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촬영장 동행취재기 [5]
2004-01-30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현장성 - 창작의 고통과 즐거움

2004. 1. 5 37회차 촬영장

부천에서의 촬영 마지막날. 오전 10시가 조금 넘자 배우들이 나타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대본은 A4 1장짜리다. 이날도 2컷을 찍는다(여느 영화라면 하루에 10컷 정도는 찍는다). 배우들이 대본을 열심히 보기 시작하고, 감독은 연출부를 데리고 동선을 점검한다. 갑자기 배우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형, 시나리오 봤지. 오늘, 고생 좀 하겠네.”(유지태) “그러게. 이거 어떤 표정을 해야 되나.”(김태우) 그들이 말한 대목은 이런 것이다.

약수물이 가득 담겨진 보온병을 들고 내려오는 선화, 한발 뒤로 따라 내려오는 헌준. 오른손을 가슴에 대보는 헌준. 몸이 너무 오래 지속된 긴장에 저절로 이상현상을 보이는 것. 심장이 이상하게 벌럭벌럭 뛰는 거 같고, 아, 내가 참 고민 지독하게 하고 있구나, 하면서, 그런 게 이렇게 몸으로 바로 나타난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그런 표정. 어이없고, 피곤하고, 비참하고.…

홍상수 감독은 여느 때처럼 엷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다. 초등학교 담벼락에는 까치, 하니 등 국내산 만화의 캐릭터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배우들에게 그걸 가리키며 농담을 건넨다. “이 남자아이들 그림 말야. (관객이) 우리가 그려놓은 걸로 생각하면 안 되는데. 저기 도망치는 남자아이, 어제 저거 보고 얼마나 웃기던지.”(이날 촬영분에 헌준이 선화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이 있었다.)

첫 번째 컷은 리허설 3번, 촬영 테스트 3번, 슛 7번에 끝났다. 성현아에게 걸음 바꾸는 방향과 타이밍까지 일러주는 섬세함은 여전하다. 오후에 두 번째 컷이 이어졌다. 리허설 4번, 촬영 테스트 2번, 슛 10번에 끝났다. 리허설 때 성현아에게 했던 동선 지시의 하나는 이렇다. “하나, 둘, 셋, 넷 하고 고개 돌리고. 이건 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는 거고, 자기 관심은 저쪽(헌준이 달려간 곳)에 있는 거야.” 오후에 찍은 장면은 180도 팬(Pan)으로 카메라가 많이 돌아간다. 그러고보니 유독 팬이 많다. 한 스탭이 “이번 영화의 비주얼 컨셉은 팬에 있다”고 할 정도다.

“첫날 써보니까 좋더라.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다. 사람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니까 자꾸 팬을 쓰게 되는 것 같다. 그전에는 스냅숏처럼 고정된 구도를 주로 썼는데. 줌인(Zoom In)은 촌스러워서 좋을 것 같다. 아직 쓰진 않고 있으나 언젠가 쓸 것 같다.”

다섯 번째 영화를 찍으면서 그제서야 팬을 써보고, 그 이후에야 줌을 써보겠다고 하는 감독이 또 있을까. 그런데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살인의 추억> 등을 통해 충무로의 정상급 촬영감독으로 인정받는 김형구씨다. 조명은 그와 함께 파워콤비를 이루는 이강산 조명감독. 이들이 자연광의 롱테이크로 알려져 있는 홍상수 감독과 함께한다는 게 특별해 보인다.

“정말 재밌다. 뭔가 예술가 같다. 그날그날 시나리오를 받는 게 현장성을 살리는 데는 효과적이겠으나 배우와 스탭에게는 무척 힘든 일이다. 촬영쪽에선 어떻게 찍어야 하나 고심해도 사전에 준비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내가 뭘 주지 못한다는 느낌에 미안한 맘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감독의 요구로 어떤 기술적 표현은 모두 다 배제했다. 예컨대 현재는 겨울이고, 회상은 여름이어서 표현 기법에서 달리 가고자 했으나 홍 감독이 그걸 나눠 가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 거의 같은 시간대로 가고 싶다며 똑같이 찍자고. 촬영 시작하기 전에 감독이 그림 이야기를 했다. 세잔의 느낌이 어떻겠느냐고 해서 세잔의 책을 사서 보기도 했다. 아무튼 흥미로웠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와 비슷한 듯 보여도 180도 다르다. 허 감독도 콘티는 없지만 연기도 촬영도 그냥 알아서 해보라고 한다. 반면 홍 감독은 굉장히 컨트롤한다. 아이디어를 많이 내라고 하지만 자기 생각이 거의 정해져 있다. 하다보니 왜 이렇게 하자고 했는지 알게 됐다. 그래서 재밌다. 미리 알지 않고 하면서 알게 되는 게.”(김형구 촬영감독)

유머 - 우물에 빠진 돼지가 강원도에서 수정을 만나서 발견한 것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몇 차례 촬영현장을 훔쳐본다고 홍상수 창작의 비밀을 알게 되리라는 건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그의 머리 속에 퍼질러 앉아 전 과정을 지켜봐야 가능할 일이다. 그가 창조해내는 수많은 표면의 순간들이 어떤 연유로, 어떤 찰나에서 포착되고 배치되는지 알아내지 않고서는 배우들에게 몸짓 하나, 억양 하나 체크해가며 10번 이상씩 같은 장면을 찍어대면서도 오케이 사인을 내지 않는 심중을 헤아릴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사실적’인 장면 하나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감독의 에너지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넘치도록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홍상수 영화를 부조리한 일상과 인간을 탐구하는 현대영화라고 할지언정 리얼리즘영화라고는 하지 않지 않는가. 어쩌면 이건 그가 이미 준 답을 뒤늦게 현장에서 확인하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는 98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각자가 바라보는 게 리얼리티일 뿐이다. 둘이서 같은 컵을 놓고 천년 동안 얘기해도 둘이 보는 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사실적 묘사란 가능하겠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리얼리티란 없는 거다. … 감각적 경험없이 서로 다른 마인드끼리 싸우면 백날 가야 삶에 대한 관념적, 언어적 해석만 하게 된다.”

홍상수 감독이 냉소를 거둬들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그의 영화가 갈수록 유머를 구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비하면 <생활의 발견>에 이르러선 생경스러울 만큼 엉뚱하고 포복절도할 유머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에 미래다>에 오면 더욱 많은 유머로 넘쳐난다고 한다. 순서편집을 본 배우도, 프로듀서도, 마케팅팀도 이구동성이다. 갑자기 지독하리만치 치열하게 인간의 끔찍한 일면을 드러내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어느 순간부터 유머 넘치는 작품을 만든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거기다가 <여자는 남자에 미래다>에는 회상, 상상, 꿈이 있다. 홍상수 감독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는 거짓 희망, 거짓 환상과는 물론 다를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영화가 홍상수식 영화의 완결판이 될 것이라고 조심스런 말을 꺼낸다. ‘우물에 빠진 돼지가 강원도에서 수정을 만나서 발견한 것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유머를 곁들여서. 안타깝게도 이걸 확인하는 건 오는 5월이 되어서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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