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촬영장 동행취재기 [4]
2004-01-30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인 한 문장

16번 찍고 정작 첫 번째 것을 택했는데.초반의 에너지는 후반으로 갈수록 흐트러진다. 좀더 완벽한 걸 기대하면서 자꾸 찍게 되는 데 어느 순간에 가면 한계에 부딪힌다. 그 순간을 넘어서면 연기자만 힘들어지고 마이너스 효과만 나올 뿐이다. 서너컷이 좋았고, 그걸 잘 활용하면 될 것 같다.

리허설도 그렇고 놀랄 정도로 꼼꼼히 챙기고 지시한다.내가 극사실주의를 추구하는 건 아니다. 예전부터 내 영화를 두고 표면이란 말을 많이 쓰던데, 표면을 좌우하는 그 밑의 어떤 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중시하는 뜻에서 표면을 중시하고 다루는 건 아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우선순위 안에서는 디테일하게 챙기지만, 어떤 부분은 놀랄 정도로 아예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감독이 모든 걸 다 통제하고 챙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 때 그럴 뿐이다. 내 영화가 늘 그렇지 않나? 순간순간은 리얼할지 몰라도 엮어놓으면 아주 엉뚱하고 비현실적이다.

(홍 감독은 과거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의미란,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에 따라 발생하고 포착되는 것이다. 나도 한때는 굉장히 관념적인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턴가 표면적인 것들에 묻혀 춤추듯 흘러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에 뒤따르는 정서들을 소중히 안을 수 있다면 삶의 불가해성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리얼리즘, 내가 본 것을 다 아우르는 표현으로서의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생활의 발견>의 주요 테마가 모방이었다. 이번에는.

=회상, 상상, 꿈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회상이 3분의 1, 현재가 3분의 1, 꿈과 상상이 나머지 3분의 1을 이룬다. 각각의 인물이 늘 일정한 정체성으로 일관되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 어느 순간이 A를 이뤘다면, 지금은 A-1, 미래는 A-2라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예전부터 그랬다. 사람은 끊임없이 생성되는 존재가 아닌가. 꿈도 현실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꿈, 현재, 회상이 A, B, C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제목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시구가 주는 어떤 신선한 느낌이다. 파리에서 우연히 그 문장을 봤을 때, 누가 썼는지도 몰랐다(루이 아라공의 시구였다). 또 하나는 이렇다. 미래는 한자로 ‘오지 않는다’는 ‘nothing’의 의미이고, 여자=미래니까 여자도 ‘nothing’이다. 현재에 도착하지 않은 여자가 남자를 수식하니 결국 모두 ‘nothing’이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인 한 문장! 그 문구를 발견했을 때 어떤 것도 규정하지 않는 멍한 느낌이 강하게 남았다.

-배우는 어떤 식으로 발견하나? 예컨대 성현아는.

=글쎄, 그냥 보면서 어떤 느낌을 갖게 되는 것뿐이고 만나서 대화를 하면서 가능성을 찾아가는 거다. 성현아는 예전에도 작품을 하려고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느낌이 남달랐었다. 이번에 다시 만나보니 그 느낌이 여전했다. 더 성숙함이 느껴졌다. 촬영에 들어가보니까 그게 틀리지 않았다. 결국 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우연히 영화든 TV에서든 어디서건 보고 인상이 남은 배우를 꼭 함께 일하려고 짜맞춘다고 되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순서편집 해놓은 것을 마케팅팀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묻는 등 유례없이 마케팅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들었다.

=그런 건 아니고 지금의 팀과 잘 맞을 뿐이다. 대중영화라고 했을 때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는 규칙과 다른 방식으로 내 영화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거다. 그걸 찾았으면 한다.

