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결산 [6] -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친밀한 이방인>
2004-03-02
글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글 : 김현정 (객원기자)
베를린에서 만난 영화 4 - 파트리스 르콩트의 <친밀한 이방인>

관능, 욕망 그리고 사랑의 스릴

파트리스 르콩트는 2001년 <펠릭스와 롤라>를 들고 베를린영화제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영화를 좋아한 사람을 딱 다섯명 만나봤다”고 농담을 할 정도로 홀대받았지만, 올해의 기억은 그 상처를 충분히 달래줄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제 공식일정 첫날 상영된 <친밀한 이방인>(Confidences Trop Intimes)은 은밀한 욕망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우아하고도 유머있게 그려내 이견없는 갈채를 받았다. 윌리엄은 단 하루도 넥타이를 매지 않고 출근해본 적이 없는 고지식한 세무사다. 어느 날 그의 사무실에 안나라는 낯선 여자가 찾아온다. 그녀는 같은 층에 있는 정신병원 대신 윌리엄의 사무실로 들어온 것이다. 뒤늦게 진상을 파악한 윌리엄은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하지만, 부부생활의 가장 깊숙한 비밀까지 들어버리고 난 뒤라 어찌할 수가 없다. 윌리엄은 차츰 일주일에 한번 있는 안나와의 상담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르콩트는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걸 좋아했지만, 제롬 토네르가 쓴 30페이지 분량의 시놉시스를 읽고 이번엔 각색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다른 작가가 쓴 시나리오는 나를 다른 세계, 내가 머물고 싶은 세계로 인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친밀한 이방인>은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걸 온 더 브릿지>를 기억하는 관객에게도 충분히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다. 문을 잘못 열지 않았더라면, 완전한 타인으로 남았을 남자와 여자. 그들은 그 우연을 단지 우연으로 남겨두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뒤섞여버린 운명은 돌이킬 수 없다. 언제나처럼, 사랑은 결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사무실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영화의 거의 전부인 <친밀한 타인들>은 그 단조로운 공간 안에서도 조금씩 변화를 감지하곤 한다. 책상에서 긴 의자로, 문틈으로, 르콩트는 때로는 엿보는 것처럼 때로는 쓰다듬는 것처럼 카메라를 이용한다. 그가 “관능, 욕망, 사랑, 스릴러”라고 부른 바로 그 느낌처럼. 몇명 없는 조연도 <친밀한 이방인>을 사랑스러운 영화로 만들어준다. 진지하지만 인색한 옆방 정신과 의사나 모호한 감정에 시달리는 윌리엄의 옛 여자친구, 고집센 여비서는 이 영화에 이전보다 풍성해진 유머와 넓어진 시선을 부여한다.

-<친밀한 이방인>은 갑자기 낯선 여자가 찾아온다는 점에서 히치콕을 생각나게 한다. 윌리엄이 창문 너머로 이웃들을 관찰하는 장면은 <이창>과 비슷하기도 한데.

=히치콕의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참고하지는 않았다. 나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영화를 만든다. 내 영화 속 인물들이 다음엔 무슨 행동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친밀한 타인들>의 아이디어를 내게 준 건 시나리오를 쓴 제롬 토네르였다. 나는 한 여자가 문을 잘못 열었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가장 내밀한 사정을 털어놓는 이야기에 매혹됐다. 이 영화는 센티멘털한 스릴러다.

-이 영화는 윌리엄과 안나 두 인물에게만 집중하는 영화다. 어떤 방식으로 배우를 선택했는가.

=상드린 보네르는 내 영화 <무슈 하이어>에 출연한 적이 있다. 나는 그녀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고, 그녀에게 맞는 시나리오를 찾고 있었다. 상드린은 <친밀한 이방인> 시나리오를 읽고 곧바로 출연을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색에도 참여했다. 파브리스 루치니는 제작진이 모여 토론으로 결정한 배우다. 요즘 사람들은 말을 너무 많이 하지만, 파브리스는 귀를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윌리엄이 그런 것처럼. 상드린과 파브리스는 다행하게도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윌리엄과 안나는 오해 때문에 만나게 된 사람들이다. 그 낯설고 서먹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선 두 배우가 서로 모른는 사이인 편이 나았다.

-텅 빈 방만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 장면은 스튜디오에서 여러 번 다시 찍은 장면이다. 윌리엄과 안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해야만 했다. 안나는 남편에게 자신이 윌리엄과 정사를 가진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이번만은 진짜 정사가 아닐까. 나는 그런 느낌을 정직하게 보여주기 위해 두 사람이 사라진 빈방과 의자만 찍었다. 그들은 더이상 혼자가 아닐 거고, 행복해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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