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홍콩에 대륙의 바람이 분다 [1]
2004-02-20
글 : 정진환
정리 : 이성욱 (<팝툰> 편집장)
홍콩 영화산업 진단- 8일간의 현지 취재

신년호 특집이었던 ‘아시아 네트워크’ 후속으로 홍콩 영화산업과 홍콩 시네마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예측했던 대로 홍콩 영화계는 올해 중국과의 무역장벽이 사라지면서 ‘대륙으로, 대륙으로’를 외치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십년 동안 할리우드 메이저의 아시아 프로덕션을 대행해온 살롱 필름즈는 한국 영화계에 의미심장한 제안을 우회적으로 건네왔으며, <와호장룡> 이후 ‘아시아 영화계의 파워맨’으로 부상한 에드코필름의 빌 콩은 아시아 영화인의 역할 모델로 모자람 없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화라는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서는 홍콩국제영화제와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실무자가 97년 이후의 홍콩영화를 개괄해주었고, 주목할 만한 신예 감독들을 선별하고 소개해주는 작업은 홍콩에 거주하는 미국 평론가가 ‘제3자’의 입장에서 해주었다.

"중국은 나의 조국, 나의 시장"

홍콩영화계, 중국과 경제 파트너십 협정 맺고 시장 잡기 혈투

CEPA 체결 - 중국 시장이 온다!

설 직후의 홍콩은 긴 연휴의 달콤함에 여전히 잠겨 있는 듯했다. 그들을 서둘러 깨우는 건 대륙에서 번져오는 조류독감의 그림자였지만 세계 최대의 비디오·DVD 체인점 ‘블록버스터’가 홍콩사업을 접고 더불어 중국 진출 계획도 포기하기로 했다는 뉴스도 한몫했다. 각종 매체들이 홍콩의 임대료가 너무 비싸고 중국의 해적판 때문에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블록버스터’의 불평이 의미하는 바를 분석하느라 분분했지만 어쨌든 유쾌한 소식일 리 없다. 홍콩영화의 박스오피스 수입은 1993년 최고점을 기록한 뒤 99년까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12억4천만홍콩달러(약 1984억원)에서 3억8300만홍콩달러로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작품 수는 93년 242편에서 2001년 126편으로 줄었다. 반면 해외영화의 박스오피스는 5억홍콩달러 이상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이례적으로 수익이 늘어난 해는 주성치의 <소림축구>가 바람을 일으킨 2001년이다. 이 해에는 4억5천만홍콩달러를 기록했다. <무간도> 시리즈가 기염을 토한 2002년, 2003년 역시 홍콩영화는 체면치레에 급급했고 2003년 제작편수는 70편이 채 못 된다.

암운 가득한 홍콩 영화계에 비추어봤을 때,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1월26일치 1면에 실린 1단 기사는 의미심장해 보인다. 설 연휴 동안 중국 대륙에서 홍콩을 찾은 관광객이 전년 대비 31%(8만4천명) 증가한 27만3천명에 이르며 이들의 소비 지출로 상당한 경제효과가 기대된다는 것이다. 침체와 위기라는 대세에 큰 변화는 없지만 2004년의 홍콩 영화인들은 이같은 급격한 변화를 바탕으로 구세주를 만난 듯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중국이다. 홍콩과 중국 본토 사이의 자유무역협정이라 할 긴밀한 경제 파트너십 협정(CEPA: Closer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이 올 1월 발효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중국 본토와 홍콩의 합작영화는 참여인력과 제작비 투자비율에 관계없이 무조건 중국영화로 분류돼 20편으로 제한된 해외영화 배급 쿼터에서 자유로워졌고, 조인트 벤처에서 49%로 제한됐던 소유권 지분제한도 최대 75%까지 높일 수 있게 됐다. 13억 소비자로 들끓는 거대한 대륙시장이 외국보다 한발 앞서 홍콩에 활짝 열렸다는 뜻이다. 때맞춰 변화는 곳곳에서 보인다. 방송사 TVB를 운영하며 방송에만 몰두하던 왕년의 거대 스튜디오 쇼브러더스가 세계 최고 설비의 종합스튜디오 ‘홍콩무비시티’를 올해 안에 완공하고 영화제작 재개를 포함해 중국을 겨냥한 영화사업에 다시 뛰어들며, 홍콩 최대의 DVD 배급사이자 제작사인 유니버스 인터내셔널 홀딩스는 중국 광저우를 시작으로 상하이, 베이징에 직영 극장을 짓기 시작했다. 골든하베스트도 지난해 12월 홍콩 인근의 선전에 12개 스크린의 멀티플렉스를 짓고 오는 12월 7개 스크린을 더 늘릴 계획이며, 베이징의 차이나 필름 그룹과 배급업을 위한 조인트벤처 계약을 맺었다.

