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홍콩에 대륙의 바람이 분다 [5]
2004-02-20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노동자 시대는 지났다, 중산층 관객 코드를 읽어라

홍콩의 차세대 작가와 감독들

1990년대 중반 이후 젊고 새로운 영화인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했지만, 이들은 홍콩 영화계 전체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설정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하나의 이유는 아마도 홍콩 영화산업이 그 역사 전체를 통틀어, 그리고 그 황금기였던 80년대에 특히 노동자-서민계층의 감수성과 기층 정서에 강하게 지배되어왔다는 점일 것이다. 주윤발이나 성룡, 오우삼 감독 등과 같은 당시의 대스타들 대부분이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간 홍콩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상당 부분 중산층화되었음에도 홍콩 영화업계는 관객의 바뀐 취향에 적응하지 못했다. 최근 홍콩에서 한국영화가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한국영화가 현대의 중산층적 생활 양식을 홍콩영화보다 성공적으로 포착해내고 있다는 점이 작용한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홍콩의 영화업계가 적응을 위한 고군분투 끝에 찾아낸 하나의 탈출구가 바로 로맨틱코미디 장르이다. 이 장르의 영화들은 일본 TV드라마의 영향을 일정 부분 받아들이면서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는 데 성공했다. 아마도 그 전환점은 두기봉-위가휘 팀의 2000년작 <고남과녀>(孤男寡女, Needing You)와 2001년작 <수신남녀>(瘦身男女, Love on Diet)였다고 할 수 있겠다. 두 작품 모두 그 호칭조차도 일본 드라마를 통해 소개된 이른바 ‘OL’(Office Lady) 인구들의 열광적인 지지 덕분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두 작품의 성공 이후 홍콩 영화계에서는 여성 취향의 코미디가 돈벌이를 위한 주요 소재가 되었다. 정수문(鄭秀文, Sammi Cheng), 양천화(楊千嬅, Miriam Yeung), 그리고 여성 듀오 ‘트윈즈’ 등이 이 장르의 주요 스타이다. 한때 남성 위주의 액션물과 폭력적인 무술영화에 의해서 완전히 규정되었던 홍콩 영화계는 현재 성(性)의 균형에서만큼은 좀더 균형 잡힌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수년간 홍콩 영화계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작가와 감독들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미래에 홍콩의 영화산업을 어느 정도까지 회복시킬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어려운 영화산업 속에서 적은 예산과 제한된 자원만으로 영화를 만들면서도 이들은 대중의 변덕스러운 취향에 민첩하게 적응하며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비록 이들 중 그 누구도 아직은 서극이나 왕가위, 진가신 등과 같은 예술적 혹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홍콩의 영화산업이 완전한 붕괴 상황을 맞는 것을 바로 이들이 막아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속 극장을 찾도록 홍콩영화에 대한 관객의 관심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이들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래에서 이들 중 주목할 만한 몇몇 새로운 감독들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기초가 탄탄한 카멜레온 >> 엽위신(葉偉信, Wilson Yip)

1980년대부터 도제식 수련을 받으며 영화계에 입문했지만 이후 시대의 변화에 절묘하게 적응하면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둔 다재다능한 감독이다. 그는 공포영화 (1995)이나 갱스터영화 <왕각풍운>(旺角風雲, Monkok Story, 1996), 액션호러물 <생화수시>(生化壽屍, Bio Zombie, 1998) 등과 같이 기존 홍콩영화의 관습에 충실한 영화들로부터 감독 경력을 시작했지만, 최근 들어 중산층적 감수성을 의도적으로 선명하게 반영한 액션영화 <신투차세대>(神偸次世代, Skyline Cruisers, 2000)와 (2001), 그리고 젊은 관객층을 겨냥한 코미디물 <건시열화>(乾柴烈火, Dry Wood, Fierce Fire, 2002) 등을 통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근작 <오개혁귀적소년>(五個??鬼的少年, Mummy, Aged 19, 2002)은 예상외로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비평가들로부터도 호의적 평가를 끌어냈다.

B급 로맨틱코미디의 대가 >> 마위호(馬偉豪, Joe Ma Wai-ho)

마위호 감독 역시 1980년대부터 영화계에서 활동해왔지만 가히 예외적이라 할 만큼 성공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한 중년 감독이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입문한 이후 90년대 들어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는데,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당시로서는 주류 장르라 할 수 없었던) 일련의 10대 로맨스물들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의 <백분백암>(百分百岩Feel, 100% Feel, Once More, 1996)이나 <백분백감각>(百分百感覺, Feel 100%, 1996), <초련무한>(初戀無限touch, First Love Unlimited, 1997) 등이 흥행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들이다 보니 대단한 수익률을 기록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된다. 로맨틱코미디를 선호하는 그의 성향은 현재의 시장상황 속에서 상당한 장점으로 작용했고 그가 최근 수년간 만들어온 중저예산의 작품들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 성룡이 출연한 진목승 감독의 <뉴 폴리스 스토리>(사진 위). 한동안 연출 일선에 떠나 있던 그는 홍콩에서 큰 인기를 얻은 <쌍웅>(사진 아래)으로 연출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옥녀첨정>(玉女添丁, Dummy Mommy, Without a Baby, 2001)이나 <신찰사매>(新紮師妹, Love Undercover, 2002) 같은 작품들 통해 양천화(楊千嬅, Miriam Yeung)가 이 장르의 스타로 발돋움하기도 했다. 그는 2001년에 4편, 2002년에 2편, 2003년에 3편을 연출하는 등 다작 감독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는데 그의 최근작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지하철>(地下鐵, Sound of Colours, 2003)이다.

