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홍콩에 대륙의 바람이 분다 [2]
2004-02-20
사진 : 정진환
정리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아시아 영화제작의 허브를 꿈꾸는 ‘홍콩무비시티’ 첫 공개

▲ <무간도> 시리즈로 돈과 명성을 동시에 얻은 홍콩의 메이저 ‘미디어아시아’의 야심찬 신작은 자동차 경주를 소재로 한 액션물이다.

▲ 미디어아시아의 배급·판매 책임자 제프린 첸은 아직은 미성숙한 중국시장에 서둘러 진출하기보다 시간과 돈을 더 들이더라도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드는 쪽으로 올해 사업계획을 잡고 있다고 했다.

그는 “향후 10년 안에 (중국이란) 큰 시장이 생길 것이지만 나쁜 영화의 미래는 없다”며 좋은 영화 만들기를 강조했다. 시나리오 없이 트리트먼트 몇장만 쥐고 촬영에 들어가는 등 기획단계와 포스트 프로덕션의 구분이 애매하기 일쑤인 홍콩의 날림공사 관행은 과연 사라질까? 홍콩에는 평균 제작비라는 게 없다. 5억원이든 50억원이든 책정된 제작비에 맞추어 찍을 뿐이다. 사석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최근 중국에서 한달 동안 30회 촬영을 나간 홍콩영화가 제작비를 6억원에 맞추는 걸 봤다. 열흘 만에 한편을 뚝딱 만들기도 한다. 퀄리티야 어찌됐든 영화 기능올림픽이 열린다면 홍콩이 죄다 금메달을 차지할 것”이라고 했다. 유니버스의 요즘 제작비 규모는 30억원에서 80억원 사이다. “더 많은 예산을 쓸 수 있고 다양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순환구조를 만들 기회가 왔다. 지난 3년 동안 제작비가 가파르게 상승해 10억∼30억원 정도 올랐지만 중국이란 큰 시장이 하나 더 생긴 셈이어서 쓴 만큼 벌어들일 여건이 생겼다고 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훌륭한 감독의 확보이며 그 다음은 시나리오 단계에 만전을 기해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성룡과 <뉴 폴리스 스토리>를 찍는 진목승이나 대니 팡, 옥사이드 팡 형제 같은 감독들과 향후 2년간 1∼2편씩 만들기로 했다.”

<무간도>의 투자·배급으로 명성을 얻은 ‘미디어 아시아’는 유니버스와 어깨를 견줄 만한 메이저다. 이 회사 역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됐다고 역설했다. “<무간도>가 우리의 제작이나 투자 방향에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아시아에서 우리 회사의 위상이 한 단계 격상됐음을 곳곳에서 느낀다. 이제 우리의 기본 전제는 <무간도>처럼 독창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됐고, 그 다음 원칙은 국제적으로 통할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한다는 거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작품을 1년에 2∼3편씩 지속적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아울러 다양한 중저예산의 영화도 기획하고 있다.”(배급·판매 책임자 제프리 챈)

그렇지만 이들 메이저가 즉각 ‘환골탈태’한 것 같지는 않다. 미디어 아시아는 <무간도>의 교훈을 실전 응용에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있다. 각각 크리스마스와 설을 겨냥해 만든 로맨틱코미디 <매직 키친>과 양자경을 주연으로 한 SF무협 대작 <실버 호크>의 흥행 성적은 미디어 아시아를 실망시켰다. 게다가 이 두 영화는 홍콩시네마의 몰락을 재촉한 진부한 장르의 뻔한 이야기로 치부되고 있었다. 홍콩 영화계의 구태 중 하나가 몇 안 되는 스타들을 메이저가 싹쓸이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슈퍼스타가 부재한데다 그나마 메이저의 싹쓸이로 ‘자원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제작비의 60∼70%를 캐스팅에 쓰게 되니 프로덕션의 질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홍콩의 대표적 매니지먼트사인 엠퍼러 그룹과 유니버스는 현재 인기 절정을 누리는 10대 아이돌 스타 ‘트윈스’를 과점하고 있다. 엠퍼러는 지난해 ‘트윈스’를 주연으로 한 <트윈 이펙트>를 제작해 흥행 톱 10에 진입시키는 재미를 봤다. 유니버스는 트윈스뿐 아니라 5∼6명의 스타와 연간 몇편을 찍는다는 패키지 계약을 맺고 있었지만 다른 작품을 해선 안 된다는 배타적 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고 설명한다. 물론 그들이 다른 작품을 할 시간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엠퍼러그룹이 작품 기획안이 나오기도 전에 이효리와 2편의 영화를 찍겠다고 계약부터 하는 것도 이런 경우다). 유니버스는 또 <소림축구>의 아류가 명백한 <공부축구>(쿵푸 사커)를 제작 중이기도 하다.