열쇠 - 조금만 틀려도 열 수 없는 감독과 배우 사이의 문

2004. 1. 4 36회차 촬영장

부천 도원초등학교 운동장. 31회 촬영의 내용이 된 문호와 제자들의 우연한 만남이 이뤄지는 장면이다. 운동장 한켠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쪼그려 앉은 문호가 제자들의 존경을 한껏 받는 백일몽을 꾼다. 백일몽에서 깨어난 문호가 학생들과 어울려 학교를 나서는 비교적 간단해 보이는 장면. 리허설 1번, 테스트 촬영 3번, 슛 2번에 오케이 사인이 난다. 설마? “원래 그늘이 지면 찍으려고 한 건데, 시간이 남아서 그냥 찍어본 거예요.”(아마도 양지에서 찍은 백일몽 장면과 차이를 두려는 모양이다) 어느 정도 그늘이 생기자 다시 촬영에 들어간다. 한번, 두번, 세번. “자, 응달은 이걸로 하고 완전히 그늘이 지면 한번만 더 찍읍시다.” 잠시 뒤에 또 한번 촬영이 이어졌다. 물론 이날도 배우의 몸동작 하나에도 감독의 연출 지시가 따랐다. 무려 20kg이나 몸집을 불려가며 영화에 ‘헌신’하고 있는 유지태의 생각이 궁금했다. 특히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과의 창작 스타일이 어떻게 다른지. 고맙게도 그는 <올드보이>를 함께했던 박찬욱 감독과도 비교를 해주었다.

“허진호 감독님은 배우와 함께 만들어가요. 배우의 애드리브도 많이 활용하고, 테이크 수는 훨씬 적고. 반면 홍상수 감독님은 언제나 본인 생각의 틀에 맞는 것, 자신이 생각하는 선에 정확히 따라주길 요구해요. 물론 거기엔 일관성이 있어요. 홍 감독님이 배우와 맺는 소통의 관계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열쇠를 그릴 수 있을 겁니다. 문을 열려는데 조금만 틀려도 열 수가 없잖아요. 전 그 안에서 자유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박찬욱 감독님도 영화의 모든 게 머리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러나 배우들의 움직임이 변화를 일으킨다고 해요. 그래서 배우에게 많은 걸 해보도록 허용하지요.”

유지태의 고민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 감독의 ‘냉소적 시선’에 있었다. 냉소의 기운을 받아들여 인물 안에 투사하는 게 쉽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자신은 일종의 삐딱이, 야당 구실을 했다고 한다. “냉소적인 건 예전 작품이나 이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감독님과 대립이 생길 때는 나이 차이에서 오는 생각의 차이라고 이해했어요. 하지만 이 작품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들은 항상 어떤 이상적인 꿈을 꾸며 살아간다. 난 멋있을 거야, 같은 환상도. 내 영화를 보면서 그게 무너져내리길 바란다. 그래서 다시 살아가는 원동력을 찾기 원한다’는 감독님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근데 순서편집 해놓은 걸 보니까 무지무지 웃겨요.”

유지태가 야당이고 김태우는 여당이라고 한다. 김태우는 홍상수 감독의 오랜 팬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감독이 아무리 자신을 혹사시켜도 조금도 미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8kg 찌웠다가 14kg을 뺐고 달걀 흰자위만 먹어가며 체중을 유지하는 중이다. “홍 감독님의 특징은 어마어마한 디테일이죠. 6분짜리 롱테이크를 찍으면서도 ‘시선은 이 정도만 돌려줘’ 하고 이야기하니까. 한 대사 안에서 기다렸니, 기다렸어, 기다려 등 같은 말을 조금씩 바꿔가며 7번씩이나 하게 하는데 그걸 틀리게 하면 싫어해요.”

김태우는 “아주 끔찍했다”며 촬영 초반의 경험을 들려줬다. 가족과 이별하는 공항에서 맥주를 원샷하고, 커다란 스테이크를 대충 씹어 삼키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상대 단역의 서투름 때문에 그 장면을 무려 33번이나 되풀이하며 찍었다. 물론 맥주와 스테이크를 그 횟수만큼 먹어야 했다. 그런데 김태우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 프로듀서에 따르면, 그 장면은 순서편집에서 제외됐다. 홍상수 감독의 ‘완벽주의’에 배우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감독에게 그렇게 하는 이유가 없을 리 없다.

“파편적인 것, 조각난 대사들, 약간씩 어긋나는 대화들의 미묘함은 배우들끼리 잘 맞아야 그 느낌이 산다. 그래서 대사 하나하나 컨트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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