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스며든 터키계 영화의 힘
<헤드-온>(Gegen die Wand)은 1986년 <슈탐하임> 이후 처음으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한 독일영화다. 경쟁부문에서 한번 탈락한 전적이 있는 <헤드-온>은 감독 파티 아킨조차도 수상을 기대하지 못했지만, 내레이션 역할을 하는 터키 노래와 파괴적인 유머감각, 성숙한 성찰 덕분에 진심어린 호의를 얻은 영화였다. 터키계 감독과 배우가 만든 <헤드-온>은 코미디로 시작해서 비극적인 사랑으로 치닫는 독특한 행로를 밟아간다. 보수적인 가족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는 스무살 터키 처녀 시벨은 우연히 만난 중년남자 카힛에게 결혼해달라고 조른다. 카힛은 아내가 죽은 뒤에 알코올과 마약에 젖어 살고 있다. 좋은 일 한번 하자는 심정으로 마지못해 시벨과 결혼한 카힛은 천진하고 생기있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시벨도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카힛은 말다툼 끝에 실수로 시벨의 남자친구를 죽이고 만다. <헤드-온>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삶은 무너져버리는 비애를 담고 있다. 감옥에 있는 남자는 그 사랑을 간직하겠지만, 혼자 살아가야만 하는 여자도 그럴 수 있을까. 서른한 살의 젊은 감독 파티 아킨은 그가 좋아하는 펑크음악처럼 거친 음색으로 내지르다가도, 죽음 같은 고독을 견디고 다시 만난 연인 앞에선, 숨소리마저 아끼는 어른스러운 배려를 보여준다. 아킨은 처음에 이 영화를 온전한 코미디로 만들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독일 변방에 갇힌 터키계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사랑을 버려야 하는 냉혹한 현실, 부흥을 맞은 터키계 리얼리즘영화의 흔적은 <헤드-온>을 쓸쓸한 이별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혹은 감독이 말하는 대로, 사랑과 죽음과 악마의 삼중주로. 베를린영화제 내내 만날 수 있었던 <헤드-온> 포스터는 사랑에 빠진 카힛이 두팔로 유리컵을 부수고 피를 흘리며 환호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처럼 <헤드-온>은 사랑이 누군가를 구원하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어둡고 냉소적인 어조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킨이 너무 빨리 터득한 진리, 외면하고 싶더라도 끝내는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공기가 달라질 때마다 등장해 옛 연인의 우화를 노래로 들려주는 터키 악단은 마지막에 관객을 향한 인사까지 잊지 않아 박수를 받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스타. 아킨은 이 터키 음악과 서구 음악의 만남과 변형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영화도 찍을 계획이다.
=시나리오에는 시벨과 카힛이 예전으로 돌아가는 결말이 하나 더 있었다. 하지만 <헤드-온> 촬영은 너무 힘들었고, 끝무렵엔 스탭도 배우도 모두 지쳐 있었다. 그래서 호텔 안에서만 찍어도 됐던 지금의 결말을 선택했다. (웃음) 헤피엔드였다면 좋았겠지만, 이치에 맞지 않았다. 시벨은 많은 일을 겪었고 그만큼 성숙해졌다. 이제 그녀는 감정이나 욕망보다는 이성을 믿는다.
-비롤 위넬과 시벨 키켈레는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시벨 키켈레는 <헤드-온>이 첫 번째 영화인데, 어떻게 그런 연기를 이끌어냈는가.
=비롤과 시벨은 모두 대단히 강인하고 지적인 배우들이다. 시벨은 콜론에 있는 쇼핑몰에서 발견했다. 그무렵 그녀는 시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350명이 넘는 후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다. 비롤은 이전에도 영화 두편을 함께 찍었다. 비롤은 거칠고 파괴적이어서 다른 감독들이 그와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웃음) 그는 드라마투르기나 영화의 구조에 대해서 단 한번도 묻지 않지만, 그 모든 걸 완벽하게 이해한다.
-당신의 전작 <솔리노>는 이탈리아 이민 노동자를 다루고 있고, <헤드-온>은 ‘Gastarbeiter’(Guest worker, 터키 이민 노동자를 뜻하는 독일어)가 주인공이다.
=나는 내 영화들을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내게 다음 영화도 게스트 워커에 관한 이야기인지 묻지만, 그런 단어는 쇼비니즘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당신 영화에는 항상 서로 다른 문화들이 공존하고 있다. 당신은 왜 독일 한 나라만을 담지 않는 것인가.
=<헤드-온>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독일인이다! 누군가 나를 터키계 독일인이라고 부른다 해도, 나는 그저 독일인일 뿐이다. 나는 독일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도 이곳에서 살고 있다. 독일은 내 모국이다. 우리 세대는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독일영화는 그런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