‘아시아 영화제작의 허브’를 꿈꾸며 최소 1천억원 규모의 후반제작기지로 추진 중인 ‘씨네포트 부산’의 경쟁자로 지목받은 게 ‘홍콩무비시티’와 ‘사이버포트’다. 무비시티에 2400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는 쇼브러더스는 취재 요청을 순순히 받아줬고,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다른 홍콩영화 관계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8개월 전 공사가 시작된 이래로 무비시티의 실체가 공개된 적은 없다고 했다. 의아스러운 건 다른 데 있었다. 어떻게 무비시티의 완공이 CEPA 발효와 딱 맞아떨어지느냐는 것이다. CEPA의 실행이 애초 예정보다 2년 앞당겨졌는데다가 “중국시장에 홍콩영화가 진출하는 것이 상당 부분 제약을 받아오다가 최근 들어 업계의 강력한 로비와 홍콩 자치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많이 완화됐다”는 홍콩 중문대 영화과 교수인 샘호의 말을 듣자 모종의 거래가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운이 따랐을 뿐이다. 1998년에 정부가 신계지 일부를 영화업계에 불하해준 게 계기였다. 불하받은 땅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 홍콩무비시티를 계획하게 됐다. 사실 이걸 기획할 때만 해도 정부가 많은 지원책을 말했지만 실제로 이뤄질지 회의적이었고 그것과 상관없이 그냥 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연찮게 CEPA와 맞아떨어졌다. 영화업계의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서광이 비추는 듯하다.”(홍콩무비시티 책임자 레이먼드 챈)

6월부터 차례로 설비를 갖출 포스트 프로덕션 빌딩보다 눈길을 끄는 건 HD와 특수촬영 환경에 최적화된 소·중·대·초대형 사운드 스테이지(스튜디오) 5개동과 더빙 씨어터였다. 좌석이 지상으로부터 20피트 떠 있게 만들어지는 400석 규모의 더빙 시어터는 세계 최고 규모의 음향시설과 스크린을 갖추게 되며, 그 지하에는 역시 최고의 현상설비가 들어온다고 한다. ‘홍콩무비시티’는 쇼브러더스가 운영하는 사설 스튜디오다. 고가의 사용료가 요구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생각보다 비싸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레이먼드 챈은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긴 세월 동안 순차적으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이곳은 백지상태에서 최대의 집적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한번에 설계했기 때문에 확보한 기술의 질에 비해 건설 비용이 상대적으로 아주 싼 편”이라며 “최소 8편의 작품을 동시에 촬영하고 후반작업할 수 있는 규모라서 이를 자체 활용할 영화제작을 곧 재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룡반도 안의 신계지(新界地) 깊숙한 곳에 지어지는 무비시티와 달리 올해 여름께 완공될 ‘사이버포트’는 홍콩섬 남단 해안에 위치했다. 사이버포트는 위압적으로 느껴질 만큼 미래도시적인 웅장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입주해 있는 이곳은 IT와 멀티미디어의 아시아 허브를 꿈꿀 만하지만 영화산업의 후반기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홍콩 최대의 디지털 후반작업 회사인 ‘센트로 디지털 픽처스’만이 입주해 있었다. 센트로의 존 추 대표는 “이곳은 HD 스튜디오, 레코딩 스튜디오, 모션캡처 스튜디오 등 공용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며 “그러나 다른 영화 후반업체가 입주한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풍운> <소림축구> <킬 빌> 등의 CG를 맡아 처리했고 현재 주성치의 <쿵푸>와 <킬 빌2>의 후반작업이 진행 중에 있었다. 무비시티에 인접해 있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느냐고 묻자 “그곳은 너무 멀다”며 손사래를 친다. CEPA 효과는 이 회사에도 있었다. 지난해 상하이에 자회사를 세운 뒤 그곳에서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겸한 ‘중국식 해리 포터’ <시크릿 오브 우루>를 제작 중이다. “미라맥스와 장편애니메이션을 공동기획 중이지만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하고 지금 이 시점의 홈베이스는 중국이다. 홍콩은 너무 작다.