영리한 작가주의 사업가 >> 진경가(陳慶嘉, Chan Hing-kar)

진경가는 오우삼의 <영웅본색>(1986)이나 성룡의 <썬더볼트>(1995), 진가상(陳嘉上, Gordon Chan)의 <야수형경>(野獸刑警, Beast Cop, 1998), 이연걸의 <히트맨>(1998) 등을 집필한 바 있는 유명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감독이다. 그가 연출을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인데 데뷔작 <절세호>(絶世好Bra, La Brassiere, 2001)와 후속작 <절세호B>(絶世好B, Mighty Baby, 2002) 같은 중저예산 규모의 로맨틱코미디로 성공을 거두었고, 지난해에는 <연상니적상>(戀上??的床, Good Times, Bad Times)과 <호정>(豪情, Naked Ambition) 두편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감독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2002년작 과 2003년작 등이 그가 쓴 작품이다) 그는 자신이 집필하거나 연출하는 작품의 프로듀서를 스스로 겸하면서 자기 작품에 있어서의 예술적, 사업적 권한을 영리하게 확보하고 관철시켜나가고 있다.

액션 장르에서의 뛰어난 세공력 >> 진목승(陳木勝, Benny Chan)

아마도 진목승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성룡의 C.I.A>(Who Am I?, 1998)일 것인데, 이처럼 그는 액션 장르에서의 뛰어난 세공력으로 널리 인정받아온 감독이다. 그는 거장 두기봉 감독과 함께 작업하며 그에게 사사받았고, 역시 두기봉 감독의 도움 아래 <천약유정>(天若有情, A Moment of Romance, 1990)으로 데뷔했다. 데뷔 이래로 꾸준히 중소 규모의 액션영화들을 찍으며 활동하던 그에게 전환점이 된 작품이 <충봉대─노화가두>(衝鋒隊─怒火街頭, EU Strike Force, 1996)이다. 이 작품을 인상 깊게 본 성룡이 그를 <성룡의 C.I.A>의 공동감독으로 발탁한 것. 이후 그는 <젠 엑스 캅>(1999)과 후속편 <젠 와이 캅>(2000)(젠 엑스 캅2????)으로 큰 흥행 성공을 거두는데, 이 시리즈물의 성공은 뛰고 달리는 기존 액션물의 공식 속에 홍콩 사람들의 변화된 중산층적인 감수성을 성공적으로 녹여냈기 때문이다. 진목승은 한동안 연출 작업을 떠나 프로듀서로서의 활동에 전념했는데(2002년작 <천정선생>(賤精先生,If You Care)이 그가 프로듀싱한 작품이다) 다시 지난해 <쌍웅>으로 연출 일선에 복귀했다. 올해는 그에게 또 다른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얼마 전 성룡과 함께 <뉴 폴리스 스토리>의 촬영을 마쳤고, 영화는 올해 하반기에 개봉될 예정이다.

▲ <이도공간> (위) ▲ <젠 엑스 캅> (아래)

장가수, 연기, 연출 '팔망미인' >> 지시 구 비(GC Goo Bi)

감독이기 이전에 최고의 인기 라디오 DJ이자 ‘트윈즈’의 멤버인 ‘지시 구 비’는 새롭게 등장한 홍콩 영화인들 가운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일 것이다. 그녀는 옴니버스영화 <연애기의>(戀愛起義, Heroes in Love, 2001)의 3부작 중에서 <오 지!>(Oh G!)라는 단편을 만들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영화적 직관과 당시로서는 무명에 가까웠던 채탁연(Charlene Choi)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녀는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방송되던 인기 연재드라마 코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메리-고-라운드>(Merry-Go-Round, 2001)의 시나리오를 썼고 (그리고 영화 내용의 대부분을 스스로 연기했다), 2003년에는 다시 의 시나리오를 쓰는 등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바쁜 일정을 쪼개 영화 연출을 계속할 수 있다면, 그녀는 홍콩 영화계의 핵심 인사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도공간>으로 입지 다진 기대주 >> 나지량(羅志良, Law Chi Leung)

방송사의 프로덕션 스탭으로서, 그리고 이후에는 영화 조감독으로서 오랜 기간 숱한 제작 경험을 쌓은 나지량은 1995년 <열화전차>(이동승 감독)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오랜 스탭 생활을 접은 뒤, 이듬해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노장’ 이동승과 공동감독한 <색정남녀>(1996)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다. 잠깐의 공백기를 거쳐 그는 액션영화 <쟁왕>(Double Tap, 2000)으로 연출 일선에 복귀하는데,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장르적 세공 능력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이후 장국영이 출연한 <이도공간>(2002)을 통해서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게 된다.

글: 샘 호(Sam Ho) / 영화평론가 번역: 권재현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