<와호장룡>에 이어 장이모의 <영웅>과 제작 중인 <십면매복>(<영웅2>)의 프로듀서이자 홍콩 에드코필름의 대표인 빌콩의 표현은 선언적으로 들린다. “나는 홍콩 영화인과 영화계가 어떻게 중국에 통합되어 가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가장 중요한 시장이자 투자원이 됐다. 이제 홍콩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홍콩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한 부분일 뿐이다.”

CEPA가 홍콩과 중국 사이에 합작 및 배급·극장분야에 뚜렷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면, 홍콩 내부의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홍콩국제영화제가 내년부터 민영화되며 같은 해부터는 6월에 열리던 필름마트가 영화제 곁인 4월로 옮겨와 시너지 효과를 노린다. 최근에는 ‘필름 개런티 펀드’가 생겨 제작비의 3분의 1을 확보하면 나머지를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는 통로가 생겼고, 법인세의 일정 부분을 영화제작에 투자하면 세금을 감면해주는 법이 통과됐다. 이쯤에서 홍콩 영화산업 안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보자.

▲ 멀티플렉스 1개관을 예술영화 및 고전영화 상영관으로 활용하는 에드코필름의 팰리스극장

▲ 올해 세계 최고 수준의 종합스튜디오 '홍콩무비시티'를 완공하면서 영화제작을 재개할 움직임을 보이는 쇼브러더스

45년 만의 변신, 살롱 필름즈가 변한 까닭

홍콩의 영화사는 ‘패밀리 비즈니스’인 경우가 흔하다. 살롱 필름즈도 그랬다. 회장 찰스 왕과 대표 프레드 왕은 형, 아우 사이로 두 형제는 1949년 중국 간쑤성에서 홍콩으로 건너왔다. 사진현상소에서 시작해 1959년 파라마운트 영화의 홍콩 로케이션 대행을 하면서 파나비전 카메라의 아시아 독점권과 홍콩의 다양한 기술스탭을 갖추고 할리우드의 현지 스튜디오 구실을 해왔다. 최근작으로는 <툼레이더>와 <러시아워> 1, 2편이 있고 현재는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울트라 바이올렛>(제작 콜럼비아, 제작비 4000만달러)을 진행 중이다. 홍콩에서 45년 동안 배급업이나 극장사업 등에 눈돌리지 않고 유일무이하게 한우물만 파온 살롱이 변신을 시작한 건 중국 때문이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에 이곳과 똑같은 멀티미디어센터를 만들고, 배급 및 극장사업에 뛰어들 채비를 끝냈으며 처음으로 자체 영화제작에 들어갔다. 영화제작은 물론 배급과 극장은 모두 디지털 방식이다. 중국과 패키지 딜로 계약한 HD영화 10편의 납품이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상하이에 지은 멀티미디어센터는 CEPA가 직접적 원인이다. CEPA로 중국에서의 제작이 늘어날 것이니까 당연히 후반작업 시설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봤다. 긴 세월 동안 배급이나 극장쪽으로 사업을 확장하지 않은 건 차근차근 우리가 하던 거 하면서 세상을 따라갈 뿐이라는 원칙 때문이었다. 세상이 변했다. 이제 자체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제작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것들 모두 중국에서 진행한다.” 넉살좋은 웃음을 만면에 풍기는 찰스 왕에게 중국이 무슨 의미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조국이고, 조국 없이는 나도 없다. 내가 그 일부임이 자랑스럽다. 우린 오랫동안 할리우드와 공동작업 경험, 커넥션, 철학 등을 유지해왔는데 중국의 영화산업이 새롭게 시작되는 이즈음, 양쪽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하게 된 게 영광스럽다.”

