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촬영장 동행취재기 [3]
2004-01-30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안다는 교만에 대한 혐오, 그리고 자기연민

대폿집에서 1차 테스트 촬영이 끝났다. 친분이 있는 한 스탭이 너무 재밌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건넨다. “저거, 완전히 감독님이네요. 유지태씨가 하는 대사도 감독님이 하는 말씀하고 똑같아, 손짓도. 어쩌면 저렇게 닮았죠.” 이날 촬영 대본 역시 A4 2장짜리로 현장에서 감독이 바로 써서 건네준 것이다. 선화와 만난 다음날이다. 전날 밤 다들 취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긴가민가해서 문호의 기분이 별로 안 좋다. 문호는 삼각구도 안에서 어떤 모멸감을 느끼던 차에 돌잔치에 모여든 학생들을 우연히 만나 술자리까지 동석했다. 그는 제자들 사이에서 어떤 우월감을 느낄 수 있겠거니 했다가 그 기대감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을 겪는다. 이 순간의 문호가 딱 홍상수라는 것이다. 4분짜리 롱테이크의 각본은 이렇다.

술판이 간 지 꽤 된다. 문호와 일곱 학생들은 술을 마시고 있다. 문호가 뭔가 게임에 걸렸다. 술을 마셔야 되고, 지금 한잔을 마시고 있다. 다시 잔을 채워주는 오른쪽 옆의 학생. 두잔 째를 마시는 문호, 엄살을 피운다. “야, 두잔은 너무하다.” 그러는 사이 카메라 가까운 쪽의 이쁜이와 풍부감성은 손금을 잠시 보고 있었나 보다. 풍부감성에게서 손을 빼면서 말을 하는 이쁜이,

“손금을 어떻게 봐요?”

“그냥 술 마시면 조금 보이는 거 같애.”

“전에 인사동 가서 봤을 땐 남자한테 무조건 복종을 하라고 그러더라구요.”

“흐, 그래? 손금은 자기 식으로 보는 거야, 자기 생겨 먹은 대로.”

“그래, 손금도 때때로 바꿔진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사이 두 번째 술잔을 비운 문호에게 주책이 말을 하고, “인제 질문하세요.”

“그래, 그러면 누가 안 했니…. 경흰가?” 문호가 이쁜이쪽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경희란 호명에 이쁜이가 문호에게 눈을 주고 이쁜이와 풍부감성 사이의 대화가 끝난다.

“(경희에게) 너한테 할게, 그럼. 내가 하는 건 똑같애. 넌 마지막에 섹스한 게 누구고 언제랑 했니? 그때 기분도 어땠는지 얘기하고.” 문호가 이미 여러 번 한 질문을 반복하는 거 같다.

“선생님은 계속 그런 질문만 하세요?” 왕눈이가 한마디 한다. 그렇게 삐딱한 건 아니구.

“그래, 허허.” 문호는 상관없다. 취해서 약간 자폭적이다.

“딴 질문도 좀 하세요.” 주책이 말한다.

“해, 일단은. 질문한 거니깐.” 약간 짜증내는 척까지 한다.

“…딱 이틀 됐구요, 술이 조금 취했었는데, 남자가 원하는 거 같애서 그냥 한 거 같구요. 별로 느낌은 없었어요, 들어간 곳이 좀 더러웠거든요.”

“와!” 뭐 이런 탄성과 웃음이 교차된다.

“그러면 너 인제 술 마시고 질문하기.” 문호가 이어나간다.

“선생님 좀 저질 아녜요?” 삐딱이가 문호 확실히 들으라고 얘기한다. 저질은 저질이지만 그래도 선생인데 분위기가 좀 썰렁해진다. 그래서 일부러 웃는 학생도 있고.

“넌 뭐냐, 넌 저질 아냐? 넌 뭐 고질이야? 고질이 뭐야?”

“그냥 전 당신이 좀 저질같이 군다고 생각해서 얘기한 겁니다. 내가 고질이 아니구요. (옆의 다른 학생에게) 고질이 뭐냐, 고질이? 말도 고질이 뭐냐?” 삐딱이가 말한다.

“이런 씹새끼가… 니가 어디서 줏어들은 게 널 고질로 만드는 게 아냐. 너 책 많이 읽었어? 니가 읽은 그 책들이란 거 있지, 그게 다 죽은 새끼들의 찌꺼기야. 니가 믿는 것들이란 건 다 그런 새끼들의 자기 정당화야, 아전인수야, 알아! 니가 안데는 게 딱 니가 아는만큼 만 갖고 얘기하는 거야. 마, 우리가 뭘 아니, 뭘 확실히 아니? 왜 꼴값을 해. 씨발,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나 해!”

“그게 그러면 선생님 혼자서만 하는 생각인 거 같습니까?” 왕눈이가 눈빛이 날카로워져서 묻는다.

“뭐? 그런 건 아니지….” 문호가 갑자기 힘이 빠진다.

“그렇게 부정만 하면 어떻게 살아요? 부정한다는 게 자랑이 되진 않잖아요?” 풍부감성이 한마디 한다. 진지한 질문.