▲ 공사 18개월째인 홍콩무비시티. 무비시티의 설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인지는 홍콩 안에서도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중국 효과’ 비관적 시각도

무비시티처럼 홍콩은 고도의 집적효과를 발휘하도록 설계되고 발전돼왔다. 지하철역과 쇼핑몰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건물 내부에서 입구로 나서자 홍콩성시대학의 캠퍼스 안이다. <와호장룡> <툼레이더2> 등의 제작에 관여한 옥토버 픽처스 대표 필립 리는 홍콩성시대학의 ‘크리에이티브 미디어’ 학부의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홍콩에서 만난 유일하고도 강력한 ‘비관론자’였다. 마침 그는 홍콩 영화산업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이었는데 ‘중국 효과’에 대한 홍콩 영화인의 믿음은 현재로선 환상이라고 단언했다. “CEPA로 중국 진출의 모든 장벽이 사라진 듯 이야기한다. 1∼2년은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만든 것, 만들 것 모조리 다 팔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퀄리티의 향상없이 지금 이 상태로 공급한다면 장기적으로 대륙 관객이 홍콩영화라면 질려서 외면하는 악재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짚은 홍콩 영화계의 문제점은 16가지에 이른다. 열정과 창의성의 부재, 투자자를 등돌리게 하는 투명성 부족, 독립영화 프로듀서의 부족, 영화계의 리더십과 국제적 비전 부재…. 그의 이런 비관의 근원은 주로 보수적이고 근시안적인 제작자들에게 그 원인이 있었다.

한국 영화계에 충고하다

홍콩을 떠나기 전날 밤, 옛 중국은행 빌딩으로 초대됐다. 몇층인지 알 수 없는 곳에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고급 사교클럽 ‘중국회’(中國會)가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 전통의 레스토랑, 홍콩섬의 화려한 야경을 볼 수 있는 베란다, 사방 벽이 고급스런 책장과 책으로 가득 찬 거실, 서양식 바 등이 몇층에 걸쳐 화려하게 자리잡고 있다. 무엇보다 그곳은 일종의 갤러리다. 계단과 복도에 수많은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그런데 바에 들어서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뼘 빈틈도 없이 빼곡히 걸려 있는 수십점의 그림들은 모조리 마오쩌둥과 중국 인민군대를 묘사한 것들이었다. 금융자본주의와 무역도시의 상징 같은 홍콩의 부유층이 모여 술잔을 부딪치는 곳에 마오쩌둥이라니…. 중국회는 97년 홍콩반환 직전에 만들어졌다. 새 시대를 향한 재빠른 변신일까, 숨겨뒀던 본색의 발현일까. 분명한 건 중국회처럼 홍콩 영화산업과 홍콩 시네마를 서서히 ‘지배’하는 것도 이곳에선 보이지 않는 거대한 대륙, 중국이었다. 필립 리처럼 홍콩영화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근거도, 빌콩처럼 더이상 홍콩영화를 따로 떼어내 보는 게 무의미해졌다는 이유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지만 홍콩이 한국과 기본적으로 다른 차별성은 분명했다.