낯간지럽게 조국 운운하긴 했지만 중국에 대해 찰스 왕 정도의 기대감 혹은 절박함을 가지지 않은 홍콩 영화인은 만나보기 힘들었다.

‘웰메이드’ 바람 솔솔

한국에선 CJ엔터테인먼트나 시네마서비스 정도의 메이저에 해당하는 유니버스 인터내셔널 홀딩스는 98년 증시에 상장돼 홍콩 영화산업의 자본구조에 선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증시에 상장된 영화사는 최근 <쌍웅>으로 재미를 본 ‘중국성’(China Star)과 ‘메이아’(Mei Ah)를 포함해 세곳이다). 올해 CEPA 발효를 맞아 모험적인 사업확장을 꾀한 이 회사 역시 형제가 경영하는 ‘패밀리 비즈니스’다. 동생 앨빈 램의 명함에는 ‘운영총재’라고 적혀 있다. 올해에는 중국에서 시작한 극장사업 부문에서 들어올 적잖은 수입을 기대하는 눈치다. “미국과 비교해보면 중국의 극장 보급률은 수천분의 일에 불과하다. 미래 수입률이 엄청날 것이다. 물론 중국의 극장 수입이 온전히 회수되지 않는 불투명성이 골칫거리이긴 하지만 이는 좀더 광범위하고 직접적인 극장 운영을 통해 해결해야 할 것이다.”

중국 시장 변화

디지털 시네마 열풍

지난해 홍콩필름마트의 규모는 이례적으로 40%나 증가했다. 홍콩필름마트는 TV마켓이기도 해서 HD 콘텐츠에 목말라 하는 중국의 방송 관계자들이 대거 몰려온 것이다. 중국은 VCR 단계없이 DVD 시대로 건너뛴 것처럼 영화도 극장도 디지털 시대로 도약해버렸다. 중국의 성마다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방송사에서 자체 제작해 방송하는 HD영화와 HD드라마의 수요는 엄청나서 미처 채우지 못한 제작 물량이 홍콩으로 넘어오고 있다. 감독이나 기술 스탭이 홍콩에서 장기간 보이지 않는다면 중국에서 HD영화나 HD드라마를 찍고 있다고 보면 십중팔구 맞는다. 80년대 홍콩 뉴웨이브의 주역이었던 관금붕 감독 역시 중국에서 방송용 HD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살롱 필름즈 사무실을 찾았을 때, 상하이 촬영을 앞두고 <울트라 바이올렛>의 스탭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킬 빌>의 짝퉁영화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울트라 바이올렛>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슈퍼 HD급 카메라인 HDW F-950을 사용한다. 이 기종이 쓰이는 건 <스타워즈 에피소드3> 이후 두 번째이며 살롱 필름즈는 이미 이 기종을 확보해둔 상태다.

홍콩무비시티의 기본 컨셉도 디지털 시네마를 겨냥하고 있다. “5개의 스튜디오는 할리우드와 달리 각각 방송사의 부조종실 같은 기능이 달려 있고 모든 후반시설이 디지털로 연결돼 단계마다 공정을 확인해가며 작업할 수 있다. 심지어 위성으로 연결해 미국에서의 촬영 분량과 연계해가며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 CG와 실사 부분을 즉석에서 합성해보는 검증 과정을 거치면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다.” 할리우드에서 건너와 2년째 전자장비 설계와 운용을 책임지고 있는 에릭 스탁의 설명이다.

통역: 권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