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홍콩에 대륙의 바람이 분다 [3]
2004-02-20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아시아 영화계의 역할 모델, 에드코필름 대표 빌 콩

다양한 영화를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홍콩에서 만난 영화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 특히 평론가나 학계쪽 인사가 빌 콩을 바람직한 역할 모델로 거론했다. 좋은 영화를 알아보는 눈이 있으며 할리우드 시스템의 장점과 약점을 체득해 국제적이고 미래적 비전을 갖고 있다는 이유다. 에드코필름의 대표인 빌콩은 <와호장룡> 프로듀서로 일약 세계적 인물이 됐고, 장이모의 <영웅> 1, 2편 제작에 이어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감독 곽재용, 출연 전지현·장혁)에 전액 투자하면서 국내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화제의 인물이 됐다. 빌콩은 10개의 멀티플렉스와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를 비롯해 제작과 배급까지 영화의 모든 분야에 관여하면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지만, 그가 취하는 노선은 한국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 만큼 도전적인 동시에 모범적이다. 홍콩의 최고층 빌딩 IFC(국제무역중심, 88층) 안에는 그가 운영하는 멀티플렉스 가운데 하나인 ‘팰리스극장’이 있다. 대리석으로 치장된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그곳의 6개 스크린 중 하나는 늘 고전영화나 예술영화가 상영된다.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모습 때문에 그가 취하는 노선을 두고 현지에선 “대안적 배급·극장 체인”이라고 언급하곤 한다. 독립영화로 제작된 프루트 챈의 <메이드 인 홍콩>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 그만이 극장에 걸며 해외에 알렸고 영화는 성공했다. 취재팀이 홍콩에 체류하는 동안 해외에 머물던 그가 홍콩에 들른 시간은 고작 6시간. 인터뷰는 그 사이에 아주 어렵사리 이뤄졌다. “난 매우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라며 거듭 사진 촬영을 사양하더니 취재팀과 함께 찍는 걸로 양해를 해주었다. 홍콩에서 만난 영화인 중에서 가장 ‘맘좋은 아저씨’라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97년 홍콩 반환은 영화계에 긍정적 영향을 준 것인가.

=나는 홍콩 안에서 반환이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어떠한 보고도 듣거나 본 적이 없다. 부정적인 영향은커녕 좋은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시점에서 봐도 중국과 영화적 교류의 물꼬가 터지고 활성화되는 계기가 됐기 때문에 매우 긍정적이다.

-홍콩영화의 미래에 대해선.

=역시 긍정적이다. 나는 항상 긍정적 관점에서 홍콩영화를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홍콩은 항상 중국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홍콩영화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영화에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존재 때문에 홍콩을 포함한 아시아영화 전체의 미래는 상당히 밝다.

-과거와 비교해봤을 때, 홍콩영화가 예전만 못한 건 사실 아닌가.

=아마도 전반적으로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국의 영화산업이 그간 성장해왔고, 홍콩의 스타들도 예전만큼 매력적이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최근 <무간도>나 <영웅> 같은 영화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좀더 선별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한해 60여편이 외국으로 수출됐지만 지금은 한해 15편 내외다. 이 영화들은 여전히 훌륭하다. 전세계 모든 영화인들에게 핵심시장은 자국시장이다. 최근 수년 동안 홍콩에서 지배적인 장르는 지역색이 강한 코미디였다. 제작비가 저렴하고 그에 비해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외국 관객이 이런 영화를 좋아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 또한 홍콩영화가 해외시장을 잃은 이유 중의 하나다. 다른 시장이 줄어들었지만 지금은 거대한 중국시장이 존재한다.

-<와호장룡>으로 당신은 아시아 영화계에서 영향력이 커졌고, 많은 영화인들의 역할 모델이 됐다. 당시 <와호장룡>의 성공을 기대했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수정이 필요하다. 영화의 성공은 어떤 작품이든 감독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제작자의 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와호장룡>이 성공한 것은 리안의 재능과 능력 덕분이고, <영웅>이 성공한 것은 장이모 덕분이다. 모두 감독의 비전과 능력에 달린 것이다. 모든 영화에서 감독이 공헌한 바는 100% 이상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만 그런 훌륭한 감독들과 일할 수 있었던 점에서 운이 좋았을 뿐이다.

-<와호장룡>은 누가 먼저 제안했나, 리안이 굳이 당신과 일하기로 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리안은 오랫동안 그 작품을 하고 싶어했다. 내가 아니었어도 훌륭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배급업으로 영화를 시작했고, 그동안 홍콩과 인근 지역에 리안의 모든 영화를 배급해왔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였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장이모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고, 어떤 감독과 일하고 싶은가.

=임호, 서극, 티엔주앙주앙 등과도 일해왔는데 내가 감독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론 그들이 나를 선택하기도 한다. 영화를 크게 구분하자면 대중영화와 영화제를 위주로 소개되는 예술영화로 나뉜다. 이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나는 두 종류의 영화들을 다 한다고 볼 수 있지만 작품마다 다르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감독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그렇다면 어떤 관객과 어떻게 만날 것인지 분명히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다만 한 가지, 나는 항상 감독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문화와 틀을 벗어나서 그 이상을 추구하도록 격려한다. 그것이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최근 아시아영화는 제작이나 배급에서 교류가 활발하다. 유럽처럼 통합된 공동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고 보는가.

