두컷을 찍어가는 그 자체가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일 줄이야. 듣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가라앉아 있는 감독의 차분한 목소리나 얼굴의 붓기만큼 입가에 엷게 떠 있는 미소는 26회차 촬영 때와 마찬가지로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현장 구석구석을 일일이 직접 챙기고 지시하는 감독의 신경줄이 속으로 얼마나 팽팽하게 날서 있을까? 그의 영화의 디테일은 감독 자신이 누누히 밝힌 대로 미완성인 채로 현장과 맞닥뜨려서 그곳에서 완성된다. 긴 시간이 흥미진진했던 건 그 과정을 약간이나마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천역 부근 상가의 한 대폿집에 조명 등 촬영 세팅을 하는 동안 건너편 고깃집 방 안에서 문호(유지태)와 그의 대학생 제자를 맡은 남녀 단역 7명이 리허설을 시작했다. 그 방 안으로의 진입은 차단당했다. 녹음기만 간신히 밀어넣었지만 건질 수 있는 건 없었다. 방 밖에서 연출부 2명이 구운 고기와 술이 방 안으로 건네졌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리허설을 했다. 간간이 유지태의 고함이 들려왔다.

30분 가량의 리허설이 끝나고 남자 넷 여자 셋 단역들의 의상을 감독이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쁜이 역의 배우가 빨간 코트를 입고 모델처럼 옆으로 앞으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감독이 5초 정도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기다렸다는 듯 베이지색 코트에 이어 모자 달린 점퍼로 갈아입는다. “그 목도리 풀어보지.” 이 말을 하는 감독의 손에 어느덧 또 다른 코트 두벌이 쥐어져 있다. 또 다른 점퍼로 갈아입은 걸 보더니 자기 손에 있던 코트를 건네준다. 대학생 티가 물신 풍기는 옅은 황토색 반코트다. “이 목도리 해보지.” 빨간색 목도리는 청색에서 보라색으로 바뀌더니 결국 노란색과 카키색이 엇갈린 것으로 낙착됐다. 다음은 가방이다. 배우가 검은색 가방과 청카바, 두개를 들고 선다. 감독이 말없이 후자를 가리킨다. “자, 다른 사람!” 이런 식으로 7명의 의상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일이 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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