“어, 그래서 넌 부정없이 행복할 거 같애? 넌 너한테 행복의 근거가 뭐냐?” 문호가 말한다.

“선생님, 선생님은 왜 여학생들만 있으면 그렇게 목소리를 깔고 말하세요?” 주책이 분위기를 바꿀까, 하고 혼자 주책없이 웃으면서 말한다.

“제가 선생님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좀 문제가 있으세요.” 삐딱이가 마무리를 한다. 문호가 갑자기 히죽 웃는다, 갑자기 포기한다. 그리고는 눈을 막 후비기 시작한다. 눈에 뭐가 들어간 것같이. 학생들은 왜 그가 그러는지 아는 것처럼 그를 조용히 쳐다본다. 다만 이쁜이만이 조금 부산하게 몸을 움직이고 옷을 추스리고 그런다.

리얼리즘 - 표면을 따라 흐르는 삶의 불가해성

1차 테스트 촬영이 끝나자 모니터 앞으로 배우들을 다 불러모은다. 일단 촬영이 시작되면 오케이 사인을 낼 때까지 어김없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자, 이때 자기가 좀만 숙이고, 여기 좀 비키면 더 잘 보이겠지. 여러분이 하는 작은 동작, 조그만 행동 하나하나가 이유가 있는 걸로 합시다. 과장하지 말구요.” 2차 테스트 촬영이 끝나자 술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배우들에게 다가간다. “(이쁜이 보고) 자기, 얼어가지고 실력발휘를 잘 못하네. 술 좀 먹어.” 유지태에게 “좀 살살해. 목 쉬겠어. 몇번 가야 하는데” 하더니 옆 여학생에게 “자기도 술 좀 먹어” 한다. “자, 이쁜이랑 둘이 원샷.” 이 술판 뒤쪽에서 홀로 등을 보이며 밥을 먹는 배경을 만들어내는 엑스트라에게 다가간다. “평소에 이런 곳에서 드시는 것처럼 드세요. 진짜로. 자, 해보세요. 시작!” 엑스트라 하는 걸 보더니 연출부에 지시한다. “다른 분 데려와.” 다시 배우들에게 돌아간다. “지태가 소리 질러야 하니까 초반에 끝내야 하거든. 그러니까 술 미리 먹어. (술 마실 배우 4명을 지정한다) 작은 거에서 재미를 느끼면서 해줘요. 너무 가라앉지 말고. 콧속에 코털이 보이면 웃기잖아. 그런 거. 이 테이블 만지면 차잖아. 그런 느낌들. 카메라 있으니까 어려워도 작은 것에서 재미를 느끼면서. 저기 술 비었다. 따라줘. 자, 지태 빼고 거국적으로 한잔씩 합시다. 원샷. 아, 그리고 이 두 사람, 저쪽 대사할 때 건배하지 마.” 마지막으로 밥값 계산하고 나가는 두명의 엑스트라를 점검한다. “자, 두분 출발시켜봐. (연출부에게) 저 아저씨, 왜 이렇게 문을 오래 붙잡아. 그냥 나가면 되지.” 그러면서 감독이 직접 문 열고 나가는 걸 연기해 보인다. 이어서 등 보이며 밥 먹는, 교체된 엑스트라에게 유지태가 고성을 내지를 때의 리액션을 지시한다. 고개 돌렸다가 되돌아오는 속도를 일러준다. 첫 번째 촬영이 끝났다. “눈동자 하나하나 움직이는 것도 이유가 있는 거고, 상대방의 움직임에 진짜로 반응합시다. 지금 4분 정도 나오는데 30초만 줄입시다.”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촬영이 끝났지만 오케이 사인은 나지 않는다. 감독이 이쁜이 자리에 앉아 풍부감성에게 말한다. “너무 취한 척 하지 마. 영화 같잖아.” “진짜로 취했어요.” “풀어지되 맘속에 진짜 진지하고 겸손하면 대사 타이밍 안 놓치거든. 갑시다.” 다시 촬영에 들어간다. 여덟 번째, 취해서인지 초반보다 대사를 주고받는 타이밍이 어긋난다. 유지태의 감정이 한껏 고조될 무렵 갑자기 감독이 촬영을 중단시킨다. “컷, 다 틀렸어요. 다!” 술기운에 얼굴이 벌겋게 오른 유지태가 민망한 듯 한마디 한다. “스탭 분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열 번째부터는 모니터를 연출부에게 맡기고 카메라 옆에 선다. “자, 조금만 잘해봅시다.” 열네 번째 테이크를 넘어가면서 배우들의 집중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열여섯번을 찍고 나서 촬영을 끝낸다. 그제서야 맘에 들었나 싶은데 오케이 사인을 낸 것은 첫 번째 테이크다. <여자는…>의 촬영이 시작된 이래 한컷을 찍는 데 10번은 기본이다. 일부 스탭끼리는 스무번 촬영에 오케이가 날 경우 “두번에 끝냈다”고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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