=글쎄. 유럽의 경우 특수한 경우라서. 유럽 정부들의 정책이 장려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아시아에서 비슷한 방식의 영화적 교류나 시장 통합이 이뤄질 수 있을지, 또 그게 바람직한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공동제작, 공동시장의 가능성이나 전망 역시 근본적으로는 필름메이커의 능력과 관심사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에 주목하고 그것을 훌륭하게 만든다면 공동제작, 공동시장은 자연스럽게 형성될 거다.

-좀더 다문화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인가.

=다문화적이든 문화적 섞임이든 그런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일부 영화인들은 여러 나라의 배우들로 캐스팅을 뒤섞는 것으로 이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해외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중요한 건 많은 사람들이 지역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캐릭터, 정서를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다. 예를 들어 한국의 <올드 보이>를 보자. 영화 속 상황에 처한 남자주인공의 심정과 행동은 어느 나라에 사는 누구라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매우 보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건 이런 거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 홍콩에서 제작되고 있는 작품들 중에서 기대되는 것은.

=몇몇 관심이 가는 작품이 있지만 그보다는 감독을 언급하는 게 낫겠다. 왕가위, 진가신, 서극, 두기봉, 유위강 등은 언제나 기대되는 감독들이다. 물론 작품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이들의 작품은 여간해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런 감독이 홍콩에서 15∼20명 정도 되지 않을까. 아참, 으로 이번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실비아 창도 훌륭한 감독이다.

-제작비 조달에서 한국은 갈수록 ‘극장 자본’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홍콩에서 영화 투자자의 성격은 어떤가.

=투자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한국은 큰 축복을 받고 행운을 누리고 있는 나라다. 홍콩과 비교하면 한국의 영화 투자자들은 영화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인 것 같다. 하지만 홍콩에서 모든 투자자의 관심은 오직 돈뿐이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첫마디가 손해를 봤니 안 봤니, 돈을 얼마나 벌었니 잃었니 하는 것뿐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굉장히 희귀하다. 그 기회와 축복을 잘 이용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충고해주고 싶다. 영화에 대해 열정이 있는 투자자가 있다는 건 아주 중요한 사실이니까. 만약 이런 성격의 돈이 사라진다면 한국 영화계는 순식간에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지 모른다. 마치 97, 98년의 홍콩처럼. 나는 <와호장룡>을 만들 때, 그런 투자자를 만나기가 힘들었고 돈을 구하려고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다. 한마디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영화인들은 투자자들에게 책임감을 크게 느껴야 한다. 좋은 투자자가 손해보는 일은 결코 없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신조다.

-홍콩에서 투자 자본의 성격이 변하고 있지는 않은가.

=변천하고 있을까? 글쎄. 미디어 아시아가 증시에 진입하기 이전에 모든 영화 투자자본은 개인 혹은 개인기업에서 나왔다. 미디어 아시아가 최초의 기관투자자가 됐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도 개인투자가 홍콩 영화자본의 지배적 추세다. 미래에는 자본의 성격이 바뀌기를 희망하지만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CEPA 발효로 중국 영화시장이 홍콩에 공식적으로 개방됐으나 극장 수익의 투명한 처리와 홍콩과 다른 검열 기준이 여전히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민감한 질문이다. 먼저 검열에 대해 생각해보면, 중국 당국에 홍콩 영화계의 이익이나 등급기준은 중요하지 않다. 극장 수익의 투명성이나 해적판의 문제도 중국 정부의 의지에 달렸다. 대만의 경우 수년 전까지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으나 개선을 기대하기는 곤란했다. 그런데 불과 수년 사이 모든 문제가 풀렸다. 정부가 나선 결과다. 이처럼 중국도 정부의 판단과 의지에 달렸다. 지금은 유연한 검열 기준에 의해 영화를 감상할 때가 안 됐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투명성 문제나 해적판 근절도 당국이 나서서 처리하겠다고 판단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CEPA도 그렇지만 홍콩국제영화제, 필름마트 등 정부정책의 변화가 많다.

=많은 도움이 된다. 지금 그런 시도들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전에는 없었던 것들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영화산업은 해당 정부의 적절한 지원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영화산업이 향유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홍콩에는 오랜 기간 정부의 공식적 지원이 없었다. 이제 시작이어서 긍정적이다.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를 운영하면서도 멀티플렉스의 일부를 시네마테크처럼 활용하는 까닭은.

=나는 배급업자로 영화에 입문했고 지금은 극장주이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 산업적 견지에서 책임감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다양한 영화를 관객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어떤 책임감이 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에드코필름의 식구들 모두는 영화에 대한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예술영화가 홍콩에서 성공하는 걸 지켜보는 게 특별히 즐거운 일이다. 최근 <굿바이 레닌> 같은 영화가 홍콩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경우가 그렇다. 시네마테크와 멀티플렉스 내의 예술영화, 고전영화 전용스크린은 늘 돈을 잃게 마련이다. 하지만 책임감과 열정 때문에 그런 일을 멈출 수가 없다.

-홍콩과 해외의 거주 비율이 어떻게 되나.

=반반 정도다. 내가 앞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늘 자신의 한계나 틀을 넘어서 그 이상을 바라보라고 말한다고 했듯이 여행을 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늘 집에만 있어서야 자신의 바깥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겠는가. 일견 내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프로듀서로서 나 자신이 부당하게 과대평가되고 있는 걸 매우 불편하게 느낄 따름이다. 나는 나 자신이 감히 최고의 배급업자임을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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