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결산 [7] - 열광의 화제작들과 기대에 못미친 기대작들
2004-03-02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박수치거나 혹은 야유하거나

베를린을 열광시킨 화제작들과 기대 못미친 ‘기대작’들

<몬스터>
<비포 선셋>
<파이널 컷>
<마리아의 은총>

2월8일 베를린 시네맥스 극장 앞에선 비명이 터져나왔다. <몬스터>를 보기 위해 30분 전부터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이 좁은 입구로 한꺼번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제는 예술영화가 유일하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겠지만, 그 힘도 스타가 출연하는 할리우드영화를 누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몬스터>는 모든 이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미국 최초의 여성연쇄살인범’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간 이 영화는 아름다운 외모를 늘어진 살과 빽빽한 주근깨로 가리고 출연한 샤를리즈 테론 덕분에 기대를 모았던 영화. 그 호연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단이 여우주연상 공동수상을 결정한 <마리아의 은총> 역시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해 소문이 먼저 도착한 영화였다. <마리아의 은총>은 마약 캡슐을 위장 안에 넣고 운반하는 소녀들의 사연을 성장의 테마와 함께 누벼넣어 연기뿐만 아니라 연출도 호평을 받았다. 처음 영화에 출연한 주연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는 보고타에서 살고 있는 대학생. 감독 조슈아 마르스턴은 그녀의 오디션 테이프가 도착한 날을 “정말 멋진 아침이었다”고 회상했다. <잊혀진 포옹>은 상영 전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다민족으로 구성된 좁은 상가를 다큐멘터리처럼 기록한 연출과 젊은이다운 유머감각이 돋보였고, 심사위원상과 남우주연상을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그러나 가장 기대를 모았고, 그 기대에 부응한 영화는 <비포 선셋>이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만났던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줄리 델피, 에단 호크가 2주 만에 신속하게 촬영한 이 영화는 상영 내내 웃음소리와 탄성이 끊이지 않았고, 여섯달 뒤에 다시 만나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연인이 한방에 머무르면서 막을 내리자 박수가 쏟아졌다. 모두가 기다렸던 이 속편은 <가디언>으로부터 “로맨틱하면서도 로맨스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영화”라는 적절한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실망 또한 적지 않았다.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파이널 컷>은 베를린 공식 데일리가 이례적으로 한면 전체를 할애한 영화였다. 스물여섯의 오마르 나임이 처음 연출한 이 영화는 <트루먼 쇼>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혼합한 듯한 이야기로 흥미를 자극했다. 미래의 언젠가,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몸 안에 메모리 칩을 심어서 삶의 모든 순간을 기록할 수 있다. 앨런은 유족들을 위해 그 영상을 편집하는 커터다. 그는 평소처럼 누군가의 기억을 자르고 붙이다가 어린 시절 자신의 실수로 죽었다고 믿고 있던 친구를 발견한다. 누군가 그의 기억을 조작한 것일까?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파이널 컷>은 이처럼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듯했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허무한 결론에 도달해 경쟁작 중 가장 커다란 야유에 파묻혔다. 존 부어맨과 에릭 로메르는 제각기 다른 세계를 확립한 거장이어서 많은 이들이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렸던 감독들이었다. 실화를 소재로 삼은 에릭 로메르의 <트리플 에이전트>는 이중 스파이로 일했다는 의심을 받은 어느 러시아 군인에 관한 영화. 한 기자는 <트리플 에이전트>가 거의 방안에서만 머물면서 대화로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영화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가, 주연 세르주 렌코와 싸움이 날 뻔하기도 했다. 존 부어맨도 만만치 않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컨트리 오브 마이 스컬>은 아파르트헤이트의 희생자들을 찾아다니며 증언을 녹취했던 작가 안티에 크로그의 논픽션이 원작인 영화. 부어맨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여성과 미국의 흑인남성을 그 증언 기록단에 집어넣는 흥미로운 조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냉소가 전혀 빛을 발하지 못한 <컨트리 오브 마이 스컬>은 백인이 만든 영화답게 눈물어린 사연과 심판없는 공존을 강요하는 맥빠진 영화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