사소해 보이지만, 8일 동안 만난 홍콩 영화인들 중에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제작자(와 감독)에게 해외부문은 ‘변수’(變數)일망정 ‘상수’(常數)는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홍콩 영화산업에서 ‘해외시장’은 늘 ‘상수’다. 중국어 이름과 영어 이름 두개를 동시에 사용하는 건 그래서 당연하다. 차이나클럽으로도 불리는 중국회에서 살롱 필름즈의 프레드 왕은 한국 영화계에 대한 지적과 함께 의미심장한 ‘제안’을 건넸다. “한국은 HD영화라고 하는 미래의 디지털 시네마에 대한 기술이 절대적으로 떨어진다. 또 한국 바깥의 해외시장을 겨냥하는 노하우와 네트워크가 아주 취약하다. 지금은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 아시아 차원에서 제작을 도모하면서 할리우드와 경쟁할 때다. 난 지금 윈-윈 게임을 도모할 수 있는 아시아 펀드를 만들어 안정적인 영화제작을 꾀하고자 하며 한국쪽 파트너를 물색 중이다.” 그는 중국은 물론이고 방콕, 콸라룸푸르, 도쿄, 마닐라 등에 이미 지사를 세워놓았다. 한국과는 기존의 투자 펀드들 외의 금융계 인사와 접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살롱 필름즈는 지나온 돌다리도 다시 두드릴 만큼 신중하게 움직이는 회사로 유명해서 ‘아시아 펀드’ 구상이 언제 구체화되고 실행될지를 당장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홍콩에서 돌아온 뒤,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달시 파켓이 <씨네21> 439호 ‘외신기자클럽’에 쓴 글의 끄트머리 한 문장이 유달리 크게 보였다. 한국영화의 시장 규모가 그 자체로 세계에서도 큰 편인 까닭을 잔뜩 써놓은 끝이다. “머잖은 미래에 중국시장의 한 귀퉁이라도 차지하고 있다면 한국 영화산업의 미래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셀레스티알 픽처스

쇼브러더스의 모든 영화 DVD로 복원, 출시한다

쇼브러더스 라이브러리 760편의 판권을 모두 사들여 필름으로 복원해 DVD 출시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셀레스티알 픽처스는 사무실도 쇼브러더스의 옛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2002년 12월 첫 출시 이래 170편을 복원했고, 첫 타이틀은 지금까지 50만개가 팔렸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한국’을 내세운 팸플릿을 특별히 만들었다. “쇼브러더스가 한국의 영화 재능을 출발부터 지원하다”는 제목 아래 정창화 감독의 <천하제일권><더 킹 복서>, 1972)과 배우 신영균이 출연한 <철두황제>(<더 킹 위드 마이 페이스>, 1967)의 스틸 사진으로 태극 무늬를 만들어놓았다. 미국인 CEO 윌리엄 파이퍼는 “12살 때 뉴욕에서 정창화 감독의 <천하제일권>을 보고 홍콩 무협영화에 매혹됐고 그때 가졌된 꿈이 DVD 출시로 실현됐다”고 말했다. 쇼브러더스 라이브러리는 HBO, 소니 등에서도 욕심을 냈고 협상을 벌이기도 했지만 최종 거래는 셀레스티알과 성사됐다. 쇼브러더스 관계자는 “오너인 란란쇼와 셀레스티알의 소유주인 말레이시아 재벌이 친구 사이여서 판권을 그쪽으로 넘겼다”며 “DVD과 리메이크 작업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고 무비시티가 만들어지는 마당이어서 라이브러리를 팔아치운 걸 뒤늦게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셀레스티알 픽처스도 중국 진출이 활발하다. 최근 중국에서 ‘셀레스티알 무비즈’란 이름으로 24시간 방송할 케이블 채널을 확보해 2월18일 방영을 시작하며, 지난해 중국에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좋은 성과를 얻은 합작영화 <칼라, 마이 도그>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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